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02년 7월 3일. 금강산으로 가는 날이다. 6시 40분에 나의 애마 프린스를 몰고 충주를 떠나 원주로 향한다. 원주 흥업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메밀묵집에 들르니 문을 닫았다. 할 수 없이 그 옆에 있는 순대국밥 전문집에 들어간다. 순대국밥이 영 짜기만하고 맛이 없다.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식당을 나왔다.
원주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중앙고속도로를 잠시 달리다가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든다. 오른쪽으로 치악산이 바라다 보인다. 평창휴게소에 잠시 들려 휴식을 취한다. 정수기에서 시원한 냉수를 한 컵 따라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든다.
평창휴게소를 떠나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가 속도를 시속 100km로 올린다. 엔진의 기계음이 부드럽게 들려온다. 길고 짧은 터널을 몇 개 빠져나오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동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주문진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해안도로를 따라서 북쪽으로 달린다. 바다에는 해무가 살짝 끼어 있다. 바다쪽에서 육지로 해무가 바람에 날려온다.
양양을 지나 10시 30분 속초 국제여객 터미널에 닿았다.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외환은행 지점에서 미화 100달러를 샀다. 금강산에서는 달러만이 통용된다고 해서 바꾼 것이다. 함께 가기로 한 세명대학교 한의대 후배들인 이진상,이종주,노승만 군도 곧 도착하여 합류한다. 종주는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슬이와 함께 왔다.
나는 애초에 금강산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지리산에서부터 60여일만에 진부령까지 남한쪽 백두대간 단독종주를 마치고 나서, 이 다음에 통일이 되면 진부령에서 걸어서 금강산까지 가겠다는 결심때문이었다. 2001년 7월 10일 백두대간 종주를 끝마치던 날 나는 비내리는 진부령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후배들이 정부에서 금강산 관광과 남북교류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여행경비의 70%를 지원해 준다면서 함께 가자고 권유하는 바람에 졸지에 금강산에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다시 없을 뿐만 아니라 정부지원이 언제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통일이 어느 세월에 되겠으며, 통일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평생 금강산 구경도 못하고 말 것이라는 말에 나는 그만 지고 말았다.
11시 20분 출항수속을 마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설봉호에 오른다. 배가 엄청나게 큰 것에 놀란다. 설봉호는 1998년에 건조된 최신형 배로 길이 114.5m, 폭 20m, 시속 17.8노트, 배수량 9258톤급이며 속초와 고성항을 최고 3시간 30분만에 갈 수 있는 쾌속선이라고 한다. 또한 이 배는 400명 수용규모의 객실 89개와 별도로 330개의 좌석을 갖추고 있고, 승객 730명, 승무원 70명 등 최대 800명이 탈 수 있으며,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바와 같은 부대시설도 있다고 한다.
선실로 들어가니 수학여행을 가는 것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많다. 울릉도 서중학교 전교생 31명도 이번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한다. 승무원 중에는 필리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아마도 임금이 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식당에서 7700원짜리 육개장으로 점심을 먹었다. 호텔급 음식치고는 맛이 별로다. 속초에서 점심을 먹고 올 것을............
12시 30분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배는 서서히 속초항을 빠져나간다. 잠시후 선실에서 비디오로 입북을 위한 사전교육을 받았다. 고배율의 사진기, 망원경, 휴대전화기는 일체 반입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주민을 자극하는 말과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휴대전화기를 승무원에게 맡기고 갑판으로 올라가 속초항 일대를 둘러본다. 갑판 앞쪽에는 생맥주와 음료를 파는 라운지가 있다. 속초항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무인도가 하나 외롭게 떠 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검푸른 물결이 하얗게 부서졌다가는 금방 에메랄드빛으로 변한다. 물빛이 참 곱다. 속초항이 제법 멀리 보인다. 바다물결은 매우 잔잔하고 해무가 살짝 깔려 있다. 고기잡이를 하는 작은 배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어선들 곁에는 해군함정 한 척이 호위를 하고 있다. 며칠전에 벌어졌던 서해교전이 문득 떠오른다. 그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데..........
이젠 육지도 해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어선도 해군함정도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오로지 검푸른 바다뿐이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마 공해상을 항해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해무가 갑자기 더 짙어진다. 육지가 가깝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배는 이미 북한 영해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 아닌가!
뱃고동이 우렁차게 몇 번 울리고나자 해무가 말끔하게 걷힌다. 해무가 걷히자 마술처럼 나타나는 금강산! 장엄화려한 금강산이 두 눈을 가득 채운다. 48년만의 이 감격...........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마침내 금강산을 살아 생전에 와 보는구나! 소나무와 기암절벽이 잘 어우러진 금강산 중턱에는 구름이 한자락 걸려 있다.
장전항[북한에서는 고성항이라고 부름]과 해금강호텔이 바로 앞에 보인다. 장전항 건너편으로는 북한의 고성읍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장전항 앞바다에는 고기잡이를 하는 작은 목선들이 떠 있다. 거의가 노를 저어서 다니는 거룻배들이다.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이 손을 흔들어 준다. 돛단배도 몇 척 보인다. 문득 196,70년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든다.
장전항은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장전항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배는 서서히 장전항 내항으로 들어선다. 우리를 2박 3일동안 안내할 윤정숙 양이 다시 한 번 북한땅에서 꼭 지켜야할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금강산은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지정된 장소외에는 사진촬영이 일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오후 4시 30분 설봉호는 장전항에 입항했다. 짐을 챙겨서 하선을 준비한다. 하선이 시작되어 장전항 부두에 감격스런 첫발을 내딛는다. 부두에 내리니 김일성과 김정일 뱃지를 단 북한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들을 보니 여기가 북녘땅이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입북심사장에서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나오다가 기념품 판매장에서 금강산 관광수첩을 1달러에 샀다. 판매원은 중국 길림성에서 온 조선족 교포처녀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여기서 근무하는 종업원들은 간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한다.
입북심사장을 나와 우리가 묵을 해금강호텔로 향한다. 호텔로비에 들어서니 필리핀인 3인조 악단이 환영연주로 맞이한다. 해금강호텔은 한마디로 바다에 떠있는 해상호텔이다. 길이 89.2m, 폭 27.6m의 지하 2층, 지상 6층의 규모로 160개의 객실에 한꺼번에 450명이 묵을 수 있다. 또한 해금강호텔은 연회실, 라운지 바, 가라오케, 레스토랑, 디스코텍, 기념품점 등을 갖추고 있다. 나는 이진상, 노승만 군과 함께 6층에 있는 643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종주 군과 슬이는 바로 옆방인 641호실에 들었다.
짐을 풀고 바로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오른다. 시간은 오후 6시를 막 지나고 있다. 운전기사는 중국 길림에서 온 66년생 전영필이라는 사람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조선족 동포들은 운이 매우 좋은 편이라는 말을 들었다. 보수도 괜찮거니와 무엇보다도 불법체류를 하지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버스는 양쪽으로 높다랗게 철조망이 쳐진 사이로 난 도로를 달린다. 곳곳에 군복을 입은 북한군인들이 부동자세로 경계를 서고 있다. 손을 흔들어 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북한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통하는 길 입구에는 어김없이 초병이 배치되어 있다. 관광객들과 북한주민들이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눈에 잘 띄는 바위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고 혁명사상을 고취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아름다운 금강산이 파괴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마음이 우울해진다.
현대에서 닦았다는 관광전용도로 옆으로는 북한사람들만 다닐 수 있는 비포장도로가 따로 나 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북녘동포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길을 걸어간다. 더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자동차는 거의 볼 수가 없다. 이 곳에서는 선글래스를 쓴 사람이 최고 멋장이라고 한다. 또 자전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등 신랑감이라는 말도 들었다. 두세달 월급을 모아야 자전거 한 대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양쪽 도로사이에는 철로가 나 있다. 열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지 철로에는 녹이 잔뜩 슬어 있다.
6시 15분 온정리[溫井里] 매바위산 아래에 위치한 금강산온천에 도착했다. 온천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참 좋다. 온정리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 곳에서 온천욕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 조선시대 세조가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이 곳의 온천수로 목욕을 한 뒤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는 온천욕을 하는 대신 2층 전시실에서 북한 명인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했다. 목욕이야 남한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북한미술은 접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1급예술가이면서 소년천재화가로도 불리는 김규권이 8살에서 12살까지 그렸다는 조선화[동양화] 소품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참으로 천재적인 화가다. 1988년 12월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14살이다. 그런 나이에 벌써 1급예술가의 칭호를 얻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인민예술가는 장관급, 공훈예술가는 차관급, 1급예술가는 차관보급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2000년 7월 평양에서 국가개인미술전시회를 열 정도였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겠다.
인민예술가인 라춘식의 [만물상]은 그 느낌이 어찌나 생생한지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1급창작가인 김기만의 조선화 [홍매화와 참새], [가물치]도 뛰어난 작품이다. 그는 바로 김기창 화백의 동생이다. 몇 년전 그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조처로 남한을 방문하여 꿈에 그리던 형 김기창 화백을 만난 바 있다. 그의 그림을 바로 여기서 볼 수 있다니!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든다. 그는 조선화의 창작법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훈예술가인 박제일의 조선화 [압록강 상류에서], [백두산 3단폭포]는 기법상 색이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바로 이응로 화백과 함께 동양미술학원을 설립하고 이탈리아, 독일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공훈예술가인 한태순의 유화 [금강산 집선봉], [금강산 만물상], [금강산 구룡폭포]도 훌륭한 그림이다. 그는 붓이 아니라 나이프의 특징적인 효과를 살려 하늘, 강, 산과 나무뿐만 아니라 미세한 세부들까지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려내는 특기가 있다.
2층의 복도벽에는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담은 사진과 사연이 적혀 있는 액자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언젠가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을 때 찍은 사진들이라고 한다. 사진마다 슬픈 사연과 안타까움, 깊은 한을 간직하고 있다. 새들도 남북한을 자유롭게 오가는데 같은 핏줄끼리는 오도가도 못하는 이 기막힌 현실에 가슴이 메인다.
전시실을 나와 온정각 휴게소로 향한다. 이번에는 버스를 타지않고 걸어가기로 한다. 온정각까지 걸어서 7,8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지만 한 발자욱이라도 북녘땅을 더 밟아보기 위해서다. 만물상과 관음연봉 사이에 있는 한하[寒霞]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온정천을 건넌다. 온정천에는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다. 계곡물이 참 맑다. 송사리 새끼들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다리를 건너면 한하계곡으로 올라가는 길과 만난다. 하지만 이 곳에도 인민군 초병이 배치되어 있어 정해진 길외에는 다닐 수 없다.
왼편으로 90도 꺾어서 몇 발자욱 가면 영생탑이 나온다. 길가에는 아름드리 조선소나무들이 듬직하게 서 있다. 영생탑은 뒤로 통바위산인 바리봉을 배경으로 서 있다. 이 곳을 참배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는 사진촬영이 허용되는 곳이다. 영생탑에서 오른쪽으로 90도 돌아서 잠깐 걸어가면 온정각 휴게소다. 온정각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건물이 북한의 3대 휴양소 중의 하나인 그 유명한 김정숙 휴양소다. 예전에는 고위 당간부들이 이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주민만이 다닐 수 있는 길에는 나무를 한 짐 해서 지게에 지고가는 사람이 눈에 띈다. 여기는 아직도 나무를 땔감으로 하는 집이 많은 모양이다.
온정각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물김치에 만 국수, 닭고기, 연어회가 특히 입맛에 맞는다. 배추와 상추는 현대와 북한이 합작으로 운영하는 농장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것이라고 한다. 배추와 상추를 된장에 찍어서 싫컷 먹었다. 그 때문에 그만 또 과식을 하고 말았다.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8시가 조금 넘었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밀려들기 시작한다. 금강산의 우뚝우뚝 솟은 암봉들이 능선을 이루면서 온정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온정각앞 광장을 이리저리 한가로이 거닐어본다. 비록 제한된 지역이지만 북한땅을 걸어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노승만 군이 옆에 있다가 '여기는 한국이나 다름없네요.' 한다. 북한사람들과 만나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라서 하는 말이다.
8시 30분 버스에 올라 해금강호텔로 향한다. 이제 주위는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차창으로 사방을 둘러봐도 불빛이라곤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김정숙 휴양소에도 불빛이 전혀 없다. 고성읍도 마찬가지다. 마치 죽음의 도시같은 느낌이 든다. 북한의 전력난이 심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 오직 설봉호와 해금강호텔만이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다. 고성주민들이 이 곳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 지 궁금하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올라가 샤워부터 한다. 물기를 닦고 텔레비젼을 켜니 남한방송이 나온다. 마침 9시 뉴스가 진행중이다.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는 일급 태풍인 '라마순'이 점차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제주도와 서해안은 이미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바다쪽 난간에 서서 어둠속에 잠긴 고성항을 바라다본다. 건너편 해안에는 엄청나게 밝은 탐조등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면서 밤바다를 비춘다. 바다를 오가는 배는 한 척도 없다. 그야말로 적막한 밤바다다. 난간에 놓여있는 테이블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생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호텔로비로 돌아와 생맥주를 한 잔 시켜놓고 여성 한 명과 남성 두 명으로 이루어진 필리핀 3인조 보컬팀의 연주를 감상한다. 가끔 한국노래도 들려준다. 베이스 기타와 드럼이 없어서 그런지 연주에 무엇인가 맥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5백씨씨 생맥주 한 잔에 4달러다. 맥주잔을 비우고 지하에 있는 디스코텍에 들어가보니 손님이 한 사람도 없다. 바로 옆에 있는 가라오케에만 외국인 일행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
로비로 도로 올라와 프론트에 걸린 시계를 보니 밤 11시다. 숙소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엘리베이터벽 투명유리를 통해서 장전항 건너편 고성읍을 바라보니 여전히 캄캄하다. 사람이 전혀 살지않는 동네같다. 숙소로 돌아와 양치질을 하고 침대에 오른다. 두 친구는 벌써 깊은 잠이 들었다.
북한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하니 감회가 새롭다.
2002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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