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EBS 국제다큐영화제(EBS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 2022, EIDF 2022] 출품작 가운데 '가자에 띄운 편지'는 유난히 관심을 끄는 영화였다. 원제는 '에라스뮈스 인 가자(Erasmus in Gaza)'다. 에라스뮈스는 유럽연합(EU)에 속한 나라들 사이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다. 영화 제목을 직역하자면 '가자의 교환학생' 정도가 되겠다.
키아라 아베사니(Chiara Avesani)와 마테오 델보(Matteo Delbò)가 2021년에 공동으로 감독한 에스빠냐 영화 '가자에 띄운 편지'의 러닝 타임은 1시간 28분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다큐 영화 'Erasmus in Gaza'는 프랑스 작가 발레리 제나티(Valérie Zenatti)의 소설 '가자에 띄운 편지(Une bouteille dans la mer de Gaza)'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나티의 소설 'Une bouteille dans la mer de Gaza'는 이스라엘 소녀 탈과 팔레스타인 청년 나임이 희망을 담은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키이라 아베사니는 로스쿨 졸업 후 국제 기업 로펌에서 근무하다가 저널리즘으로 전향한 다소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녀는 이탈리아 국영 TV RAI(RAI Italian National Public TV)에서 'Report'와 같은 조사 프로그램과 환경에 대한 보도를 위해 수년 동안 일했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로서 그녀는 외교 정책 프로그램인 '컴퍼스(Compass)'와 '어메리카 투나잇(America Tonight)'을 위해 알 자지라 미국(Al Jazeera America)과도 공동 작업을 하면서 이주민 탈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또, 스카이 뉴스(Sky News)를 위해 이라크 모술에서 보도하기도 했다. 2016년 키아라는 영화 제작자 마테오 델보와 협력하여 이라크 시민 사회의 재건 노력에 대한 웹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평화의 전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이야기가 '가디어(Ghadeer)'다.
마테오 델보는 영화 제작자이자 촬영 감독이다. 델보는 로마의 스쿠올라 나치오날레 디 시네마(Scuola Nazionale di Cinema)를 졸업하고 다비드 디 도나텔로 어워드(David di Donatello Award) 단편 영화 부문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부가 있는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의 생방송으로 지중해의 이주민 구조 활동을 취재했다. 그는 모술의 알 자지라와 스카이 뉴스의 영화 제작자였다. 모술에서 델보는 아베사니와 만나 의기투합해서 'Ghadeer'를 감독했다.
감독은 유럽연합국들 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인 에라스뮈스(Erasmus)를 신청한 이탈리아 의대 졸업반인 리카르도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리카르도가 교환학생으로 가는 목적지는 바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터 한복판인 가자 지구다.
가자 지구는 교환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다. 테러에 대한 보복 명분으로 이스라엘 쪽에서 날아오는 미사일과 로켓포 파편에 맞아 언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르도의 가자행 결정에 친구들은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가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군의관을 꿈꾸며 동시에 폭발탄 총상에 관한 졸업 논문을 쓰는 리카르도에게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거의 매일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자 지구에서의 교환학생 체험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자 지구는 입국조차 쉽지 않다. 이스라엘 군부, 팔레스타인 당국, 그리고 하마스 등 세 기관의 허가를 얻은 후에야 가자 지구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세 기관 중 단 한 기관이라도 거부하면 가자 지구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팔레스타인인이 출국하는 것은 외국인 입출국보다 훨씬 더 어렵다. 외국의 비자를 받아놓고도 출국 허가를 받지 못해 주저앉아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자 지구 이슬람대학에 도착한 리카르도는 총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의 환영을 받고, 현지 언론뿐만 아니라 국제 언론의 인터뷰 세례를 받는다. 그가 가자 지구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인 교환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리카르도는 에라스뮈스 프로그램의 성패가 그 자신의 어깨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큰 부담을 느낀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의대와 이슬람대학 의대의 커리큘럼 차이로 리카르도는 개강 첫날부터 허둥지둥댄다. 이탈리아 의대에서 주로 이론을 주로 배운 리카르도는 이슬람대학 의대의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실기 위주의 커리큘럼을 접하고 당황한다. 하지만 교수들과 동료 학생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점차 적응해 나간다.
리카르도가 가자 지구에서 처음 머물렀던 집은 젊은 변호사의 집이었다. 두 사람은 곧 가까워져서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젊은 변호사는 프랑스(?)로부터 비자를 받았음에도 출국 허가를 받지 못해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리카르도는 가자 지구 전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갇혀 사는 게토(ghetto)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리카르도는 이스라엘군이 발사한 미사일이 가자 지구로 날아와 폭발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전쟁의 공포감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다. 또, 어떤 날에는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던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총에 맞아 다리가 절단되는 등 중상을 입고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는 장면도 목격한다.
리카르도는 젊은 변호사의 집을 떠나 또래 형제들이 3명이나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얼마 뒤 밤중에 이스라엘로부터 로켓포가 날아온다. 리카르도는 주인집 형제들과 함께 지하실로 대피한다. 로켓 폭발 충격에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흔들리고 먼지가 자욱하게 흩날린다. 전쟁 상황에서도 평온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 주인집 3형제를 바라보면서 리카르도도 불안과 공포심을 점차 극복해 나간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리카르도는 교수들의 도움으로 총상을 입은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직접 치료하기도 한다. 며칠 뒤 이스라엘 쪽에서 대규모 공격을 예고하는 로켓이 불길한 불꼬리를 내뿜으며 가자 지구의 저녁 하늘을 낮게 날아간다. 리카르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피해 잠시 예루살렘으로 대피했다가 돌아온다,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가자 지구를 넘나드는 긴박한 상황을 겪으면서 리카르도는 인간적으로 한층 더 성숙하게 된다. 가자 지구에서 교환학생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리카르도는 의대를 졸업하고 외과의가 된다.
영화는 여기서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리카르도와 가자 지구에서 인연을 맺었던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자막으로 보여 준다. 키아라 아베사니와 마테오 델보 감독은 이탈리아 교환학생의 눈을 통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전쟁 상황에 놓여 있는 팔레스타인 게토를 가감없이 목격하고 체험하게 한다.
이 다큐 영화를 본 관객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도 바로 이것이리라. 별 5개를 아낌없이 주고 싶은 다큐 영화다.
2022. 8. 29. 林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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