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이슈 화제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9) 일제가 한반도에 무궁화를 이식했다고?!(2) - 조현래

林 山 2020. 8. 27. 12:07

무궁화는 한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조현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서 이 주장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박정희 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조현래는 주장한다.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林 山>

 

<사진1> 무궁화의 씨앗(경기도)

 

 

[두 얼굴의 무궁화] '일본 제국'은 선배 제국주의 대영 제국이나 프랑스 제국의 본을 받아 자국의 혼네(ほんね, 本音) 나라꽃 무궁화를 식민지 한국에 이식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한반도 강점 초기 조선총독부는 헌병과 일본인 관리를 동원하여 암암리에 마을 입구마다 무궁화를 심었다.*각주 151) (p.182)

 *각주151) 佐佐水正太, 『朝鮮の實情 』, 帝國地方行政學會, 1924, 133쪽-『두 얼굴의 무궁화』(p.405)

 

 

 

fact check》 :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무궁화를 한반도에 헌병과 일본인 관리를 통해 몰래(암암리)에 식재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상식에조차 부합하지 않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는 무궁화가 상당히 식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이를 식재할 이유가 없었다; 19세기 초 정약용은 경기도 지방에서 생울타리로 식재된 무궁화를 소재로 하여 시를 짓기도 했으며, 서유구가 저술한『임원경제지』(1842)에서는 무궁화의 재배법이 소개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초기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산림국 산림과에서 조선에서 행해지는 수목의 식재와 관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도록 했고, 1922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직속기관으로 '임업시험장'을 정식으로 설치하여 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산림과나 임업시험장을 통하지 않고 헌병과 관리가 동원되었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것에서 비롯한 주장이다.

 

-무궁화는 관목이기는 하지만 높이 3~4m까지 자란다. 초본성(풀) 식물이 아닌 목본성(나무) 식물인 무궁화를 마을 입구에 몰래(암암리)에 식재했다는 상상 자체가 망상에 가깝다.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눈먼 장님이었단 말인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무가 식재되고 있는데 그것에 항의하지도 제거하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심지어는 그러한 내용을 기록하지도 않아 그 내용이 하나도 남아 있지도 않다는 말인가? 

▷『두 얼굴의 무궁화』저자가 근거로 제시한 1924년에 저술된 『조선의 실정(朝鮮の實情) 』을 구해 읽었더니 인용된 133쪽에 그런 내용은 전혀 없었고 문헌 전체에 무궁화의 '무'자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의 실정(朝鮮の實情) 』은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 관리인 사사키 쇼타(佐佐木正太)가 자신이 조선에서 온 때로부터 1924년까지의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자연에 대해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일본인들에게 전달해서 식민지인 조선을 보다 잘 이해해서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의 한반도 무궁화 식재에 관한 내용이 실릴 여지도 없는 책이다.

 

-그래도 인용 페이지를 오기한 것이 아닌가 하여, 혹시라도 하는 심정으로 전체 250여 쪽에 달하는 일본어로 된 책을 낱낱이 훑었지만 무궁화의 '무'자도 없었다. 

 

<사진2>   佐佐木正太 ,『 朝鮮の實情 』,  帝國地方行政學會 (1924)

 

《결론》 : 우리 민족에 대한 자학적 인식의 표본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의 교묘함을 고발하는 듯하지만, 그 내용은 우리 민족을 향한다. 마을 입구에 모르는 나무가 심어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를 그저 바보 무지렁이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런 주장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게다가 없는 자료를 근거로 인용하며 선조들과 민족 전체를 모욕한다. 도대체 그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