86세를 일기로 하늘나라 여행을 떠나신 아버님(林元圭, 요아킴)을 진달래 메모리얼 파크 가족묘에 먼저 가셔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곁에 잘 모셔드렸습니다. 아버님을 7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 곁에 모셔드리고 나니 천애고아가 된 느낌입니다.
경상북도 예천에서 출생하신 아버님은 일찍 할아버님을 여의시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셨습니다. 아버님에게는 세상을 먼저 떠나신 여동생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아버님은 적수공권으로 먹고 살 길을 찾아 예천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충주시 산척면으로 이주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만 마치시고 일찌감치 생업 전선에 뛰어드셨습니다. 한글도 모르는 할머니와 철모르는 어린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체구도 작으신 아버님은 그야말로 등골이 휘도록 일을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땅도 한 뙈기 없었다고 합니다.
열악한 가정 형편임에도 아버님은 불타오르는 학구열만은 어찌할 수 없으셨던가 봅니다, 아버님은 낮에는 일하고 틈틈이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부터 시작해서 사서삼경까지 공부하셨습니다.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아버님은 붓글씨도 잘 쓰셨습니다.
아버님은 또 바둑도 잘 두셨습니다. 제가 아마 초단 정도의 바둑 실력을 갖추게 된 것도 순전히 아버님 덕분입니다. 어릴 때 사랑방에서 손님들과 대국을 하시던 바둑판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바둑을 배웠으니까요.
아버님은 성장해서 충주 최씨 무남독녀 어머님과 결혼을 하셨습니다. 당시 외조부님은 남의 땅을 밟고 다니지 않을 정도로 충주시 동량면에서 갑부셨다고 합니다. 외조부님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로 떠나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외증조모님은 아버님의 총명함 한 가지만 보시고 어머님의 출가를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으신 부모님은 장남인 저를 비롯해서 5남1녀를 두셨습니다. 제가 세상을 어렴풋이 이해할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우리집이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동생들은 하교 이후나 공휴일에는 늘 농사일을 도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출세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충주중학교-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해서 법조인이 되어 집안을 일으키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장흥 임씨 가문의 종손에 장손에 장남이라는 위치가 제게는 매우 무겁게 다가왔던가 봅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제가 가고 싶은 학교를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님은 제가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중학교에 보내는 대신 서당에 다니게 했습니다. 중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서당에 다니면서 익힌 한문은 훗날 제가 한의과 대학에 다닐 때나 또 한의사가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부님이나 목사님 같은 분들은 그런 저를 보고 훗날을 위해 예정된 길이었다고 하시더군요.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제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아버님이 가라는 대로 진학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버님 말씀을 거역할 줄도 몰랐습니다. 진학 문제로 예전에는 사실 아버님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버님에 대한 모든 원망은 다 내려놓았습니다만. 나이 40이 넘어 수능시험을 치르고 한의과 대학에 입학한 것이 제가 가고 싶었던 학교에 처음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한학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으셨습니다. 또, 집에서는 엄격하시고 밖에서는 남들에게 잘 하시는 면도 있었습니다. 어머님께서도 '밖에서만 잘하지 말고 집에서도 잘해요~!'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슴 속에 선명하게 새겨진 아버님에 대한 추억 두어 가지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아버님과 인등산 백골이라는 곳으로 니무를 하러 갔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연탄도 못때고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하고 밥을 짓고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일요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리어카에 싣고 10리 길을 걸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님은 나무를 하시고 저는 고사리손으로 나뭇가지를 모으는 일을 도왔지요. 나무 하는 일을 돕는다고 해봐야 얼마나 돕겠습니까?
나무를 해서 리어카에 실어놓으신 다음 아버님은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시고 도시락을 데워 따듯한 밥을 제게 먹이셨습니다. 그 고소하고 꿀맛 같던 밥맛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봄이면 나비가 날고 뻐꾹새가 진종일 울어대곤 했지요. 아버님은 진달래를 한 묶음 꺾어 나뭇단 위에 올려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무를 실은 리어카는 꽃수레가 되었지요. 아버님이 저를 산에 데리고 가신 것은 저를 가까운 곳에 두고 보고 싶으셨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아들을 두고 나서야 아버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엄정면 시골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신명중학교인데요. 당시 신명중학교에는 가난한 학생들이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현금으로 낼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현물 납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한 여름날이었습니다. 2층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쌀 가마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왠 자가마한 체구의 중년 아저씨가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보기에도 많이 지치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많이 낯이 익었습니다. 자세히 바라보니 바로 제 아버지였습니다.
10리도 넘는 먼 길을 무거운 쌀가마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오셨으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어요. 고향인 산척면에서 학교까지 오려면 바마루(밤재)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때 당시는 그런 아버님임이 왜 그리도 부끄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아버님이 부끄러워서였겠지요. 지금은 그런 아버님이 오히려 떳떳한데도 말입니다. 도둑질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보다 백 배는 더 훌륭한 아버지가 아니겠는지요.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제 머리에는 언제나 저 두 가지 추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제게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아버지와의 아름다우면서도 애틋한 추억입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그런 추억이 돌아오지는 않겠지요.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아버님이 이제는 고단한 육신을 벗고 하늘나라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제 존재의 근원이신 그런 아버님이 이젠 저를 떠나 어머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앞으로는 어머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살아가시겠지요.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바쁘신데도 또 코비드-19(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충주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몸소 들르셔서 위로해주시고 슬픔을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가슴 깊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아버님의 장례식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 아버님 가시는 길에 조화와 조기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문자로 또는 전화로 위로를 해주신 분들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장지까지 오셔서 슬픔을 함께 나눠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그 은혜는 제가 평생 살아가면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을 위해 종부성사와 장례미사를 집전해주신 연수성당 김인국 신부님과 보좌신부님, 수산나, 엘리사벳 수녀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바쁘신 가운데도 장례미사에 참석하셔서 아버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 해주신 연수성당 모든 신자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장례식 내내 연도를 해주신 연수성당 신자님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2020. 6. 18.
불효자 임종헌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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