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 시쯤 되었을까? 어제 밤늦게 월악산 덕주휴게소로 들어온 데다가 과음을 한 탓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지리산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일어나라고 성화다. 그 소리를 일부러 못 들은 척 한다. 잠시 후에 지리산이 또 들어와서 잠을 깨운다. 그러나 나는 또 못 들은 척 한다. 잠도 부족하고 술기운이 아직 남아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오늘은 어떻게 꾀를 내어 월악산행에서 빠질까도 생각해 본다.
지리산이 세 번째 와서 또 깨운다. 그녀가 문을 열 때 월악산의 선뜩선뜩한 찬 공기가 느껴진다. "아, 저 문좀 빨리 닫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문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아침잠을 방해한다. 지리산의 끈기에 그만 항복을 하고 눈을 부시시 반만 뜬 채 일어나기로 한다. 지리산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아침식사가 마련되어 있는 옆방으로 건너가니 다들 일어나고 야생동물만 아직도 한밤중이다. 지난해 목포의 한솔산악회원들이 왔을 때도 과음으로 결국 등산을 못 했었는데 이번에도 어째 그 짝이 날 것 같다. 내가 다시 한 번 깨워봐도 그저 "음~ 음~" 하기만 하고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어제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져 야생동물, 돌칼, 지리산 세 사람은 밤을 샜다고 한다. 돌칼도 어째 비실비실하는데 지리산만 말짱하다. 돌칼이 지리산을 보고 "iron girl"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돌칼도 명색이 전문 산악인인데 말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철녀"라는 자랑스런 별명을 하나 얻었다.
아침 메뉴는 북어국이다. 어제 초상집에 가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 들어온 황회장님과 크로네가 국을 끓이고 산사랑이 압력솥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야생동물을 제외하고 나머지 10 명이 모두 모여 아침밥을 먹는다. 밥알을 입에 넣으니 꼭 모래를 씹는 것처럼 입맛이 도통 없다. 한국희 과장님은 술이 덜깬 상태에서 해장술까지 마신다. 이미 많이 취한 것 같다. 오늘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꼭 가야만 한다는데 걱정이다. 한과장님은 결국 9시 5분 차를 놓치고 10시 차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덕주사 앞에서
왼쪽부터 산사랑, 한우사랑, 지리산, 뭉게구름 님, 필자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행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도 야생동물은 일어나지 못 했다. 그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9시 40분쯤 월악산 영봉을 향해 산행을 시작한다. 등산을 하기엔 날씨가 더없이 좋다. 산기슭에는 생강나무꽃이 노오란 색으로 소보록이 피어 있다. 크로네와 지리산은 이번 월악산행이 처음이다. 풀코스 마라토너인 크로네는 걱정될 게 조금도 없지만 지리산은 약간 걱정이 된다. 지리산에서 퍼진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애불에서 필자
그러나 웬걸! 지리산은 산을 잘도 오르는데 돌칼은 틈만 나면 눈이 감기는 기색이다. 지난해 지리산 종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얼마나 졸리고 피곤하면 저럴까! 마애불에서 물통에 물을 채운다. 여기서부터 자연경관로로 오르는 등산로가 시작된다. 마애불을 보고 가기로 한다. 스님 한 분이 마애불 앞에서 독경을 하고 있다. 돌칼은 마애불까지 30여 미터 밖에 안 되는데도 졸고 있느라 그런지 올라오지도 않는다.
마애불부터는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철계단이 곳곳에 나타난다.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바위길을 힘들게 올라간다. 어느덧 땀에 젖은 옷이 축축하다. 오늘따라 월악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매우 많다. 마지막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서니 960m 암봉 위에 만들어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바로 앞에 영봉이 우뚝 서 있다. 충주호가 푸르른 물빛으로 다가온다. 전망대에 앉아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친다.
*960m 암봉에서 바라본 월악 영봉
960m 암봉 전망대에서
왼쪽부터 정두용, 필자, 황윤승 님
*960m 암봉 전망대에서 충주호를 바라보며 오이를 먹다
월악공룡과 영봉 갈림길부터는 편한 능선길이다. 영봉 바로 밑에서부터 정상까지는 약 800m의 거리다. 여기서부터는 또 다시 계단길이다. 영봉을 오르려면 반대편까지 빙 돌아간 다음에 엄청나게 긴 철계단을 올라야 한다. 영봉 반대편 응달지역에는 겨우내 쌓인 눈이 빙판을 이루고 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을 조심조심 딛는다.
*월악 영봉 서북쪽 빙판길
한동안 땀을 흘린 뒤에 마침내 월악 영봉에 올라선다. 영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산을 오를 때의 힘들었던 기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희열이 찾아든다. 드넓은 충주호가 발밑으로 보인다. 백두대간이 남쪽에서부터 조령산, 마패봉, 포암산, 부봉, 대미산, 황장산, 소백산으로 이어지면서 북으로 달려간다. 바로 앞에는 하설산, 매두막, 문수봉이 산맥을 이루면서 대미산을 향해서 뻗어가고 청풍쪽 충주호 건너편으로는 금수산이 병풍처럼 가로놓여 있다.
*월악 영봉 정상에서
왼쪽부터 황윤승, 정두용, 필자, 박주관 님
*월악 영봉 정상에서 필자
*월악 영봉 정상에서 백두대간을 가리키며
영봉에서 만수봉까지는 월악공룡능선이다. 설악의 공룡능선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월악공룡은 또 하나의 장관이다. 충주호를 건너 서쪽으로 차례로 보이는 산이 바로 지등산, 인등산, 천등산이다. 천등산 너머로는 치악산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오늘은 전망이 참 좋다. 영봉 정상 표지석 둘레는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이다.
*월악 영봉에서
오른쪽 끝이 필자
*월악 영봉에서 '산찾사' 산악회원들과 함께 기념촬영
정상의 바위봉우리 한켠에 자리를 잡는다. 산사랑이 지고 온 커다란 맥주병에 담긴 맥주를 한 컵씩 돌린다. 저마다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내 놓는다. 오징어, 오렌지, 바나나, 빵, 캔맥주, 칠레산 청포도 등 풍성하다. 크로네가 서울에서 만들어 가지고 온 무화과를 넣어 만든 빵이 맛있다. 바나나 두 개를 먹으니 포만감이 느껴진다. 점심식사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겠다.
쓰레기 처리를 말끔히 하고 하산하기로 한다. 내려가는 길은 발걸음도 가볍다. 헬기장 못 미처 삼거리에서 동창교 쪽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는데 지리산이 숨이 턱에 닿도록 뒤따라 온다. 얼마간 뒤를 따라 오다가 힘이 드는지 지리산이 뒤로 쳐진다. 계곡을 흐르는 물이 더없이 맑다. 명경지수가 따로 없다. 마음만은 늘 명경지수로 살고자 하거늘 늘 헛발질만 할 뿐이다. 속세를 떠나야만 가능한 일일까?
성황당 바로 아래에는 못 보던 절이 새로 생겼다. "慈光寺"라는 절이다. 길가에는 자주색 제비꽃이 함초롬이 피어 있다. 원추리 새싹도 파릇파릇 고개를 내밀고 있다. 어디선가 이름모를 새소리가 들려 온다. 동창교 매표소로 내려와 배낭을 벗어놓는다. 동창교 아래로 내려가 양말을 벗고 시냇물에 발을 담근다. 물이 몹시 차갑다. 정신이 번쩍 든다. 차가운 감각이 가슴속까지 파고든다.
산사랑의 짚차로 덕주휴게소에 도착하니 닭도리탕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야생동물이 식당에 시켜놓은 것이다. 식사를 마칠 즈음 5시 정도 되었는데, 마침 5시 5분에 동서울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한다. 크로네와 지리산은 그 버스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버스 정류장에서 서울로 떠나는 두 사람을 아쉬운 마음으로 배웅하였다.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인생사이거늘..... 그들이 떠난 자리에 아쉬움만 남는구나.
덕주 휴게소 안마당에는 붉은 진달래꽃이 저만치 홀로 피어 있었다.
200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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