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판관삼익당부군묘지(判官三益堂府君墓誌) - 임영혁(林永赫)

林 山 2021. 4. 2. 23:25

公諱用潤字潤之號三益堂姓林氏貫長興始祖蓮堂學士諱蘊至中祖翰林學士諡忠節諱八及之后也. 屢傳後有諱世殷侍中平章事封長興君諱蕡司馬文科典翰侍中平章事諡忠靖號晩翠亭諱頤侍中平章事冠山伯諡忠毅諱得荑工曹判書號湖隱諱雨所文牧師號芝峰仍居尙州池洞於公五代祖高祖諱重敬大護軍號慕齋曾祖諱貴枝文縣監號三松亭移居于醴泉栗峴肇基之祖也. 祖諱長春承仕郞厚陵叅奉考諱德元將仕郞行司僕寺判官妣恭人星州李氏護軍世俊之女羅菴文興孫. 公之兄弟凡七人而公其第二官奉直郞行司僕寺判官稟賊惇確器局宏深學透高明胸懷淸澹百行操義世稱三益堂自襄陽移居于安東甘泉之浦洞. 配宜人昌原黃氏士純之女生二男一女. 長擎國宣務郞司憲府監察壬亂忘憂堂郭再祐亞將號栗里. 公之父勇力振世與忘憂堂同倡義載在功臣錄. 次成國宣務郞尙衣院別坐女張重胤. 擎國一男四女男桂女金義達李直道金善鳴金德祐. 成國四男一女長檥承訓郞義禁府都事號栗齋. 次柢出系從叔時發之后. 次榗次桓女高是華. 桂一男挺立. 檥五男二女長應久贈掌樂院次胤久次崇久次養久次實久女朴明元權惋. 榗二男二女長碩久次昌久女任氵+敬張萬甲. 桓一男承久. 餘未錄. 墓所在地竹嶺南下窟巖山子坐之原. 嗚呼! 先世未遑之事今玆殘孫合謀竝力式薦微誠只以小石始竪略敍萬一云爾.

 

丙辰正月上元 不肖后孫 永赫 謹識

 

공(公)의 휘(諱)는 용윤(用潤), 자(字)는 윤지(潤之), 호(號)는 삼익당(三益堂), 성(姓)은 임씨(林氏), 관(貫)은 장흥(長興)인데, 시조(始祖) 연당학사(蓮堂學士) 휘 온(蘊, 주1)분으로부터 중조(中祖) 한림학사(翰林學士) 시(諡) 충절(忠節), 휘 팔급(八及, 주2)분의 후손이시다. 

 

여러 대 후에 팔급조의 후손이신 휘 세은(世殷)조는 시중(侍中, 주3) 평장사(平章事, 주4)를 지냈고,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졌다. 휘 분(蕡)조는 사마시(司馬試, 주5)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전한(典翰, 홍문관의 종3품 관원)에 이어 시중, 평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 호는 만취정(晩翠亭)이시다. 휘 이(頤)조는 시중, 평장사를 지내고, 관산백(冠山伯, 관산은 장흥의 옛지명)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시다.

 

휘 득이(得荑)조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으며, 호는 호은(湖隱)이시다. 휘 우소(雨所)조는 목사(牧師, 정3품)를 지냈고, 호는 지봉(芝峰)이며, 상주(尙州) 지동(池洞, 못골)에 오래 살았으니 공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고조(高祖) 휘 중경(重敬)분은 대호군(大護軍, 주6)을 지냈고, 호는 모재(慕齋)이시다. 증조(曾祖) 휘 귀지(貴枝)분은 현감(縣監, 종6품)을 지냈고, 호는 삼송정(三松亭)이며, 예천(醴泉) 율현(栗峴, 밤고개)으로 이주하였으니, 이곳에 터전을 닦은 조상이시다. 조(祖) 휘 장춘(長春)분은 승사랑(承仕郞, 주7)으로 후릉참봉(厚陵叅奉)을 지내셨다.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 휘 덕원(德元)분은 장사랑(將仕郞, 종9품)으로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종5품)을 지냈으며, 비(妣, 돌아가신 어머니) 공인(恭人, 주8) 성주이씨(星州李氏)는 호군(護軍, 정4품 무관직) 세준(世俊)분의 따님,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정3품) 나암(羅菴) 문흥(文興)분의 손녀이시다.

 

공의 형제는 모두 7분인데, 공은 둘째이시다. 공은 봉직랑(奉直郞, 종5품) 사복시판관을 지냈는데,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났으나 성품이 순수하고 선량하셨으며, 그릇도 크고 학문도 깊으셨다. 생각과 행실 또한 매우 고상하셨다. 천성이 청담(淸澹)하고 모든 행동이 도의에 맞아 세상에서 삼익당(三益堂)이라 일컬어졌다. 공은 양양(襄陽, 예천의 옛이름)에서 안동(安東) 감천(甘泉)의 포동(浦洞, 갯골)으로 이주하셨다. 배위(配位) 의인(宜人, 주9) 창원황씨(昌原黃氏)는 선비(士) 순(純)분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셨다. 

 

장남 경국(擎國)분은 선무랑(宣務郞, 종6품)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6품)을 지냈고.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의병장의 아장(亞將, 副將)으로 활약했으며, 호는 율리(栗里)이시다. 공의 부자(父子)분은 모두 용기와 힘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망우당과 함께 창의(倡義)했다는 사실이 공신록(功臣錄)에 실려 있다. 차남 성국(成國)분은 선무랑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 정5품)를 지냈고, 사위는 장중윤(張重胤)분이다.

 

경국(擎國)분은 1남4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계(桂)분, 따님들은 각각 김의달(金義達)분, 이직도(李直道)분, 김선명(金善鳴)분, 김덕우(金德祐)분에게 출가하셨다. 성국(成國)분은 4남1녀를 두셨는데, 장남 의(檥)분은 승훈랑(承訓郞, 주10)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으며, 호는 율재(栗齋)이시다. 차남 저(柢)분은 종숙(從叔, 아버지의 4촌 형제) 시발(時發)분에게 양자로 가셨다. 3남은 진(榗)분, 4남은 환(桓)분이고, 따님은 고시화(高是華)분에게 출가하셨다.

 

계(桂)분은 1남 정립(挺立)분을 두셨다. 의(檥)분은 5남2녀를 두셨는데, 장남 응구(應久)분은 장악원(掌樂院)이 추증(追贈)되었으며, 차남은 윤구(胤久)분, 3남은 숭구(崇久)분, 4남은 양구(養久)분, 5남은 실구(實久)분이시고, 따님은 각각 박명원(朴明元)분, 권완(權惋)분에게 출가하셨다. 진(榗)분은 2남2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석구(碩久)분, 차남은 창구(昌久)분이시고, 따님은 각각 임별(任氵+敬)분, 장만갑(張萬甲)분에게 출가하셨다. 환(桓)분은 1남 승구(承久)분을 두셨다.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의 묘소는 죽령(竹嶺)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굴암산(窟巖山) 자좌(子坐, 정남향)에 자리잡고 있다. 오호라! 선대에 하지 못한 공에 대한 사적(史蹟) 일부를 지금 남아 있는 후손들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안치(安置)한 작은 비석에 간략하게나마 적는다. 

 

병진(丙辰) 정월(正月) 상원(上元, 음력 정월 보름) 불초후손(不肖后孫) 영혁(永赫) 삼가 짓다(謹識)

 

주1) 린윈(林蘊, 임온) 조는 푸젠성(福建省) 푸톈(莆田) 사람으로 자는 푸멍(復夢)이다. 탕(唐)나라 때의 관리로 린짜오(林藻)의 아우이다. 츠싀(刺史) 린피(林披)의 여섯째 아들로 벼슬은 리부위안와이랑(禮部員外郎), 샤오저우츠싀(邵州刺史), 지셴뎬수위안샤오리(集賢殿書院校理), 쓰촨지에두투이관(西川節度推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시집 1권이 있다.

 

주2) 린빠지(林八及, 임팔급) 조는 린윈(林蘊) 조의 후손이다. 린빠지 조는 탕조(唐朝)에서 한린쉬에싀(翰林學士, 한림학사), 빙부싀랑(兵部侍郞, 병부시랑)을 지냈다. 간신배의 모함과 참소(讒訴)를 당한 린빠지 조는 쉬에렌징(薛仁敬), 쉬쭝(許重), 숭쿠이(宋奎), 쿠이후(崔冱), 리우취안(劉筌), 취안즈치(權之奇), 콩더푸(孔德符) 등 7학사와 함께 푸젠성 취안저우시(泉州市) 후이안현(惠安縣) 둥링진(東嶺鎭) 펑청촌(彭城村)을 출발하여 황해(黃海)를 건너와 팽성(彭城) 용주방(龍珠坊) 또는 용포리(龍浦里)에 도착 세거(世居)했다. 용주방 또는 용포리는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평택시(平澤市) 퍙성읍(彭城邑) 안정리 산 21-2번지이다. 신라(新羅) 왕실에서는 린빠지 조에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제수하였다. 마침 그때 적병이 변방을 침공함에 공께서 분연히 토벌해서 충절(忠節)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배위(配位) 복주김씨(福州金氏)는 시어사(侍御史) 윤복(允福)의 따님이다. 린빠지 조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諡號) 충절공(忠節公), 팽성군(彭城君)을 내려 주었다. 린빠지 조는 한국(韓國) 임씨(林氏)의 도시조가 되었다. 묘는 평택 용주방 운암동(雲巖洞) 유좌(酉坐), 혹은 묘향산(妙香山) 운암동의 유좌에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주3) 시중(侍中)은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최고 관직이다. 종1품 재상직의 통칭이며, 고려 후기에는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이라고도 하였다. 평장사(平章事)는 고려 문종 때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문하평장사, 중서평장사가 있었으며, 정원은 각 1인이었다. 품계는 모두 정2품이었다.

 

주4) 평장사(平章事)는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한 정2품의 관직이다. 평장사는 성종 때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가 있었다. 문종 때는 중서문하성에 문하시랑평장사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문하평장사, 중서평장사가 각각 1명씩 있었는데, 품계는 모두 정2품이었다.

 

주5) 사마시(司馬試)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하여 부른 것이다. 소과(小科)라고도 하였다. 사마시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식년시와 국가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축하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증광시로 구분되었다. 식년 사마시와 증광 사마시는 시행 시기만 다를 뿐 시험의 절차와 내용은 같았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항상 같이 시행하였는데 시험 절차는 같고 시험 과목이 달랐다.

 

주6)  대호군(大護軍)은 조선시대 무관직의 하나이다. 건국초에는 10위의 부지휘관으로 대장군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곧 도위첨사로 개칭되었다가 태종초에 이르러 대호군으로 되었다. 문종~세조 연간에 10위는 5위체제로 확립되었는데, 대호군은 5위의 부지휘관으로 계속 존재했다. 품계는 종3품이고, 정원은 14명이었다. 

 

주7) 승사랑(承仕郎)은 조선시대 종8품 문신의 품계명이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가 제정될 때 정하여져 그뒤'경국대전'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종8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봉사, 전곡, 별검, 기사관, 부사용, 수문장 등이 있다.

 

주8) 공인(恭人)은 정5품과 종5품 문무관의 적처(嫡妻)에게 내리던 외명부(外命婦)의 작호(爵號)이다. 1396년(태조 5)에는 4품 문무관의 정처에게 내리는 작호였으나, '경국대전' 이후 5품의 아내에게 봉작되었다.

 

주9) 의인(宜人)은 조선시대 외명부 중 문무관의 처에게 내린 정6품과 종6품 작호(爵號)다. 문무관 정6품인 승의랑(承議郎), 승훈랑(承訓郎)·, 돈용교위(敦勇校尉)·, 진용교위(進勇校尉)와 종6품인 선교랑(宣敎郎), 선무랑(宣務郎), 여절교위(勵節校尉),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오른 관리의 적처에게 내린 작호이다. 의인은 조선 초기 태조 때에는 문무관 5품의 적처에게 봉하여졌다. 이것이 '경국대전'에는 한 품계가 낮은 정6품과 종6품의 적처에게 봉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주10) 승훈랑(承訓郎)은 조선시대 정6품 하계(下階) 문신의 품계명이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文散階)가 제정될 때 정6품 상계는 승의랑(承義郞), 하계는 승훈랑으로 정하여졌다. 정6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좌랑, 감찰, 사평(司評), 정언(正言), 검토관(檢討官), 수찬(修撰), 전적(典籍), 기사관, 교검(校檢), 별제(別提), 사서(司書), 익찬(翊贊), 사회(司誨), 사과(司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