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순교자 성월 첫 주일 강론 - 김인국 마르꼬 신부

林 山 2020. 9. 6. 18:46

충주 연수성당 김인국 마르꼬 주임신부께서 순교자 성월 첫 주일 강론 원고를 보내왔다. 나는 비록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는 강론이다. 마음 속으로 밑줄을 쳐가면서 읽고 싶은 글이다. 이 강론을 저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林 山>

 

초대의 말씀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리고 있구나 싶은, 순교자성월의 첫 주일입니다.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옛 어른들의 마음으로 청량하기 그지없는 9월을 살아보겠노라 하느님께 다짐을 드리며 오늘 미사를 봉헌합시다. 

 

강론

 

여러분 마음은 지금 어떠세요? 저에게는 이것저것으로 심란했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으르렁거리는 부수고 무너뜨리는 중장비의 굉음부터 시작해서 좀 힘들었습니다. 그런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이제는 좀 다르게, 아주 많이 다르게 살아봐야겠다, 하는 일종의 ‘생의 의욕’이 솟아났습니다. 

 

오늘은 공동체의 낙오병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2독서 로마서의 말씀, 그리고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다 똑같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라는 하느님 백성 공동체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공동체에는 반드시 ‘미운 오리새끼’가 생기기 마련인데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견뎌주어라. 왜? 그가 공동체에서 멀어지면, 그와 공동체 사이에 단절이 생기면 그는 생기를 잃고 시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고 해서 쉽게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만나서 대화하라. 단둘이 만나서 안 되면, 몇몇이 함께 해보라.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되면 교회에게 말하여라. 그리 했어도 결국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데 인간 같지도 않은 존재로 취급하라는 게 아니다. 거리를 두고서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라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나 예수님처럼 하여라. 로마서가 거듭 확인해주고 있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말라, 이겁니다.   

 

성경은 단절 위기에 빠진 공동체의 낙오병에게 충고하라고 이릅니다. 충고라는 소통 방식을 통해서 하느님의 기운과 은총을 그에게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 너는…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7-9) 일종의 연대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충고에 관한 말씀은 레위기에도 나옵니다.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레위 19,17-18) 서슴없이, 주저하지 말고 꾸짖으라고 하셨습니다.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타이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충고하는 일에 물러서지 말고 용감하게 나섭시다. 누군가 유혹이나 오류에 빠지면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피하지 말고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합시다. 혼자 기도해서 안 되면 둘이나 셋이 모여서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여럿이 함께 기도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아파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상대를 움직일 수 있는 말을 구합시다. 

 

인간관계의 어려움  

 

“선생님, 인생을 한 글자로 요약해 주십시오” 했더니 공자님은 難, 부처님은 苦라고, 예수님은 十字架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일까요? 인간관계가 어렵고, 인간관계가 괴롭고, 인간관계는 반드시 십자가를 동반합니다. 평생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혼자 살다시피 했던 어느 수도자도 인간관계가 제일 힘들다고 했습니다.   

 

형제들과의 관계도 어렵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어렵고,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도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참아주어야 하고 꾹 참아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가 신망애 삼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 다른 이들을 참아주는 것이 사랑,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이다.”(아델 베스타프로스)

 

충고보다 더 효과적인 소통방식

 

그런데 시대가 달라지면서 사람들의 행동방식도 달라져서 충고라는 소통 방식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옛사람들은 타일러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미덕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격언이 통하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대인은 타이르는 행위를 불필요한 간섭으로 여기거나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찌하는 게 좋은가요? 충고란 내가 억울한 피해자이니 너에게 보상을 받아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바로잡아서 살리자는 것이라면, 성경은 꼭 충고를 고집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소개합니다. 아주 쉬운데 다른 것 다 집어치우고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너 지금 어떠니? 이 간단한 물음만으로도 일상에서 소리 없이 쓰러져 심정지 상태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뛴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말입니다. 지금 마음이 어떤세요?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길을 잃고 상처를 입은 문제의 그 사람과 공감하되 “온 체중을 실어” 공감하라고 합니다. 이른바 <충조평판>,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은 종종 비수를 꼽는 위험천만한 일이요, 관계의 시작을 가로막는 일종의 허들 같은 장애물이라고 하니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합니다. 

 

그 대신 집중하라. 주목하고 궁금해 하라. 특히 상대의 고유성, 개별성을 인정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공감이 시작되는데 공감이 발생하지 않으면 반사적으로 충고나 조언을 시작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주 사소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들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달려와서 하는 말. “엄마, 엄마 가슴을 부숴버리고 싶어.” 깜짝 놀란 엄마는 이 아이가 어디서 이런 무섭고 험한 말을 배웠을까 마음이 아픈 나머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안 돼요/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그건 나쁜 말이에요/ 그러면 엄마가 여기가 아프잖아/ 아야 하잖아.” 그런데 이 엄마는 공감하기가 생각나서 “그래? 왜? 어떤 마음이 들어 그러는 건데? 어째서 부숴 버리고 싶은 건데?” 했답니다. 그러자 돌아온 아이의 대답. “엄마 가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고 싶어.” 그래서 “엄마 가슴 안에 뭐가 들어 있을 것 같은데?” 물었더니 “엄마 가슴에는 밥, 물, 하트가 들었을 것 같아.” 하더랍니다. 

 

어떤 마음이 들었던 건데? 이렇게 질문하지 않았다면 아이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대답을 듣지 못했을 겁니다. 늘 하던 대로 그러면 못 써요, 했더라면 아이는 당황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겁니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싶어서 충격과 단절을 느꼈을 겁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이 말합니다. 한 번만 물으면 상대의 본심을 알 수 있는데 그걸 묻지 않아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단절의 비극이 생기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한 번만 물으면 곧장 그 사람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데 그 한 번은 사실 너무나 쉬운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니 너무나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연습하면 좋겠습니다. 모쪼록,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7) 이 말씀에 따라 때로는 따끔하게 충고도 하고, 언제나 공감하며 태풍이 불어오는 내일을 맞읍시다. 

 

안녕!

 

2020.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