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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유달산에서

林 山 2004. 7. 24. 17:02

2002년 1월 10일. 9시 반경 눈을 뜨다. 일어나 보니 집주인 전대윤씨는 벌써 직장에 출근하고 없다. 아파트 뒤로 드넓은 개펄이 드러나 보인다. 아파트가 바로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전망이 매우 좋다. 작은 배들이 오고가는 것이 평화로와 보인다. 아파트를 나서자 길가의 텃밭에 갓들이 파릇파릇하게 자라고 있다.

북항에서 신건준군과 약속장소인 목포역까지 시가지도 구경할 겸해서 걸어가기로 했다. 신군은 어제 우리와 따로 떨어져 친구를 만나러 가서는 거기서 묵었다. 목포역 구내로 들어가니 신군과 그의 친구 부인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친구는 직장에 출근해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신군의 친구인 유경렬 군은 나도 아는 사이로 목포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해서 아주 이곳에 눌러 앉았다고 한다.

목포역 근처에 있는, YMCA 산악회장 황정원씨의 등산용품점 [유달산장]에 배낭을 맡겨 놓고 유달산을 오르기로 했다. 목포에는 대학교 다닐 때 와 봤으니까 20년도 더 되었다. 그 때보다는 목포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11시 10분.유달산 초입에 있는 露積峰[60m]에 오르다. 음지에는 눈이 쌓여 있고 빙판길이어서 미끄럽다. 바위틈에는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1597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목포에 머물면서, 이 봉우리를 짚마름으로 덮어 군량미를 쌓은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같이 속여 왜군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데서 노적봉이란 이름이 유래한다.

잘 다듬어진 계단길을 20여분 쯤 올라가니 그 유명한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나온다. 노래비는 암반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옆 돌상자 안에 들어있는 스피커에서 이난영이 부르는 '목포의 눈물'이 애잔하게 흘러 나온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길 떠난 나그네가 되어 감상에 젖어 본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뒤로 하고 다시 계단길을 10여분 올라가니 儒仙閣이 나타난다. 유선각은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마루를 놓았다. 곳곳에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꽃망울이 맺힌 것도 있다. 길가의 개나리가 벌써 노랗게 피어났다.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11시 50분.마당바위 전망대에 오르다. 바로 건너 앞 일등바위 암벽에는 弘法大師와 不動明王의 상이 부조되어 있다. 홍법대사[空海.774~835년]는 일본 불교 眞言宗의 개조이고,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使者로 밀교의 5대 명왕중의 하나이다. 조선이 개항한 뒤 일본의 진언종파는 1920년경 유달산에 이 두 상을 새겨 놓았다. 마당바위 입구에는 '미래를 여는 공동체'라는 단체에서 이 두 상이 왜색불교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입간판을 세워 놓았다.

문화란 물의 흐름과도 같아서 높은데서 낮은데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는 서양에서 흘러들어 온 것이 아닌가!  우리의 토속종교는 우리 스스로 미신이라고 해서 천대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스님과 목사,신부,무당을 동격으로 본다. 일본문화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배격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물론 일제하 36년이라는 쓰라린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난 일은 어디까지나 지난 일이다. 지나간 일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안된다. 그들의 문화에도 인류의 보편타당한 가치가 있다면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미국문화의 홍수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때 명나라의 역할을 미국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조기 영어교육 열풍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학동들도 이들 못지않게 한문을 열심히 공부했었다. 상전이 바뀌었으니 출세하려면 상전이 쓰시는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것이 바로 신식민지 피지배 국민들의 슬픈 현실이다.

거대한 암봉의 허리를 휘감고 오르는 돌계단을 20여분간 땀을 흘리며 올라가 정상에 서다. 여기가 바로 일등바위, 곧 儒達山[228m] 정상이다. 전망이 매우 좋다. 목포 시가지가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목포항에는 커다란 화물선 세척이 정박해 있고 그 사이로 작은 배들이 쉴 새 없이 오고간다. 三鶴島는 육지와 연결되어 이젠 더이상 섬이 아니다. 저멀리 영산강 하구언 뒤로 목포와 대불공단을 잇는 철교 건설이 한창이다.

바다 위에는 크고작은 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떠 있다. 섬들 사이로 연안여객선과 작은 어선들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오간다. 까만 점처럼 보이는 작은 배들이 군데군데 수십척씩 무리를 지어 떠 있다. 양식을 위한 씨고기로 쓰기 위해 장어새끼를 잡고 있는 것이라고 오옥현 군이 알려 준다.

바로 밑으로 목포 해양대학교가 내려다 보인다. 부두에 흰색의 멋진 실습선 두척이 정박해 있다.

 

12시 20분. 일등바위를 내려와 逍遙亭에 이르다. 동동주와 도토리묵을 파는 아주머니가 손님들을 부른다. 소요정 들마루에는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늘따라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소요정에서 10분 정도 걸려 이등바위에 오르다. 조각공원이 바로 코아래로 보인다. 어찌하여 봉우리 이름을 일등, 이등이라고 지었을까?  이등바위가 서운할텐데.........

이등바위로 오르는 입구에는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산악회원들이 돼지머리와 과일, 떡, 과자들을 한 상 잘 차려놓고 시산제를 지내고 있다. 시산제 지내는 것을 보고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정재현 선생과 조계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조계산을 올랐는데, 정상에 이르자 그만 허기가 져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 마침 어느 산악회에서 시산제를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눈이 번쩍 뜨였다. 시산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체면이고 뭐고 돌아볼 것도 없이 달려들어 배를 채웠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온다.

12시 40분. 산을 내려오는 길에 '특정자생식물원'에 들렀다. 온실에는 검붉은 보라색의 할미꽃, 분홍색의 이질풀꽃, 갯패랭이꽃, 연보라색의 넓은잎 구절초꽃, 왕제비꽃, 흰색의 연잎 구절초꽃, 작은 흰꽃이 모여 송이를 이룬 서향나무꽃, 노란색의 매미꽃, 애기똥풀꽃, 엷은 자주색의 털쑥부쟁이꽃, 흰꽃과 노란꽃이 한 덩굴에 피어난 인동초[그래서 金銀花라고도 함], 빠알간색의 쇠비름꽃, 자주색의 작은 눈동자꽃, 샛노란 작은 꽃의 방가지똥,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피라칸사스, 연노란색의 꽃망울이 맺힌 에델바이스로 더 잘 알려진 솜다리꽃, 붉은 자주색의 사철패랭이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피어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식물원의 규모는 작았으나 식물들이 짜임새 있게 전시되어 있다.

식물원을 10여분에 걸쳐 돌아보고 나서 바로 밑에 있는 蘭식물원에 들렀다. 일본란, 한국란, 중국란, 대만란, 춘란, 보세란, 하란, 착생란 등 온갖 난초들이 원산지별 또는 종별로 나뉘어져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 연초록 꽃망울을 방금 터뜨린 난초가 단연 돋보인다.

난식물원을 나오니 입구에 서있는 동백나무의 붉은색 꽃망울들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정선생과 신군이 그 광경을 보고 신기해 한다.

유달산을 내려오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한솔산악회 박상복씨가 일러 준 대로 택시를 타고 2호 광장 근처 대림약국 뒤에 있는 [인동주마을]로 갔다[1시 25분]. 이곳이 민속주로 특허를 받은 인동주로 유명한 집이다. 주인인 우정단씨는 인동주를 만든 장본인으로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까지 하였다.

홍어회와 인동주를 시켰다. 홍어회는 삼합으로 나온다. 삼합이란 폭 삭힌 홍어회와 돼지삼겹살을 잘 익은 김치에 싸서 먹는 것을 말한다. 황금빛이 도는 인동주를 한사발 마신 다음 삼합을 한입 가득 물고 씹는 맛이란........목포에 온 보람을 한꺼번에 느끼는 순간이다.

홍어회를 안주로 인동주를 한 대포씩 마신 다음 점심을 먹었다. 갈치조림과 간장게장, 어리굴젓이 반찬으로 나왔다. 반찬이 너무 맛있어 순식간에 밥 한 그릇을 다 먹어 버렸다.

2시 20분. 인동주마을을 나와 유달산장에 들러 배낭을 찾았다. 황정원씨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목포역으로 향했다. 목포역에서 오옥현 군의 배웅을 받으며 2시 40분 목포발 서울행 무궁화호 열차에 오르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로변의 밭에는 채소들이 파릇파릇하게 자라고 있고, 양지바른 곳에는 풀들이 파랗게 살아 있다. 목포만 해도 기후가 따뜻한 모양이다. 열차는 금새 목포를 벗어나 북쪽을 향해 달린다.

6시 40분. 조치원역에 도착하니 날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조치원발 제천행 열차는 10분 뒤에 바로 연결되었다.

8시 정각. 충주역에 닿았다. 개찰구를 나오니 건국대 의대 정ㅇㅇ 교수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다. 정교수의 차를 타고 [각기우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후에 충북 직업훈련원 황ㅇㅇ 교수도 우리를 환영해 주기 위해 나왔다. 막걸리를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산행중의 일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밤은 어느덧 깊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4박5일간의 여정은 드디어 막을 내렸다.

 

2002년 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