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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45) 거짓과 왜곡으로 우리 옛문헌을 비하 폄훼하다 - 조현래

林 山 2021. 1. 3. 19:14

때아닌 무궁화(無窮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徽章)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강효백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조현래(필명)는 강효백의 주장에 대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강효백만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56년 당시 일간지에 화훼연구가 조동화와 식물학자 이민재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도 사회 일각에서 애국가와 국화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애국가는 작곡자가 친일파이고, 가사도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국화도 무궁화가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조현래-강효백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林 山>

 

<사진1> 무궁화(경기도 안산)

​ ['두 얼굴의 무궁화'에 대한 비판(45)] 거짓과 왜곡으로 우리의 옛 문헌을 비하하고 폄훼하다.

 

 

[두 얼굴의 무궁화] 17. 국내 무궁화 관련 텍스트가 정사(正史)에 무궁화가 단 한 자도 없는 사실은 은폐하는 대신에 주변의 유설류와 일본과 중국의 무궁화 관련 기록을 견강부회·표절·오역·변조·가필하지 않았더라면,(p.17)

이밖에도 '문화콘텐트진흥원'과 '무궁화 사랑 중앙회' 등 무궁화 관련 기존 국내 텍스트는 무궁화의 한반도 역사상 존재근거를 『삼국사기』,『삼국유사』, 『제왕운기』,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한국 7대 대표 사서가 아닌 극소수 유설류나 개인문집-『지봉유설』, 『익재난고』,『아계유고』, 『한정록』,『계곡선생문집』,『학봉일고』, 『증보문헌지고』,『청장관전서』, 『고산유고』, 『재물보』,『순암선생문집』, 『어우집』 등을 열거하고 있는데…. 필자가 오랜 시간 전수분석해 본 결과 이것들은 대부분 중국 문헌을 차운, 인용한 것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에 가필되거나 견강부회식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미주31) (p.62)

*미주31)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Main.do?search_div_id=&cp_code=cp0613;  http://www.mghlove.or.kr/bbs/board.php?bo_table=history (p.391)

 

 

 

《fact check(1)》 무궁화가 정사(正史)에 단 한자도 없다고? - 전혀 사실이 아니다.

 

▶ 정사(正史)란 무엇인가?

 

- 정사(正史)라는 개념은 뜻이 그리 명확하지 않고 불확정적이다.

- 정사에 대해 흔히 사용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각 왕조가 정통으로 인정하여 편찬한 사서(史書)로 민간에서 개인이 저술한 야사(野史), 패사(稗史) 등과 구별된다."(「두산백과사전」중 '정사')라는 개념으로 보자면, 그가 말하는 "한국 7대 대표 사서" 중에 승려 일연이 지은『삼국유사』(1281)와 이승휴가 지은『제왕운기』(1287)는 정사가 아니다. 정사인『삼국사기』(1145)에는 단군신화가 나오지 않는 반면에 야사인『삼국유사』와『제왕운기』에는 단군신화가 수록되어 있으므로,『두 얼굴의 무궁화』의 논리를 빌자면 단군신화를 언급하면 정사에 반하는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인가?

정사에 대해 "중국·한국·일본 등에서 주로 등장한 개념으로 특정한 왕조 또는 시대의 역사를 주로 기전체(紀傳體) 형식으로 편찬한 국가 공인 역사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야사(野史)나 패사(稗史)가 있다."(위키피디아)라는 개념으로 보자면, 그가 말하는 "한국 7대 대표 사서" 중에 편년체(編年體)로 작성된『조선왕조실록』과『승정원일기』는 정사가 아니다. 그러면 정사가 아닌『조선왕조실록』과『승정원일기』에 나오는 내용을 말하면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인가? 

-『두 얼굴의 무궁화』가 낡은 옛 틀을 굳이 언급한 이유가 국가적 과제로 역대 시문학을 모은『동문선(東文選)』(1487), 왕의 어명으로 왕실과 백성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자 저술된『동의보감(東醫寶鑑)』(1613), 조선 후기의 외교관계 문서들을 모은『동문휘고』(1788) 등에 무궁화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왜곡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억측인가?

-『두 얼굴의 무궁화』가 이런 낡은 불확정적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인용하는 일본 문헌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또 다른 함정이 있다. 즉, 일본의 문헌에 대해서는 정사는 커녕 개인들 블로그의 지극히 주관적인 글들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만들어 놓고서는 무궁화에 대한 기록이 일본에서는 풍부하지만 우리 역사와 문화에서는 없거나 극히 지엽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이는 앞서 바로잡기에서 무수히 살펴 본 바와 같다).

 

▶ '한국의 7대 대표 사서'(?)에 무궁화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 한국의 7대 대표 사서라는 것이 어떻게 선정된 것이며, 『동국통감』,『동사강목』 그리고『해동역사』와 같은 역사서들은 왜 빠져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언급한 것이 한국 7대 대표사서라고 하더라도 무궁화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 편년체의 사료로 정리된『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 11년(1505) 10월 18일의 '朝槿'(조근: 아침에 피는 무궁화)으로, 인조 1년 계해(1623) 7월 27일에 "善男顔如槿"(무궁화 꽃 같은 멋진 남자)라는 표현으로 2회 기록되었다.

- 조선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서 국보 제303호로 지정된 『승정원일기』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로서 '槿域'(근역: 무궁화의 나라)이 3회 기록되었다.

-『두 얼굴의 무궁화』가 7대 대표 사서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왕의 명으로 편찬된 역대 시문선집인 『동문선』(1478)에도 무궁화 관련 내용이 다수 기록되었고,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등록류 문서들을 해서체로 정서하여 편찬한 사료집인『각사등록』과 조선 후기 국가의 외교문서를 모아 정리한『동문휘고』에도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槿域'(근역)이 다수 언급되고 기록되었다.

《fact check(2)》 무궁화가 기록된 문헌은?

 

▶ 한국콘텐트진흥원에서 언급된 무궁화 기록 문헌은?

 

-『두 얼굴의 무궁화』는 무궁화를 기록한 우리의 옛 문헌이 극소수 유설류나 개인문집이라고 하면서 여러 문헌을 언급하고, 그 출처를 미주31)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료를 언급하고 있다.

-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무궁화를 기록한 우리의 옛 문헌으로 언급한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 미주31)에 링크된 곳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문화원형 라이브러리」의 '무궁화이야기'이다.[이에 대해서는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Main.do?search_div_id_&cp_code=cp0613 참조]

 

 

『향약집성방』, 『동의보감』,정효공주묘지병서』,『정혜공주묘지병서』,『동국이상국집』 ,지봉유설』, 『익재난고』,『동문선』, 『아계유고』, 『한정록』,『상촌선생집』,『계곡선생문집』,『학봉일고』, 『양촌선생문집』,『사가시집』,『해유록』,『성호사설』,『증보문헌지고』,『동사강목』,『해동역사』,『청장관전서』, 『고산유고』,『재물보』,『다산시문집』,『순암선생문집』, 『어우집』,『임원경제지』,『조선왕조실록』,『일사집략』,『수당집』,『오주연문장전산고』, 『매천집』, 『조선상식문답』

  

 

▶ 인용에서 사라진 문헌은?

- 링크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무궁화 이야기'에는 무궁화를 기록한 것으로 언급되었지만『두 얼굴의 무궁화』에서는 유설류나 개인문집이 아닌 상당수의 문헌들이 인용에서 사라졌는데, 위 박스에서 이 문헌들을 붉은 글씨로 표시하였다.

-『향약집성방』(1433)과『동의보감』(1613)처럼 왕명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편찬했던 의학서에도 무궁화가 기록되었지만, 극소수 유설류와 개인문집 운운하면서 인용에서 사라졌다.

-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인『동문선』(1478)에도 다수의 무궁화 관련 시문들이 실려 있지만, 극소수 유설류와 개인문집 운운하면서 인용에서 사라졌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 스스로가 정사 또는 '한국 7대 대표 사서' 운운했던『조선왕조실록』에도 무궁화가 기록되었지만. 극소수의 유설류와 개인문집 운운하면서 인용에서 사라졌다.

- 실학자들이 저술한『다산시문집』(19세기 중반), 『임원경제지』(1842년 추정) 및 『오주연문장전선고』(1850년 중반경)에도 무궁화가 여러차례 언급되고 고찰되었지만, 극소수의 유설류와 개인문집 운운하면서 인용에서 사라졌다.

-『동사강목』(1756)과『해동역사』(1821)과 같이 고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에서도 무궁화 관련 기록이 실려 있지만, 극소수의 유설류와 개인문집 운운하면서 인용에서 사라졌다.

- 우리의 역사와 조상들의 삶을 알 수 있는 이들 옛 문헌은 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까지 된 문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 극소수의 유설류와 개인문집일 뿐이어서 취급조차 하지 말아야 할 문헌이라는 말인가?     

 

▶ 『동국문헌비고』: 의문의 1패를 당하다.

-『두 얼굴의 무궁화』, p.62에는 극소수의 유설류나 개인문집으로 『증보문헌지고』를 열거하고 있다.

-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무궁화 이야기'에 무궁화가 수록된 문헌으로 언급된『증보문헌지고』부분에는 "1770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는 ≪산해경≫ ≪고금기≫ 등의 무궁화에 관한 기술이 같은 내용으로 실려 있는데, 이는 이수광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는『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을 말하는 것이다. 

​- ​1770년에 영조의 명을 받아 서명응(徐命膺), 채제공(蔡濟恭), 서호수(徐浩修), 신경준(申景濬) 등 당대의 학자들이 다수 참여하여 우리나라의 상고시대부터 당시 조선시대까지 역사, 문물과 각종 제도에 관한 기록을 뽑아 서술하여『동국문헌비고』를 완성하였고, 그 이후  사실이 많이 빠져 계속 보완과 증보의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782년에 다시 이만운(李萬運) 등이 재편찬에 착수하여 1790년에『증정동국문헌비고(增訂東國文獻備考)』(1790)로 일단락되었고, 다시 1895년의 갑오경장으로 제도와 문물이 크게 바뀌자 이를 반영시키기 위해 고종의 명으로 1903년에 홍문관 안에 찬집소(纂輯所)를 두고 박용대(朴容大) 등 33명이『증정동국문헌비고』를 개찬하여 1908년에『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완성하여 1908년에 간행하였다.

-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언급된『증보문헌지고』는 『동국문헌비고』(1770), 『증정동국문헌비고』(1790) 및『증보문헌비고』(1908)라는 일련의 국가적 차원에서 상고시대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의 역사, 문물 및 제도에 관한 문헌을 정리하여 편찬하고 이를 보완하고 증보한 문헌을 말한다.

-『동국문헌비고』(증정동국문헌비고 및 증보문헌비고 포함)에 실렸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군자국'과 '무궁화'(槿花 및 木槿花)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얼굴의 무궁화』에 따르면 , 극소수의 유설류와 개인문집일 뿐이고  중국 문헌을 차운, 인용한 것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에 가필되거나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fact check(3)》 극소수의 유설류와 개인문집 그리고 우리의 옛 문헌에 대한 비하와 폄훼

 

▶ 유설류는 무엇인가?

 

- '유설(謬說)'은 이치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말을 뜻하고, '유설(流說)'은 이 사람 저 사람 입에 오르내리며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을 뜻한다. 『두 얼굴의 무궁화』는 유설류라고 언급하면서 한자 표현을 하지 않아 마치 잘못되거나 근거없는 말이나 소문의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언급한 유설류는『지봉유설(芝峰類說)』이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 유설(類說)의 뜻으로 읽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무궁화가 기록된 유설(類說) 문헌은 왜 극소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지 의문스럽기 그지 없다.

- 학문적으로 『지봉유설(芝峰類說)』과 같은 문헌은 '유서(類書)'라고 한다. 유서는 내용을 사항별로 분류하여 편찬한 책으로 동양의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전 영역 또는 일정한 영역에 걸친 많은 서적으로부터 시문, 인물, 전고(典故), 천문, 지리, 전장(典章), 제도, 비금(飛禽), 주수(走獸), 초목, 충어(蟲魚) 및 기타 많은 사물 등과 관련한 문장을 뽑아 유별(類別), 운별(韻別), 자별(字別) 등으로 편찬함으로써 검색과 다양한 정보 습득에 편리하도록 만든 서적으로 현대의 '백과사전'과 유사하다[이에 대해서는 유희 지음, 김형태 옮김,『물명고(上)』, 소명출판(2020), 머리말 참조].

- 유서는 옛 문헌의 글을 옮겨 와 정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어떤 항목에 대해 어떤 문헌을 빌어 올 것인지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 필요하고 그 항목별 배치와 항목에 대한 추가내용 등에서 저자의 생각이 반영될 수 밖에 없으므로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며, 동시에 각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옛 문화, 제도 및 인식을 알기 위한 더없이 중요한 자료이 다.

-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무궁화 이야기'에 언급된 문헌 중에는『지봉유설』,『성호사설』,『증보문헌비고』(증보문헌지고),『청정관전서』,『재물보』및『오주연문장전산고』가 유서(類書)적 성격을 갖는 문헌이며, 우리나라의 옛 유서(類書)를 대표하는 문헌이기도 하다.

 

<사진2> 이만영,  『재물보(才物譜)』, 필사본(1798)

 

 

木槿 무궁화 ○ 椴 櫬 蕣 日及 朝開暮落花 花奴 王蒸 洽容 愛老(本) ○ 花上花 重臺者 

 

○ 扶桑 槿別種 葉微濇桑 花有紅黃白三色 ○ 佛桑 朱槿 赤槿 日及(本)

木芙蓉 處處有之 揷條即生 小木也 叢生如荊 葉大如桐有五尖 冬凋夏茂 秋半始華 華似牡丹芍藥  地芙蓉 木蓮 華木 拒霜(本) 

木槿(목근) '무궁화'라 한다. 椴(단), 櫬(친), 蕣(순), 日及(일급), 朝開暮落花(조개모락화), 花奴(화노), 王蒸(옥증), 洽容(흡용), 愛老(애노)라고도 한다(본초강목). 花上花(화상화)는 꽃잎이 여러 겹으로 된 것이다.

 

扶桑(부상) 무궁화의 별종이다. 잎은 뽕나무처럼 약간 거칠다. 꽃은 홍, 황, 백의 세가지 색이 있다. 佛桑(불상), 朱槿(주근), 赤槿(적근), 日及(일급)이라고도 한다(본초강목).

木芙蓉(목부용) 곳곳에 있다. 가지를 꽂으면 즉시 산다. 작은 나무이다. 싸리나무처럼 모여 자란다. 잎은 크고 오동나무와 같은데 5개로 갈라져 뾰족하다. 겨울에는 마르고 여름에는 무성하다. 가을 중반에 꽃이 피고 꽃은 모란과 작약과 비슷하다. 地芙蓉(지부용), 木蓮(목련), 華木(화목), 拒霜(거상)이라고도 한다(본초강목). 

 

 

- <사진2>는 1798년에 이만영()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유서(類書)의 일종인 『재물보』이다.

- 『재물보』는 천·지·인의 삼재()와 만물의 옛 이름 및 별명() 등을 모아서, 춘·하·추·동의 4집()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중국의 제자백가와 경사자집은 물론 우리나라의『유원총보(類苑叢寶)』(1643),『역어유해(譯語類解)』(1690),『동의보감(東醫寶鑑)』(1613),『농가집성(農家集成)』(1665) 등의 방대한 서적을 참고 하고 일일이 출전을 밝히고 있다.

- 식물에 대해서는 곡식류(穀), 채소류(菜), 과일류(果), 초본류(草), 목본류(木), 대나무류(竹) 등으로 분류하였고, 木槿(무궁화)은 목본류(木)에 기록되었다.

- 木槿(목근)에 관한 내용은 중국의 의학서인『본초강목』(1596)을 기초로 내용을 요약했으나, 무궁화속(Hisbiscus) 식물 중에 木槿(무궁화), 扶桑(하와이무궁화) 및 木芙蓉(부용) 3종을 기록하면서 그 중 하와이무궁화, 부용과 달리 무궁화는 국내 토착화된 것으로 보고 그 당시 부르던 명칭 '무궁화'를 한글로 함께 기록하여, 중국 문헌을 참조하되 우리의 현실에 대한 기록도 함께 남겼다.

- 이 내용이 중국 문헌을 차운, 인용,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 가필,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한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방식의 비하와 폄훼적 표현을 통해 차운, 인용,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 가필,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한 것으로 비하 그리고 폄훼하여 우리의 문헌에서 '무궁화'라는 한글 명칭이 뚜렷하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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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東 擯而遠之 則曰九夷曰六部 禮而近之 則曰君子國 禮義邦 小中華 統而言之 則曰朝鮮 三韓 海東 左海 大東 靑丘 鰈域 震檀 槿花鄕

 

우리나라를 배척하여 멀리할 경우에는 구이(九夷)니 육부(六部)니 하고, 예우(禮遇)하여 가까이할 경우에는 군자국(君子國)이니 예의방(禮義邦)이니 소중화(小中華)니 하며, 통틀어 말할 경우에는 조선(朝鮮)ㆍ삼한(三韓)ㆍ해동(海東)ㆍ좌해(左海)ㆍ대동(大東)ㆍ청구(靑丘)ㆍ접역(鰈域)ㆍ진단(震檀)ㆍ근화향(槿花鄕)이라 한다.

 

 

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우리의 옛 유서 중의 하나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규경(1788~1856)이 저술한『오주연문장전산고』(1850년대 중반)에는 우리나라를 일컫는 명칭의 하나로 '무궁화의 나라'를 뜻하는 '槿花鄕'(근화향)을 기록했다.

- 여기 어디에 중국 문헌의 차운, 인용,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 가필, 견강부회식 해석이 있는가?

-『두 얼굴의 무궁화』에 상용 표현으로 나오는 "필자가 오랜 시간 전수분석해 본 결과"라는 언급은 앞서도 그러했듯 "필자의 마음대로 조작과 왜곡한 결과"라는 의미는 아닌가?

 

▶  개인문집이란?

- 개인문집(個人文集)은 개인의 시나 문장을 모아 엮은 책을 말한다. 국가나 단체가 공식적인 편찬사업을 하여 간행된 경우가 아니면 옛 문헌의 대부분은 개인문집에 속한다.

- 그런데『두 얼굴의 무궁화』의 따르면, '한국 7대 대표 사서'에 대비되는 것으로 그보다 못한 것(?)이 되고, "오랜 시간 전수 분석해 본 결과" 언급된 개인문집의 대부분은 중국 문헌의 차운, 인용한 것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에 가필되거나 견강부회식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두 얼굴의 무궁화』에 언급된 개인 문집 중 『한정록』(1618)은 당대에 문체반정을 일으킨 허균(1569~1618)의 저술이고,『고산유고』(1791)는 시조문학으로 이름 높은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작품을 정조의 명에 따라 간행한 것이며,『학봉일고』(1649)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성일(1538~1593)의 저술로 당시 북방의 정세와 임진왜란의 상황을 이해하는 중요 사료이기도 하며 각종  실록에서 뽑아 기록하였으며 『국조보감』과『승정원일기』에도 내용이 반영되었고,『순암선생문집』(1900)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역사학자로『동사강목』(1778)을 집필한 안정복(1712~1791)의 저술이다.

- 이들의 문집이 중국 문헌을 차운, 인용한 것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에 가필되거나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말인가? 이쯤되면 언급된 문헌의 저자들에 명백한 명예훼손이 아닌가?

 

​ <사진3> 김성일,『학봉일고(鶴峯逸稿)』, 1649년 간행[고전종합DB 참조]

 

頃者 五山詠禪房花木 而頗有楚騷遺梅之嘆 故敢綴荒句

 

지난번에 오산*1)이 선방의 꽃나무를 읊었는데, 자못 초소유매지탄(楚騷遺梅之嘆)*2)이 있어서 감히 거친 시구를 이어 짓는다

 

...(중략)...

 

名花百日又無窮(명화백일우무궁)         좋은 꽃 백 일 피고 또다시 무궁하여
脈脈西墻相倚紅(맥맥서장상의홍)         끊임없이 서쪽 담서 붉게 꽃을 피우누나 
客來亦有無邊趣(객래역유무변취)         객이 와서 또한 역시 가없는 흥 있나니
萬化誰探無極翁(만화수탐무궁홍)         만물 중에 그 누가 무극옹을 찾아보나
                    右無窮花(우무궁화)        이상은 무궁화를 읊은 것이다.

百匝禪房知幾枝(백잡선방지기지)         백 겹으로 선방을 둘러 있는 가지 몇이나 되나
更着紫薇相發揮(경착자미상발휘)         배롱나무 꽃도 피니 서로 조화 이루네
無窮花色眞宜晚(무궁화색진의만)         무궁화 꽃 늦게 피어 참으로 좋은데 
淺深先後自芳菲(천심선후자방비)         연하고 진한 꽃이 차례로 향기를 풍기네
                    右百日紅(우백일홍)         이상은 백일홍을 읊은 것이다.

*각주1) 오산(五山) : 김성일의 지인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를 말한다.
*각주2) 초소유매지탄(楚騷遺梅之嘆) : 어떤 사물을 시로 읊지 않은 것을 탄식할 때 사용한다. 중국 초나라 굴원(屈原, B.C.343~ B.C.278)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많은 꽃들을 언급하면서도 매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 위 <사진3>은『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개인문집으로 언급된 조선 중기의 정치가ㆍ학자이고,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그 학문을 이어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던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저술한『학봉일고』(1649)에서 '無窮花'(무궁화)를  노래한 한 부분이다.

-『학봉일고』는 당시 김성일이 기거한 경북 안동의 학봉종택에서 자라는 7종의 식물에 대한 자작시를 싣고 있는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無窮花'(무궁화) 이름을 사용하였고, 중국과 일본과 구별되는 무궁화에 대해 계속해서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이라는 독특한 미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 여기 어디에 중국 문헌의 차운, 인용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에 가필되거나 견강부회식 해석이 있는가? 


 차운(次韻)이란?

- 한시(漢詩)에서 차운이란 남의 시에 화답하면서 운자(韻字)를 그 차례대로 두며 짓는 일을 말한다. 운(韻)이 되는 글자를 맞추어 가며 시의 내용을 지어 가야 하므로 그만큼 사물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지식이 풍부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옛 한시 작법에서 자주 이용되었다.

- 차운한다는 것은 운이 되는 한자음을 같이 쓴다는 것일 뿐 남의 시와 내용을 같이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진4> 안정복, 『순암집(順菴集)』, 간행[한국고전종합DB 자료 참조]

- 사진4에 소개된 한시(漢詩)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역사학자이자 실학자인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지은 2수의 한시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극소수 개인문집의 하나로 인용된『순암집』에 실려 있다. 

- 안정복은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의 문하로  유교 정통적 입장을 계승하여 민족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것에 주된 목표를 두고, 단군ㆍ기자ㆍ삼한을 민족 정통으로 위치시킨『동사강목(東史綱目)』(1778)이라는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 그가 저술한『순암집(順菴集)』(또는 순암선생문집)에는 조선을 '槿花鄕'(근화향, 무궁화동산 또는 무궁화나라)으로 본 한시가 실려 있다.

- 이 시는 스승인 이익이 그의 또 다른 제자인 안낙중에게 한시 1편을 지어 주었는데, 안정복은 스승 이익의 시를 모본으로 차운하여 오언절구 2편의 별도의 한시를 남겼고, 이 3편의 시는 모두『순암집』에 실려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고전종합DB 『순암집』참조.==>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0534A_0010_010_0360

- 이 시를 살피면, 차운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데, 스승 이익이 지은 오언절구의 한시에서 각 문장이 끝나는 方, 揚, 鄕, 庄, 章, 香, 芳,浪, 彰, 翔, 當, 洋, 長, 霜, 徨을 운으로하여 동일한 운을 가진 2편의 한시(좌 및 중)​를 지었다. 이 2편의 시는 스승의 시에서 차운했으므로 운만 일치할 뿐이지 시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 한시의 차운을 마치 중국의 것에 대한 흉내처럼 주장하는 것은 한시에 대한 무지이고 더불어『순암집』을 비롯한 옛문헌에 대한 왜곡이며 나아가 비하 그리고 폄훼가 아닌가?

《결론》 옛 문헌에 대한 비하와 폄훼 그리고

 

▶『두 얼굴의 무궁화』가 '정사' 및 '한국 7대 대표 사서' 운운하는 이유는?

 

-『두 얼굴의 무궁화』는 국가가 주도하여 편찬한 각종 문헌에 무궁화 관련 기록이 있다는 것을 왜곡한다.

- '정사'와 '한국 7대 대표 사서' 운운하면서 다른 문헌에는 무궁화 관련 기록이 없거나 있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왜곡한다.

- 옛문헌을 인용하면서 주요 의학서와 역사서 등은 인용에서 빼버림으로써 무궁화 관련 기록이 존재하는 문헌이 소수인 것처럼 또 다시 왜곡한다.

- 그리고 이렇게 왜곡하여 소수화시킨 문헌에 대해서는 중국 문헌의 차운, 인용한 것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에 가필되거나 견강부회식 해석이라고 비하하고 폄훼한다.

- 그리고 스스로 "오랜 시간 전수분석해 본 결과"라고 우긴다.

 

▶ 그리고 식민사관

 

 - 우리의 옛문헌들은 중국의 경전이나 문헌을 우리의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인용하고 참고하되,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발전시켜 온 것들이 다수 있다.

- 일제가 우리에게 퍼트린 식민사관 중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외세에 의존하여 우리의 주체성과 독자성은 없다고 보는 타율성론이 있다.

​- 우리 문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그것에 있는 독자성과 고유성을 찾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싸잡아 중국 문헌의 차운, 인용한 것 또는 의도적 오역, 위변조, 상호표절, 후대에 가필되거나 견강부회식 해석하고 한다면, 이것은 일제가 심은 타율성론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식민사관 그 자체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