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성당 김인국 주임신부와 인연을 맺은지 꽤 여러 날 되었음에도 아직도 세례명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어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세례명을 직접 물어보기도 뭣해서 연수성당 신자를 통해서 알아보았다. 김인국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꼬(Mark)였다. 김인국 마르꼬 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로서 또는 성직자로서의 활약상이나 명성은 이미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천주교 신부나 신자의 세례명은 불교 승려의 법명(法名)이나 법호(法號)처럼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교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명과 법호를 내린다. 그 법명과 법호는 일종의 화두와도 같은 것이며, 평생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세레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르꼬라는 세례명을 주었다면 '마르코가 걸었던 길을 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마르코라는 세례명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마르꼬(Saint Mark)는 신약성서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로 간주되는 인물로 마가라고도 한다. 헤브라이 이름은 요한네스(Johannes)이다. '사도행전' 몇 군데에서 마르코는 요한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요한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유다인적인 이름이고, 마르코는 로마식 이름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마르꼬의 어머니 마리아(Maria)의 집은 초대 교회의 집회장소로 쓰였다. 이런 연유로 마르꼬는 사도들을 비롯하여 유력한 많은 선배, 지기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또 예수(Jesus)가 베푼 ‘최후의 만찬(晩餐)’도 이 집 2층 다락방에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르꼬는 예수가 직접 택한 제자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자였다. 그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예수와 직접 만났는지에 관해서도 암시적인 기사는 있지만, 추측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마르꼬는 여러 모로 사도 바울로(Paulus, 바오로)를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울로의 제1차 전도여행 때 사촌동생인 사도 바르나바(Barnabas)와 함께 사이프러스(Cyprus), 밤필리아(Pamphylia)까지 동행했다. 이때 그는 음식이나 숙소 등 선교 여행에 필요한 일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교육도 일부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울로 일행이 터키 이사니예 근처 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마르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이 일로 바울로는 마르꼬와 등을 돌리게 된다. 바르나바가 마르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제의한 반면 바울로는 그가 떠난 일을 내세워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바르나바는 바울로와 결별하고, 마르꼬와 함께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갔다. 마르꼬는 그 뒤로 '사도행전'에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바울로는 서간들에서 마르코를 유용한 인물로 언급하고 있다. 서간에서 마르꼬는 바울로의 협력자로서 봉사하는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었고, 바울로가 로마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옆을 지킨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마르꼬는 나중에 바울로와의 관계를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코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에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바르나바나 실라스처럼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들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대 교회 전승에 의하면 마르꼬는 사도 베드로(Saint Peter)의 통역 또는 조수나 비서였다. 마르꼬와 베드로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그의 서간에서 지역 교회들에게 바빌론 교회와 마르꼬의 인사를 전하면서 마르꼬를 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사도교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파피아스(Papias)에 따르면 마르꼬는 예수에 관한 베드로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복음서를 썼다고 한다.
초대 교회의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 263~339)는 마르꼬가 이집트와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9세기에 마르코의 유골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견되어 지중해를 건너 베네치아에 운구되었는데, 그 도중에 많은 이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때 베네치아에는 유골 안치를 위해 성 마르코 대성당이 세워졌다.
이집트 교회는 마르꼬를 설립자로 내세우며, AD 4세기부터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마르꼬 주교좌(cathedra Marci)라고 불러왔다. 마르꼬를 창시자로 삼는 다른 주교좌 도시로는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와 베네치아가 있다. 이 두 도시는 마르꼬를 수호성인으로 삼는다. 마르코의 상징물은 사자이다.
마르꼬 복음서는 복음서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르꼬는 루카(Luke)와 마찬가지로 예수 사건의 목격 증인이 아니었다. 후대 전승에 따르면 마르꼬는 예수에게 파송받은 72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예수가 잡힐 때 벌거벗은 채 도망간 청년이 바로 마르꼬였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실린 마르꼬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매우 단편적이다.. 비평가들은 신약성서에 실린 자료 대부분의 역사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해왔다.
신약성서에 실린 마르꼬의 생애에 대한 단편적인 자료를 종합하면 그는 바울로, 바르나바와 함께 소아시아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마르꼬는 또 이집트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들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으며, 베드로의 가르침을 근거로 복음서를 썼다. 마르꼬가 걸었던 길은 기독교 전도와 교회 설립,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의 연결, 복음서 집필 등 네 가지였다. 김인국 신부의 지향점도 바로 이러한 길이 아닌가 한다.
2020.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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