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맞아 2016 무주산골영화제 출품작인 이란의 레자 미르카리미(Reza Mirkarimi) 감독, 파비스 파라스투이(Parviz Parastui)와 소헤일라 고레스타니(Soheila Golestani) 주연 영화 '하루(Emrouz, Today, 2014)'가 케이블 TV 전파를 탔다. '하루'는 출산이 임박한 한 젊은 여성 세디게(소헤일라 고레스타니 분)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오해를 사면서까지 도와주는 테헤란의 택시 운전사(파비스 파라스투이 분)의 휴머니즘을 그린 영화다.
미르카리미 감독은 '하루'에서 인간애와 인간성 회복이라는 휴머니즘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휴머니즘이라는 주제 이면에는 감독이 이란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인권 상황을 나직한 소리로 고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하루'는 하루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에도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운 영화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고대도시이면서도 자동차가 넘쳐나는 분주하고 삭막한 도시다. 테헤란의 택시 운전사 유네스는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말도 거의 없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그는 대사도 별로 없다. 하지만 유네스는 인정이 매우 많은 사람이다.
어느 날 유네스가 일을 마치고 택시 안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출산이 임박한 젊은 세디게가 허둥지둥 택시에 올라탄다. 그녀는 누군가에 쫓기듯 불안해 보인다. 배는 산처럼 불러 있고, 얼굴에는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한 듯 상처가 나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유네스는 세디게를 내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네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세디게의 상황이 절박한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유네스가 출발하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문을 잠그자 세디게는 화들짝 놀라면서 문을 잠그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택시가 과속방지턱에 걸려 덜컹거려도 세디게는 깜짝 놀라곤 한다. 복부나 가슴 부위에 통증이 있는 듯 연신 손을 갖다대면서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자신이 가야 할 병원 이름도 정확하게 모르는 세디게는 몸도 마음도 몹시 힘들어 보인다.
세디게가 목적지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유네스는 인내심을 갖고 이리저리 헤맨 끝에 마침내 병원을 찾아 데려다준다. 세디게를 도와주기로 했던 병원 직원은 이미 퇴직한 뒤였다. 아기가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세디게는 염치불고하고 처음 만난 유네스에게 자신과 함께 병원에 들어가서 가족인 척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왜냐하면 이란에서는 혼외임신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 혼자 병원에 가서 아기를 낳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세디게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또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출산이 임박했음에도 병원에도 갈 수 없는 현재의 처지만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녀가 혼외임신을 했고, 남자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심한 폭행까지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기서 이란의 인권, 특히 여성이 처한 열악한 인권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 팔라비 왕조 때는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이란 여성들의 참정권, 교육권, 사회 진출 등이 활발했다. 그러나,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성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가 되었다. 우선 여성은 히잡을 써야 한다. SNS상에서 여성이 히잡을 벗은 사진을 올리면 처벌을 받는다. 이란 여성들은 스포츠 경기 관람도 할 수 없다.
특히 이란에서 이슬람 신앙생활을 관장하는 도덕경찰은 여성에 대한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높다. 여성이 음악에 맞춰 춤추는 동영상을 올렸다고 태형을 가한다. 여성이 화장을 진하게 했다는 이유, 복장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단속하고 매질까지 한다. 2015년 9월 이란 사법 당국은 이성과 악수했다는 이유로 남녀에게 각각 99대의 채찍질을 선고하기도 했다. 2015년 3월 이란 의회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피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여성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이 법안은 여성을 애낳는 기계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처음 보는 여자에게 황당한 부탁을 받고 이를 들어줄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네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세디게가 원하는 대로 병원에 함께 들어가서 보호자 역할까지 맡아준다. 이란에서 임산부의 보호자로 병원에 함께 간다는 것은 주변의 오해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유네스는 이를 무릅쓰고 세디게를 도와준다.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들은 유네스를 세디게의 늙은 남편쯤으로 알았다. 그런데 세디게의 갈비뼈가 부러져 있고, 태반도 분리돼 있어 아기는 물론 산모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의사와 간호사들은 가녀린 세디게를 무자비하게 폭행한 사람이 바로 유네스라고 단정한다. 병원 직원들의 시선은 차갑고 경멸적으로 변한다. 경비원은 유네스가 보던 텔레비젼을 꺼버리고, 다른 직원은 그에게 주먹질까지 한다.
병원 직원들의 냉대와 멸시에도 유네스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유네스가 사람들의 오해와 냉대를 감수한 것은 오로지 세디게를 위해서였다. 나아가 세디게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아기의 생명을 그 또한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세디게는 아기를 낳고 숨을 거두기 전 유네스를 만난다. 그녀는 유네스에게 자신은 그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태어났는데, 아기도 자신과 같은 운명이라고 한탄한다. 세디게가 죽고 나면 아기는 고아원에서 자라게 될 것이고, 아기가 자신의 불쌍한 운명을 고스란히 되밟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유네스는 세디게가 아기를 낳고 죽자 새벽에 아기를 훔쳐서 병원을 나온다. 천애고아로 태어난 아기를 엄마 세디게와 같은 운명에서 구해주기 위해서다. 아기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택시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유네스의 모습에서 진한 휴머니즘의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과연 유네스 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미르카리미 감독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세디게는 열악한 인권 상황에 처한 이란 여성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유네스는 앞으로 이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이란의 미래는 유네스 같은 관용과 자비심이 넘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독은 유네스를 통해서 부당한 차별에 신음하는 이란 여성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2021. 9. 20. 林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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