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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2] 쿠르드족의 5월 13일(13th of May) - 이라크 쿠르드족 학살의 역사

林 山 2022. 9. 5. 20:51

리크 토피크(Tariq Tofiq) 감독의 '쿠르드족의 5월 13일'은 이라크 바트당(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이라크 지부)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자행한 남쿠르디스탄 쿠르드족 학살 사건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터키 동남부를 북쿠르디스탄, 이라크 북부를 남쿠르디스탄이라고도 한다. 원제는 '13th of May'(서틴스 오브 메이), 러닝 타임은 24분이다.  

 

타리크 토피크(Tariq Tofiq) 감독

다큐 영화 '쿠르드족의 5월 13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쿠르드족의 기원과 역사, 독립 투쟁, 이란-이라크 전쟁, 이라크 전쟁 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쿠르드족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쿠르드족(Kurd) 비운의 역사 - 영국과 미국, 러시아의 배신', '쿠르드족(Kurd) 비운의 역사 - 쿠르디스탄의 독립 가능성', '쿠르드족(Kurd) 비운의 역사 - 이라크의 쿠르드족'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쿠르드족이 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쿠르디스탄(Kurdîstan)은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 반도 동남부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이 접경을 이루는 산악지대이다. 면적은 약 30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쿠르디스탄은 쿠르드족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튀르키예에 약 1,500만 명, 이란에 약 800만 명, 이라크에 약 600만 명, 시리아에 약 2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중동 외에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쿠르드족도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바트당 후세인 정권의 할라브자 학살을 증언하는 희생자 유족

튀르키예의 쿠르드족은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을 중심으로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쿠르드족의 언어 사용을 불법화하고, 고유 의상 착용도 금지하는 등 쿠르드족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는 정책을 쓰고 있다. PKK의 무장 투쟁으로 튀르키예에서는 지금도 매달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란령에도 쿠르디스탄 지역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이란령 쿠르디스탄 쿠르드족은 소련의 지원 이래 마하바드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지만, 소련군이 철수하자 이란은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는 자치주의 성격을 지닌 지역이다. 이란은 자국 내 쿠르드족들을 탄압하는 한편 1980년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 편에서 군인으로 활약하던 이라크 쿠르드인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1985년 5월 13일에 일어난 이라크 할라브자(Halabja) 쿠르드족의 봉기

시리아 거주 쿠르드족은 2013년에 시리아 북부에 로자바라는 미승인 국가를 설립했다. 정식 명칭은 북동시리아 자치 행정부다. 북동시리아 자치 행정부는 아프린, 자지라, 유프라테스, 락까, 알타브카, 만비즈, 데이르에조르 등을 주로 두고 있다. 로자바의 공식 군대는 시리아 민주군이다. 로자바는 카탈루냐 의회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를 비롯한 어떤 나라도 로자바를 자치정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집권 기간 동안 쿠르드족의 독립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1980년 9월 22일 후세인은 이란 혁명정권의 타도와 샤트알아랍 강 획득을 명분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전쟁을 지속해 약 백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 내 쿠르드족은 독립 투쟁의 일환으로 이란 편에 서서 이라크군과 싸웠다.

 

바트당 후세인 정권의 할라브자 학살을 증언하는 희생자 유족

이란-이라크 전쟁 중인 1985년 5월 13일 쿠르드족은 이라크 할라브자(Halabja) 지역에서 바트당 사담 후세인 정권의 탄압을 규탄하고 독립 국가 수립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첫 불꽃은 카니아슈칸에서 시작되었다. 쿠르드족은 '페슈메가르(Peshmerga)여 영원하라!', '후세인 정부는 우리를 파괴할 수 없다!', '후세인 정권 물라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할라브자의 쿠르드족 주민들은 후세인 정권을 72시간 동안 도시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외부 세계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서방 강대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은 할라브자 쿠르드족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결국 많은 쿠르드족이 후세인 정권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거나 심지어 산 채로 묻혔다. 타리크 토피크 감독은 할라브자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희생자 유족의 증언을 통해서 바트당과 후세인 정권의 잔혹한 대량학살과 인권 탄압을 고발한다. 

 

쿠르디스탄 지도

 할라브자는 이라크 북부의 도시로 할라브자 주의 주도이다. 바그다드에서 북동쪽으로 약 240km, 술라이마니야에서 동남쪽으로 50km, 이란 국경에서 약 14km 떨어져 있다. 삼면이 높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 할라브자는 아르빌, 술라이마니야, 다후크와 함께 이라크 쿠르디스탄 4대 주도 중 하나로 인구는 25만명이다. 할라브자는 19세기 후반 쿠르드 자프 부족의 수도로 세워졌다. 이라크의 아랍 지역과 차로 최소 4시간이 걸리는 상당히 고립된 도시다.

 

한편, 이란-이라크 전쟁 말엽인 1988년 3월 이라크군이 화학무기를 투하해 할라브자 주민 5천여 명을 대량학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사담 후세인의 아들 알리(별명 케미컬 알리)는 학살의 주범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알리는 후퇴한 이란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쿠르디스탄 국기

할라브자 화학무기 대량학살 사건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자행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선임 정책 분석가로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상황을 주시했던 스티븐 펠레티어(Stephen Pelletier)는 자신의 저서 '이라크와 국제 석유 시스템: 왜 미국은 걸프전을 감행했나(Iraq and the International System: Why Went to War in th Gulf, 2001)'에서 후세인 정권에 의한 화학무기 대량학살설을 부인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군과 이란군은 모두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라브자의 실제 사망자는 수백여 명이었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이란이 사용한 화학무기에 의해 희생됐다는 것이다.

 

1988년 3월 16일 이란군은 쿠르드 반군의 안내를 받아 쿠르드족 거주지인 할라브자를 기습 공격했다. 기습 공격에 당황한 이라크군은 화학무기로 대응했고, 이에 대해 이란군도 화학무기로 맞대응했다. 이라크군은 인구가 이라크의 3배인 이란의 인해전술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당시에는 화학무기 금지조약이 없었다. 

 

쿠르디스탄 문장

 할라브자 전투에서 이라크군이 사용한 화학무기는 겨자가스였고, 이란군은 시안계통(청산가리)의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전투 현장을 조사했던 기자와 의료 요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 대부분의 주검은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이란군이 사용한 시안계통 화학무기에 의한 중독 증상으로 밝혀졌다. 할라브자 전투에서 이란과 이라크 양측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1990년 5월 3일 미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국제시민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와 '미들 이스트 워치'가 실제로 확인한 화학무기 희생자는 15명이었다고 한다. '5천명 대량학살설'은 대단히 과장된 수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인이 할라브자 학살의 주범인 양 세계에 알려진 것은 이라크의 중동 지역 패권을 막기 위한 미 정부와 의회, 언론의 조직적인 언론 플레이 때문이었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던 1988년 9월 당시 미 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회담을 하겠다며 이라크 외무차관을 워싱턴에 불러놓고는 TV 회견을 통해 이란의 화학무기 사용은 전혀 언급하지도 않은 채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미 상원은 한술 더 떠 의회 보좌관 2명을 이라크 현지로 보내 후세인의 화학무기 사용으로 쿠르드족 10만 명이 사망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에 들어갔다. 미 언론들은 미 상원의 조사 결과를 그대로 받아 적은 뒤 이를 전파하는 나팔수 노릇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후세인 할라브자 화학무기 대량학살설'이 국제 사회에서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미국의 조작으로 화학무기 학살의 주범이 이란에서 후세인으로 뒤바뀐 것이다. 

 

쿠르드족이 주민의 대부분인 이라크 할라브자 전경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이 시작되자 쿠르드족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었다.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군사 조직(일명 쿠르드 민병대)인 페슈메르가는 미군을 도와 사담 후세인을 생포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2004년 페슈메르가는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의 연락책 하산 굴을 생포했다. 하산 굴로부터 얻어낸 정보로 미국 네이비 실이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내 사살한 넵튠 스피어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페슈메르가는 미국 편에서 싸워 사담 후세인을 물리치고 이라크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북부 유전 지대에는 쿠르드족 자치구가 수립되었으며, 이후 완전한 독립 국가 수립을 시도하고 있다. 쿠르드족 출신 잘랄 탈라바니는 이라크의 대통령이 되었다. 

 

독일은 2014년 9월말까지 페슈메르가에 상당한 양의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2015년 11월 이라크 내전에서 페슈메르가는 이슬람 국가(IS)가 점령한 신자르 주를 탈환하였다. 페슈메르가에 대한 쿠르드족의 지지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의 쿠르드족 학살 희생자 묘역을 순찰하는 미군

할라브자 학살의 비극은 이란-이라크 전쟁의 와중에서 이라크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쿠르드족의 봉기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타리크 토피크 감독은 1988년의 할라브자 쿠르드족 학살 사건을 화면을 통해서 전 세계인들에게 고발한다. 

 

쿠르드족의 비극은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한국인들은 원나라의 속국을 거쳐 제국주의 일본에게 36년 동안이나 국권을 빼앗겨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비록 자력은 아니었지만 독립 국가를 수립했다. 한국도 해방 공간과 6.25 전쟁 과정에서 민간인 대량학살의 비극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는 달리 3,800만 명의 쿠르드족은 아직도 독립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쿠르드족이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날이 하루속히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EIDF가 아니면 한국에서 '쿠르드족의 5월 13일(13th of May)'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접하기가 어렵다. 이런 영화 한 편만으로도 EIDF는 다른 프로그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 가치가 있다. 

 

<참고>

1. 쿠르드족(Kurd) 비운의 역사 - 영국과 미국, 러시아의 배신 https://blog.naver.com/leemsan/221708120452 

2. 쿠르드족(Kurd) 비운의 역사 - 쿠르디스탄의 독립 가능성 https://blog.naver.com/leemsan/221714485752

3. 쿠르드족(Kurd) 비운의 역사 - 이라크의 쿠르드족 https://blog.naver.com/leemsan/221710246753

 

2022. 9. 5.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