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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州石(충주석) 效白樂天(효백낙천) - 권필(權韠)

林 山 2020. 10. 30. 12:17

忠州石(충주석) 效白樂天(효백낙천) - 권필(權韠)

 

忠州美石如琉璃(충주미석여유리) 충주 비석돌 유리처럼 고우니

千人劚出萬牛移(천인촉출만우이) 천인 뜯어내고 만우 실어내네

爲問移石向何處(위문이석향하처) 비석돌 실어 어디로 옮겨가나

去作勢家神道碑(거작세가신도비) 세도가 실려가 신도비 된다네

神道之碑誰所銘(신도지비수소명) 권세가 신도비는 누가 지을까

筆法倔强文法奇(필법굴강문법기) 필법도 굳세고 문장력도 좋아

皆言此公在世日(개언차공재세일) 천편일률 이 어르신 살았을 때

天姿學業超等夷(천자학업초등이) 자질과 학식 또래 중 군계일학

事君忠且直(사군충차직) 임금을 섬김에는 충렬하고 강직했고

居家孝且慈(거가효차자) 집에서 거함에는 효순하고 인자했네

門前絶賄賂(문전절회뢰) 문전에는 증뢰자들 얼씬도 못하였고

庫裏無財資(고리무재자) 곳간에는 돈과 양식 쌓인 적 없었네

言能爲世法(언능위세법) 입만 떼면 그 말씀 세인들 법이 되고

行足爲人師(행족위인사) 움직이면 그 행실 남 본보기 되었네

平生進退間(평생진퇴간) 한평생 출세했을 때나 은거할 때도

無一不合宜(무일부합의) 일거수 일투족이 정도에 맞았도다

所以垂顯刻(소이수현각) 그래서 충주 돌로 신도비 세웠으니

永永無磷緇(영영무린치) 천년만년 그 이름 사라지지 않으리

此語信不信(차어신부신) 비문에 쓰인 말 믿겠는가 말겠는가

他人知不知(타인지불지) 세인들은 그 진실 알소냐 모를소냐

遂令忠州山上石(수령충주산상석) 마침내 충주땅 산위의 바위돌을

日銷月鑠今無遺(일소월삭금무유) 나날이 파내 남겨놓지 않았구나

天生頑物幸無口(천생완물행무구) 하늘이 돌의 입 없앴기 망정이지

使石有口應有辭(사석유구응유사) 만일 입 있다면 할 말 많을 텐데

 

'忠州石(충주석)'은 오언과 칠언의 잡언체(雜言體) 한시다. 모두 24구로 되어 있으며, '석주집(石洲集)' 권2에 수록되어 전한다.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이 마구 신도비(神道碑)나 공덕비(功德碑)를 세우고, 문장가들이 아첨하는 글을 지어주는 세태를 비판하고 풍자한 한시다. 

 

'충주석'은 제목에서 보듯이 빠이쥐이(白居易)의 신위에푸(新樂府) '칭싀(靑石)'를 본받아서 지었다. 빠이쥐이의 '칭싀'는 란톈산(藍田山)에서 나는 칭싀를 대신하여 말하는 수법을 이용하였다. 옌젠칭(顔眞卿), 똰슈싀(段秀實) 등의 충렬(忠烈)을 들어 세상사람들의 충렬심을 진작시키기 위해 쓴 한시다.

 

권필의 '충주석'은 충주가 품질이 뛰어난 석재 산지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한시다. 또, 조선시대 중기의 공덕비나 신도비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밝힌 한시다.

 

여장(汝章), 또는 석주(石洲) 권필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다. 권필은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술과 시를 즐기며 일생을 야인(野人)으로 보냈다.  

 

권필은 한양의 서쪽 교외인 현석촌(玄石村)에서 습재(習齋) 권벽(權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현석촌은 지금의 마포구 서강 부근이다. 권필은 시문(詩文)에 뛰어났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7세 때에 벌써 '구차아(驅車兒)'라는 장편 고시를 지을 정도였다.

 

선조 20년(1587) 진사 초시와 복시에 장원했으나 임금에게 거슬리는 글자가 있어 출방(黜榜)당했고, 이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90년에 이안눌(李安訥)과 주고 받은 시를 모아 '창수집(唱酬集)'을 만들었다. 이안눌, 조위한(趙緯韓) 등과 어울려 나중에 동악시단(東岳詩壇)의 선구가 된 시사(詩社)를 만들어 활동했다. 

 

1601년 밍(明)나라 사신 꾸티엔쥔(顧天俊)이 왔을 때 접반사 이정구(李廷龜)가 추천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됐지만, 숙배(肅拜)하지 않고 포의(布衣)로 종사하였다. 숙배는 과거에 합격하거나 문무관직에 임명된 사람이 왕아니 왕비, 대비, 왕세자 등을 찾아가 절하고 사례하는 의식이다. 이때 이안눌, 박동열(朴東說), 홍서봉(洪瑞鳳) 등은 종사관(從事官)이었고, 차천로(車天輅)와 김현성(金玄成)은 제술관(製述官), 이호민(李好閔)은 영위사(迎慰使), 이수광(李邈光)은 선위사(宣慰使)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대문장가들이었으므로 권필의 교유를 짐작할 수 있다. 

 

1612년 친구 임숙영(任叔英)이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책문(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光海君)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노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하였다. 이 시가 광해군의 분노를 사 권필은 곤장을 맞고 해남으로 귀양가을 가게 되었다. 그는 장독(杖毒)에다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과음하여 이튿날 동대문 밖에서 4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야사(野史)에는 권필의 죽음과 관련하여 북악산(北岳山) 백악신사(白岳神祠)에 봉안된 정녀미인신상(貞女美人神像)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권필이 어렸을 때 백악신사에서 놀다가 정녀미인상을 찢어버렸다. 그날 밤 권필의 꿈에 하얀 저고리에 청색 치마를 두른 꽃다운 여자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국사신(國士神)에게 시집 온 정녀부인이다. 천지신명님께서 명하여 남편 국사신은 남산에 내려와 조선을 지키게 하고, 나는 백악으로 보내져 나라를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200년이 지난 오늘 너 같은 어린애에게 모욕을 당하니 분을 참을 수가 없다. 내 천지신명님께 하소연하여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그후 수십 년이 지나 권필이 '궁류시'사건으로 귀양가기 전날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꿈에 정녀미인이 나타나 '이제야 원한을 풀게 되었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권필은 그날 밤 운명하였다고 전한다.

 

이정구(李廷龜)는 후원자 겸 지기(知己)로서 권필이 친교를 맺은 유일한 권문세가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권필은 구용(具容)과 함께 주전론을 펴기도 했다. 허균(許筠)과는 학문적 연원이나 당파가 달랐지만 문학에 대한 식견이 높고 기질도 비슷해 서로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풍자하는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썼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고양군 벽제읍 성석3리에 있다. 묘갈(墓碣)은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였다. 

 

문집과 작품으로는 '창수집(唱酬集)', '석주집(石洲集)', '주생전(周生傳)', '구차아(驅車兒)', '궁류시(宮柳詩)' 등이 전한다. 

 

2020.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