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3일 주말을 맞아 충주의 진산 계명산에 올랐다. 원거리 산행을 하지 않을 때는 종종 집 바로 뒤에 있는 계명산을 오르곤 한다. 두진아파트 뒤편에서 시작해서 막은대미재-뒷목골산-작은민재-약수터를 지나 웃돌고개를 오르는데 문자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연수성당 마르꼬 김인국 신부가 일요일 미사 강론을 적은 글이었다. 강론과 함께 '오늘은 어디에 계신 하느님을 뵈었나요?'라는 물음을 던져왔다. 화두 하나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 깊숙이 꽂히는 느낌이었다. 순간 나의 뇌리에 '계명산 산신령'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계명산에서 산신령을 만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동문서답이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강론을 읽었다. 다음은 강론 전문이다.<林 山>
용서
마스크! 감염되지도 감염시키지도 않으려고 마스크를 쓴다. 우리 인생도 이런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해를 입기도 하고 덕을 끼치기도 하고. 어서 받고 싶은 것도 있지만 빨리 돌려주어야 하는 것도 있고. 받아야 할 용서도 있지만 주어야 할 용서도 있고. ‘용서의 신비’에 한 걸음 다가가는 가을이 되기를 빌며 오늘 미사를 드린다.
왜 그러고 사는데
“너 왜 그러고 사니?” 하고 강에게 물었다. 지난 여름 큰물이 몇 번 지더니 사라졌던 모래톱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파서 없애 버린 자리를 말끔하게 복원시킨 것이다. 자연은 이토록 너그럽다. 속도 없는가 보다. 강은 왜 그럴까. 바오로 사도가 말했다.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는다고. 묻고 싶다. 왜 그러고 사시는지. 어째서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겠다”(로마 14,7)고 하시는지? 그리고 여러분은 왜 그러고 사셨는지, 지금껏 그리 살고 계시는지? 하여 강에게 물었다. “너는 왜 허구한 날 퍼 주고만 사니?” 여러분 이야기이니 맘속으로 대답해 보시라.
공감
물을 주면 금방 생기를 되찾고 살아나는 식물처럼, 축 처진 사람을 살리는 심폐소생술,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살려내는 초간단 기술, ‘심리적 심폐소생술’! “공감”.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공감
공감은 심한 내상을 입은 누군가의 전쟁 같은 처지에 ‘심리적으로 참전’하는 행동이다. 공감은 연습해야 하고 자꾸만 훈련해야 한다. 하다 보면 몰라보게 좋아진단다.
타인을 공감하는 것보다 자기를 공감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그래도 해야 한다. 자기를 공감해야 남을 공감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자기를 먼저 살려야 남도 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선생님,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어서 괴롭습니다. 용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저는 평화롭지 못합니다. 친구가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다짜고짜 갖은 욕을 제게 다 퍼붓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냥 웃는 얼굴로 저를 대합니다. 저는 미치겠는데 말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담장 혹은 경계가 있다. 이 마음의 국경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한다. 무례한 친구는 국경선을 넘어 쳐들어온 침략군과 같다. 지금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은 모욕을 당했고, 수치를 입었다. 누가 그의 모멸감, 수치심, 모욕감을 알아주고 공감해줄 것인가.
내가 우선이다
그는 위로를 받아야 하고, 공감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그런 고마운 존재가 나타나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나 자신에게 그래야 한다.
천만다행으로 우리에게는 모든 사정을 다 알아주시는 ‘아버지’께서 계시다. 하느님께 ‘하소연’하면 된다. 하소연도 훌륭한 기도이다. 하느님,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화를 내면 된다. 아니 화를 내야 한다. 거칠게 분노를 표출해도 좋다. 하느님은 다 받아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저는 너무 억울하고, 너무 아프고, 너무 부끄럽고, 너무 초라해졌습니다. 나에게 그런 짓을 한 자를 절대 용서하지 마소서. 때려주시고 제가 당한 것보다 곱절로 당하게 해주소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기도를 해도 되나? 된다. 괜찮다. 그렇게 쏟아놔야 더러운 감정을 바깥으로 배출하게 되고, 그래야 숨을 쉴 수 있고, 그래야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 혼자서 방황하는 외로운 자신을 보거든 버선발로라도 뛰어나가 붙들어주고 끌어안아주기 바란다.
‘하소연하는 기도’ 끝에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나를 위로하고 어루만진다. “고생했어.” “그래,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아프니” “걱정 마. 내가 알아. 네가 옳아!”
용서의 놀라운 결과
오늘 성경에서 용서에 관한 말씀을 들었는데, 누구를 용서하기 전에 누군가 때문에 입은 상처에 내가 먼저 공감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것은 내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써야 아직 헤매는 옆에 있는 사람을 도와 씌워줄 수 있는 이치와 통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부키 2018)는 책에 소개된 사연을 아주 짧게 소개한다. 복수 대신 용서를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1) 아버지가 어머니를 목졸라 죽이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딸은 13년이 지나서 교도소를 찾아갔는데 그 만남을 계기로 인생이 바뀌었다. 그녀가 말했다. “용서란 그 행동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용서하는 것이다.”
2) 어려서 성추행을 당한 남자의 이야기다. “20년 전에 나를 추행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오늘도 여전히 그에게 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나를 20년 전 그 자리에 가둔 채 틀어쥐고 있었다. 용서는 나에게 두 가지 힘을 주었다. 첫째, 지금 여기와 미래를 제어할 수 있는 힘. 그리고 둘째, 과거의 일에 휘둘리지 않을 힘. 그러니까 과거의 정신적 외상을 무너뜨려 없앨 수 있게 하는 힘. 나는 용서가 지닌 엄청난 잠재력을 경험했다.”
*어째서 저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혹시 이런 것 아픈 것들도 두루 체험해 보라고, 그래서 더 잘 사람을 이해하고 더 큰 사랑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고민 끝에 신중하게 허락하신 일들은 아니었을까? 아무도 답할 수 없다. 스스로 대답해 볼 일이다.
고통의 신비, 용서의 신비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열매의 계절 9절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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