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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2] 자화상(Self Portrait) - 거식증 환자의 삶을 위한 투쟁

林 山 2022. 9. 11. 23:01

'자화상(Selvportrett, Self Portrait)'은 거식증으로 요절한 사진 작가 레네 마리 포센(Lene Marie Fossen, 1986~2019)의 삶을 위한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2020년 노르웨이의 마그레트 올린(Margreth Olin)과 카챠 회그셋(Katja Høgset)이 공동으로 감독했다. 러닝 타임은 78분이다. IMDb 크레딧에는 영화 작가 에스펜 월린(Espen Wallin)도 감독으로 올라가 있다. 

 

마그레트 올린
카챠 회그셋

 

에스펜 월린

마그레트 올린은 노르웨의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영화 제작자이다. 올린의 대표작에는 'Engelen'(천사들, 2009), 'De Andre'(데 안드레, 2012), 'Selvportrett'(자화상, 2020) 등이 있다. 올린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수많은 국내외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카챠 회그셋은 노르웨이의 영화 감독이다. 회그셋의 대표작에는 마그레트 올린과 공동으로 감독한 'Selvportrett'를 비롯해서 'Fengslet og forlatt'(2018) 등이 있다. 에스펜 월린은 노르웨이의 영화 작가로 마그레트 올린, 카챠 회그셋과 공동으로 'Selvportrett'를 감독했으며, 그의 대표작에는 'Lene Marie oder Das wahre Gesicht der Anorexie'(2020) 등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움푹 파인 눈매. 앙상하게 뻐드러진 치아, 비쩍 말라서 뼈가 드러난 팔과 다리,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늑골 등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노르웨이 출신의 사진작가 레네 마리 포센이 너무나도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살아있는 미이라'라고나 할까! 그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리스 키오스 섬에서 촬영 작업을 하는  레네 마리 포센

레네가 '살아있는 미이라'가 된 것은 거식증(拒食症) 때문이다. 거식증을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이라고도 하는데, 음식을 조절할 수 없는 식사장애 중 하나다. 살이 찌는 것에 대한 강한 두려움으로 인해 먹는 것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고, 정신질환 또는 다른 질병으로 극단적으로 식욕을 잃거나 음식을 거부하는 병적 증상이다. 

 

거식증은 젊은 유럽 여성들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 중 하나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항상 자신을 싫어했던 레네는 어린 나이에도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려워 영원히 어린이로 남고 싶었던 레네는 열 살이 되던 해 봄부터 음식을 조금씩 줄이다가 어느 날부터 식사를 전면 중단한다. 먹는 것을 중단하자 마음 속의 불안과 슬픔, 고통도 점차 사라진다. 레네의 거식증은 그렇게 시작됐다.

 

레네는 심각한 거식증을 평생 동안 앓아오면서 몇 번이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레네의 부모 게이르 포센(Geir Fossen)과 토릴 포센(Torill Fossen)은 딸의 거식증을 고쳐 주기 아동 병동에 일곱 번이나 입원을 시켰지만, 오히려 심리적인 역효과만 일으켰을 뿐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레네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레네는 "사는 것은 자신을 연약하게 만드는 과정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제가 갖고 있는 병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죠. 먹지 않을 때는 감정이 안 생겨요. 의사들 말로는 제가 사춘기를 겪어야 한대요. 28살에 사춘기라니 정신 나간 소리 같지만 말이에요. 그러려면 충분한 영양을 꾸준히 섭취해야 해요.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에요. 느리게 자살하는 거라고도 볼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렇다. 거식증은 '느리게 자살하는 것'이다. 

 

레네 마리 포센의 '자화상'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던 레네는 자신의 몸을 사진에 담으면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레네는 자신의 몸을 사진에 담기 위해 엄마 토릴 포센(Torill Fossen)과 함께 그리스의 키오스 섬으로 여행을 간다. 키오스 섬의 버려진 레프라 병원의 폐허에서 레네는 자화상 작업에 몰두한다. 여기서 레네는 자신의 진솔한 모습 그대로를 세상에 드러내겠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자화상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와 예술적 영감을 주기를 바란다. 

 

거식증 환자로서 겪는 고통과 치욕을 드러내고 평생에 걸친 섭식장애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의지는 적나라해서 무섭기까지 한 작품으로 표현된다. ‘단순히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쯤으로 다시 제대로 먹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하고 소원하는 레네에게 자화상을 찍는 행위는 곧 삶을 위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작가가 된 레네는 "요 몇 년 새 생각이 바꼈죠. 금방 죽을까봐 걱정이 돼요. 나아야 해요. 하고 싶은 사진 작업이 많아졌기 때문이에요. 자화상 작품으로 전시회를 여는 게 목표에요. 그래서 할 일이 많아요. 특별함을 보여 주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사진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삶을 위한 투쟁을 자각한 것이다. 

 

레네는 "어렸을 때는 시간을 멈추고 싶었어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았거든요. 어른이 되기 싫었고 아이로 남아 있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진을 찍기 시작하니 사진으로는 시간을 멈출 수 없었어요. 시간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라고 말한다. 삶의 목적이 생기자 레네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자화상 작업에 몰두한다. 

 

레네의 작품은 노르웨이 사진계에서도 차츰 인정받기 시작한다. 레네는 자화상 작품을 세계적인 사진 작가 모르텐 크로그볼(Morten Krogvold)에게 보여 준다. 크로그볼은 예술가나 정치인 등 유명인의 초상화로 유명한 노르웨이 최고의 사진 작가다. 레네의 초상화 작품을 본 크로그볼은 "놀라운 재능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제가 본 가장 뛰어난 재능일 거예요."라고 극찬한다. 

 

크로그볼은 세계적인 사진전인 '노르딕 라이트'(Nordic Light)에 레네의 작품이 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노르딕 라이트'가 전시를 결정하자 레네의 이름도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전시회 출품을 위해 키오스 섬에서 본격적인 초상화 작업에 들어가지만 오랜 거식증으로 레네의 몸과 마음은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태다. 레네는 자화상 작업을 하는 한편 그리스로 몰려오는 난민들의 모습을 담는다. 난민들의 초상화도 그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는다. 

 

드디어 '노르딕 라이트'에서 레네의 이름을 건 사진 전시회가 열린다. 관객들은 원시적이고 강렬해서 충격을 주는 레네의 자화상 앞에서 감동을 받는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있다. 레네의 사진에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레네 마리 포센의 '자화상'

전시회장에서 레네는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담은 자화상을 가리키며 엄마에게 "창피하죠?"라고 묻자 토릴은 "아니야, 용감한 네가 대견해."라고 말한다. 레네가 또 다른 자화상을 가리키며 "저것도요? 옷을 벗었잖아요."라고 하자 토릴은 "아니야."라고 강하게 부정한다. 토릴의 대답에는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솔직한 심정이 담겨 있다. 고슴도치의 자식 사랑이다. 

 

레네는 "산다는 건 별다른 게 아니라..... 놀랍고 헷갈리지만 멋진 선물이 손에 들어온 거예요. 공간에게 생명을 주기란 어려워요. 공간이 그걸 원한다 해도요."라는 화두 같은 말을 남긴다. 그렇다. 삶이란 때로는 놀랍고 헷갈릴 때도 있지만 주어진 그 자체가 멋진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레네의 말처럼 공간에 생명을 주기란 어렵다. 하지만, 레네는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을 한다.   

 

안타깝게도 레네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 보지도 못한 채 2019년 10월 22일 오랜 기간에 걸친 영양실조로 인한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난다. 레네는 어린 시절 '서서히 죽어가는 삶'을 선택했지만,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자화상'은 삶의 선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다큐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선택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야만 한다. 관객 입장에서 레네가 예민한 감수성으로 어린 나이에 '서서히 죽어가는 삶'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도 안타깝다. 또, 레네가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삶'을 선택했을 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자화상'은 아름다우면서도 매우 슬픈 다큐멘터리다. 마그레트 올린과 카챠 회그셋, 에스펜 월린은 '자화상'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다큐멘터리를 본 관객들은 거식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화상'은 거식증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레네의 경험을 통해서 거식증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갉아먹고 황폐화시키는지 보여 준다. 선택의 문제라면 거식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2022. 9. 11.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