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 반도(Cape Peninsula)의 동쪽 중간쯤에 있는 펭귄들의 서식지로 유명한 보올더스 비치(Boulders Beach)를 떠나 희망봉(Cape of Good Hope)으로 향한다.
남아공 케이프 반도 지도
세인트 제임스(St James)에서 케이프 반도 최남단의 케이프 포인트(Cape Point)를 잇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린다. 왼쪽으로는 드넓은 폴스 베이(False Bay)의 잔잔한 바다가 눈을 시원하게 하고, 오른쪽으로는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 산맥이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을 이루고 있다.
케이프 반도 지도를 보면 포인트(Point), 록(Rock), 베이(Bay), 케이프(Cape), 비치(Beach)라는 지명이 많이 등장한다. 포인트는 바다의 가장 앞쪽으로 튀어나온 뾰족한 지점이나 산의 정상을 가리킨다. 케이프 포인트는 곧 바다쪽으로 맹수의 송곳니처럼 길게 뻗어나온 케이프 반도의 가장 끝 지점이다. 록은 바위로 된 봉우리 즉 암봉이고, 베이는 바다가 육지쪽으로 움푹 들어간 만(灣)이다. 케이프는 육지가 바다쪽으로 뻗어나간 곶을 말하는데, 길이가 길면 반도라고 한다. 비치는 백사장이 있는 해안 즉 해수욕장이다.
바분
길가에는 개코원숭이인 바분(Baboon)이 흔하게 눈에 띈다. 차를 무시하고 도로를 뛰어다니는 바분들을 조심해야 한다. 폴스 베이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차를 세우고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바로 그때 커다란 바분 한 마리가 백인 여성 관광객을 습격해서 음식이 가득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빼앗아 달아난다. 그 녀석은 한적한 곳으로 가더니 쪼그리고 앉아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다. 음식을 통째로 빼앗긴 백인 여성은 발만 동동 구를 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스미츠빙케 베이와 캐슬 록
테이블 마운틴 산맥과 희망봉 자연보호구역(Cape of Good Hope Nature Reserve)의 동쪽 경계지점에 스미츠빙케 베이(Smitswinke Bay)가 있다. 자연보호구역으로 들어와 첫번째 만난 전망대에서 스미츠빙케 베이를 내려다 본다. 만의 바다가 눈을 시원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에머럴드 빛을 띠고 있다. 건너편으로 테이블 마운틴 산맥의 남쪽 끝에 우뚝 솟아 있는 캐슬 록(Castle Rock)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캐슬 록 정상에는 구름 한 자락이 걸려 있다.
바차타 록
스미츠빙케 베이 남쪽에는 바차타 록(Batsata Rock)이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솟아 있다. 여기서부터 희망봉 자연보호구역이 시작된다. 산기슭에는 키가 큰 나무는 보이지 않고 관목과 초본류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조금은 황량한 느낌을 준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역의 대평원
희망봉 자연보호구역 초입의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를 벗어나면 광활한 대평원이 나타난다. 대평원에는 대규모 습지도 있어 다양한 생태계를 보여주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다양한 들꽃과 관목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이곳에는 프로테와(핀보스의 일종), 에리카(Erica, 일명 케이프 히스)를 비롯하여 2천여 종에 이르는 희귀식물과 특산식물이 자생하고 있으며, 또 얼룩말과 바분, 사슴, 몽구스, 타조, 플라멩고 등 야생동물도 서식하고 있다. 남아공 정부는 생태계의 보고인 이곳을 1939년부터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일주도로(Circular Drive)를 따라가다가 전망대(Gifkommet Jie, View cite)를 만나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대평원을 가로질러 테이블 마운틴 국립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르톨로뮤 디아스 기념탑
대평원지대를 벗어나면 얕으막한 구릉지대가 나타난다. 구릉지대의 정상에 세워진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5.29) 기념탑 앞에 선다. 포르투갈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였던 디아스는 1488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희망봉을 발견하고,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9년 뒤 1497년 11월 22일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14.12.24)가 디아스에 이어 두 번째로 희망봉을 돌았다.
타조
희망봉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곳에 매클리어 비치(Maclear Beach)가 있다. 해안으로 내려가는데 타조 한 마리가 관목숲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고 있다. 난생 처음 보는 야생의 타조가 신기하기만 하다.
희망봉
매클리어 비치를 떠나 마침내 말로만 듣던 희망봉에 이르다. 희망봉의 정확한 이름은 '희망의 곶(Cape of Good Hope)'이다. 우리가 '희망의 곶'을 희망봉으로 부르는 것은 '희망을 주는 봉우리'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봉우리 앞에 세워진 표지판에는 'Cape of Good Hope:The most south-western point of the African continent. 18° 28' 26" East 34° 21' 25" South'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희망봉은 아프리카 대륙의 최서남단 땅끝마을이라는 것이다. 만약 표지판이 없었다면 저 낮으막한 바위봉우리가 희망봉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서양의 성난 파도가 쉴새없이 몰려와 바위절벽을 때리고는 하얗게 부서진다.
옛날부터 희망봉 인근 해역은 폭풍이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역사가 바루스는 디아스가 이곳을 발견했을 때 '폭풍의 곶(Cape of Storms)'으로 이름붙였던 것을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다시 '희망의 곶'으로 바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폭풍을 두려워한 선원들이 이곳을 항해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린시페 섬에서 디아스와 합류했던 두아르테 파체코의 말에 따르면 희망봉이라는 이름은 디아스 자신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파체코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역사는 누구의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사실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유럽인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경영과 금과 향료를 얻기 위해 인도로 가는 동방항로를 열어준 저 봉우리야말로 말 그대로 '희망봉'이었다. 그러나 1652년 네덜란드인들이 케이프 반도에 이주해 왔을 때 원주민인 코이코이족은 이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아프리카 내륙으로 쫓겨 가야만 했다. 그 후 수백여 년에 걸쳐 유럽인들의 식민 지배에 따른 약탈과 착취, 노예매매와 인종차별에 시달리게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저 봉우리는 차라리 '절망봉'이었으리라. 이제 유럽인들에 의한 아프리카의 식민지 지배는 종식되었다. 그리고, 남아공에서도 아파르트 헤이트가 철폐되어 인종차별이 사라지고 다인종 국가가 된 지금 저 봉우리가 진정으로 모든 남아프리카인들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위한 '희망봉'이 되기를 바란다.
케이프 포인트
케이프 포인트 산책로
희망봉을 떠나 케이프 포인트로 향한다. 케이프 포인트 주차장에는 관광버스와 승용차들로 꽉 들어차 있다. 매표소 근처에는 레스토랑과 기념품점도 보인다. 산책로 입구의 표지판에는 'Cape Point, 34° 21’ 24” South Latitude 18° 29’ 51” East Longitude, South Africa'라고 표기되어 있다.
케이프 포인트로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플라잉 폭스 퓨니큘라(Flyng Fox Funicular)'라는 이름의 시닉 트레일(Scenic Trail)을 타고 오를 수도 있고, 산책로를 따라서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위해 트레일을 타고 케이프 포인트로 오르기로 한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산기슭에는 해안수풀엉겅퀴(Coastal Bush thistle, Cullumia squarrosa, 아프리카 데이지의 일종)와 에리카, 프로테와가 자라고 있다.
플럼푸딩 록
시닉 트레일에서 내려서 케이프 포인트 정상으로 오르다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바로 앞에는 플럼푸딩 록(Plumpudding Rock)이 솟아 있고, 그 뒤로 희망봉 자연보호구역의 대평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흘러간다.
희망봉
희망봉은 플럼푸딩 록에서 서남쪽으로 대서양을 향해 뻗어나온 바위봉우리 곶이다. 디아스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서부 항구에 도달한 뒤 포르투갈로 귀환하자마자 인도와의 대규모 통상을 목적으로 구성된 12척의 함대에서 소규모 선박 한 척의 지휘를 맡았다. 1500년 5월 29일 함대가 저 희망봉 해역에 이르렀을 때 디아스는 이곳에서 실종되었다. 그가 처음 발견했던 희망봉이 곧 그의 묘비가 되고 만 것이다.
희망봉과 케이프 포인트 사이에는 작은 만이 있다. 만의 바위절벽 위로 난 길을 따라서 케이프 포인트 정상까지 걸어서 오를 수 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저 낭떠러지 길을 걸으면 멋진 풍광과 함께 짜릿한 스릴을 맛볼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저 희망봉이 남아공의 최남단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남아공의 최남단은 희망봉에서 동남쪽으로 160km 떨어진 '아굴라스곶(Cape Agulhas)'이다. 포르투갈어로 '아굴라스'는 수많은 배들을 난파시킨 암석과 암초를 일컫는 '바늘들'이라는 뜻이다. 아굴라스곶은 동경 20° 00’ 09.15”, 남위 34° 50’ 00”이니까 희망봉보다 분명 28' 75" 더 남쪽에 있다. 따라서 지리학적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공식 경계선은 당연히 아굴라스곶이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와 심리적 측면, 그리고 해양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두 대양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저 희망봉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저 희망봉은 대서양과 인도양,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운명적인 만남을 상징한다. 또 인도로 가는 동방항로의 발견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만남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한편 저 희망봉은 난파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서양과 인도양을 오고가는 선원들에게 앞으로 항해할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리고 아굴라스곶은 암초가 많아 항구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던 반면에 케이프 반도에는 크고 작은 만들이 있음으로써 두 대양을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이처럼 희망봉은 심리적으로 선원들에게 희망을 주는 봉우리였다. 해양생태학적으로 볼 때는 어떤가? 희망봉은 적도에서 내려온 인도양의 모잠비크-아굴라스 난류와 남극해에서 올라온 벵겔라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 두 조류는 아프리카 연안의 기후와 해양생태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두 조류의 만남도 바로 희망봉에서 시작된다.
폴스 베이
하얀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서 폴스 베이의 잔잔한 수면이 눈부시게 빛난다. 머나먼 이국에서 이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후를 맞이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아주 눌러앉아 살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폴스 베이(False Bay)는 '가짜 만'이라는 뜻이다. 아름다운 만이 어찌하여 이런 이상한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그 옛날 인도에서 돌아오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들이 식량과 물자를 보충하려고 케이프 타운 서쪽 바다인 테이블 베이로 들어갔다. 그러나 바다에서 육지쪽으로 쑥 들어간 모습이 비슷하기는 했지만 그 만은 테이블 베이가 아니었다. 낭패를 본 선원들은 다시는 속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이 만의 이름을 '가짜 만'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선원들의 어이없는 착각에 '가짜 만'이 그 오명을 뒤집어 쓴 격이다. 억울하기 이를 데 없을 '가짜 만'은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북쪽에서 바라본 케이프 포인트 정상
남쪽에서 바라본 케이프 포인트 정상
케이프 포인트 정상의 이정표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 드디어 아프리카 대륙의 땅끝마을 케이프 포인트(249m) 정상에 서다. 정상에는 케이프 포인트 등대가 있다. 이 등대는 1860년부터 불을 밝히기 시작해서 1919년까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이 등대는 역사적 기념물로 남아 있다. 등대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해발 249m의 케이프 포인트 정상에 세운 이 철제탑 등대는 2천 촉광의 불을 밝혀 67km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등대는 자주 구름과 안개에 가려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911년 포르투갈의 정기선 '루시타니아'호가 좌초된 후, 해발 87m의 디아스 포인트(Dias Point)에 새로 등대를 세우기로 했다.'
등대 앞에는 세계 각국의 수도와 주요 항구도시의 방향,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에는 남극(6248km),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6055km), 인도의 뉴 델리(9296km), 이스라엘의 예루살렘(7468km), 호주의 시드니(11642km), 싱가폴(9667km), 영국의 런던(9623km), 미국의 뉴욕(12541km) 등이 보인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이웃나라 중국의 베이징과 일본의 도쿄도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의 서울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중심 충주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케이프 포인트에서 디아스 포인트로 이어지는 바위절벽
앞으로 한 발자욱만 더 내디디면 수백 길 낭떠러지인 케이프 포인트 남쪽 바위벼랑 위에 서자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인다. 대서양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모자가 날아갈 것만 같다. 케이프 포인트에서 남동쪽으로 수직암벽을 이루며 뻗어나간 칼등능선의 끝 지점이 디아스 포인트다. 폴스 베이 건너편으로 가물가물 보일 듯 말 듯한 곶이 아굴라스곶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디아스 포인트
디아스 포인트 등대
케이프 포인트에서 칼등능선을 걸어 마침내 더 이상 갈 수 없는 디아스 포인트에 서다. 대서양과 인도양은 여기서 만나 한바다가 되어 가없는 수평선 끝에서 하늘과 맞닿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구름이 낮게 드리운 검푸른 바다 뿐..... 망망대해의 끝 저 어딘가에 남극이 있으리라. 한국에서 그 먼 길을 달려와 아프리카 대륙의 땅끝에 서서 나그네의 감상에 젖는다.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느낌이다.
디아스 포인트에는 1919년부터 불을 밝히기 시작한 아프리카에서 가장 밝은 등대가 있다. 케이프 포인트 등대는 자주 구름과 해무에 가려 인근 해역을 항해하던 선박이 좌초하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곤 했다. 그러다가 1911년 이곳을 항해하던 포르투갈의 정기선 '루시타니아'호가 좌초되자 마침내 케이프 포인트 등대를 폐쇄하고 디아스 포인트의 해발 87m 지점에 새 등대를 세웠다. 그 후 오늘날까지 이 등대는 대서양과 인도양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가슴에 하나 가득 대서양과 인도양을 담은 채 케이프 타운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린다. 대평원을 가로질러 희망봉 자연보호구역 입구로 나오자 길가에 토산품을 판매하는 노점이 있다. 마음에 드는 석조 조각작품이 있어 가격을 물어보자 2천5백란트(22만5천원)를 부른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구입을 포기한다.
케이프 반도의 서쪽 해안도로를 향해서 내려가는데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는 바분 무리가 자주 나타난다. 바닷가에 별장식 주택들이 그림처럼 앉아 있는 스카버러(Scarborough)를 지날 때 문득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funkel)이 부른 스카버러 페어(Scarborough Fair)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파페라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도 특유의 미성으로 이 노래를 부른 바 있다. 원래 이 노래는 17세기부터 잉글랜드에서 구전되어 온 민요로 스카버러는 영국에 실재하는 지명이다. 옛날에는 번성했던 무역항이었다는데 이제는 쇠락한 작은 해안마을이라고 한다. 카리브 해 남부 트리니다드토바고의 토바고 섬에도 스카버러가 있다.
스카버러 해안에는 육지를 집어삼킬 듯 높은 파도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파도를 가르며 서핑 보드를 타고 있다. 나도 바다로 뛰어들어 저들과 함께 서핑 보드를 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아! 젊음이여! 나도 한때는 낙하산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적이 있었는데.....
한 폭의 풍경화처럼 해안의 풍광이 멋진 소에트워터(Soetwater)를 거쳐 지중해식 별장지대인 코메트 지(Kommet Jie)를 지나 선밸리(Sunvalley)에 이른다. 선밸리에서 노르드호에크(Noordhoek)에 이르는 활엽 가로수 길이 눈을 싱그럽게 한다. 환상적인 해안경치로 유명한 채프먼봉로(Chapman's peak drive)를 따라서 하우트 베이(Hout Bay)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도로 초입에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고 안내인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안내인이 채프먼스 피크 드라이브에 산사태가 나서 길이 끊어졌으니 M64번 도로로 우회하라고 한다.
테이블 마운틴 산맥을 넘어가는 M64번 도로는 환상적인 산악 드라이브 코스다. 해는 이미 대서양 너머로 지고 땅거미가 어둑어둑 밀려오고 있다. M64번 산악도로를 타고 테이블 마운틴 산맥을 넘어서 케이프 타운으로 연결되는 M3번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케이프 타운 테이블 베이 워터프론트 항구의 야경
밖이 완전히 캄캄해져서야 남아공의 입법수도이자 웨스턴 케이프(Western Cape) 주의 수도이며, 아프리카 2대 휴양지 중 하나인 케이프 타운 시내로 들어왔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테이블 베이(Table Bay)에 자리잡은 빅토리아 앤 알프레드 워터프론트(Victoria & Alfred Waterfront)로 향한다.
워터프론트로 들어가니 항구의 야경이 휘황찬란하다. 워터프론트는 호텔과 레스토랑, 쇼핑몰, 극장, 박물관, 각종 해양 스포츠 레저 시설 등이 밀집된 케이프 타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서울로 말하자면 명동이나 강남에 해당하는 상업지역이다. 워터프론트는 1860년 처음 개항한 이후 1970년 대대적인 재개발을 거친 뒤 케이프 타운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침 디지털 카메라 메모리 칩 용량이 다 차서 카메라 전문점을 찾아 512메가 용량의 칩을 2백란트(2만6천원) 주고 샀다.
워터프론트의 산 마르코 카페테리아
워터프론트 항의 부두를 따라서 레스토랑과 카페테리아, 주점, 편의점 등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산 마르코 카페테리아(San Marco Cafeteria)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노천 탁자에 자리를 잡고 부모님의 식성을 고려해서 아라비아타 파스타(Arrabiata Pasta)와 시푸드 파스타(Seafood Pasta), 알프레도 파스타(Alfredo Pasta) 등 세 종류의 스파게티를 주문한다. 토마토와 바질(Basil), 칠리(Chilli) 소스가 들어간 아라비아타 파스타는 내 입맛에 영 맞지 않는다. 새우와 홍합, 가리비, 오징어 등의 해물에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시푸드 파스타와 새우와 연어, 닭고기, 마늘을 넣고 우유와 올리브 오일, 생크림을 혼합한 소스를 부은 다음 치즈 가루를 뿌린 알프레도 파스타는 그런대로 괜찮다. 한국에서는 알프레도 파스타를 만들 때 주로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에서 생산된 파마산 치즈를 쓴다는데, 여기서 나온 치즈는 어떤 치즈인지 모르겠다.
카페테리아 바로 앞에서 늙수그레한 흑인 악사가 색소폰으로 '마이 웨이'를 연주한다. 거리의 악사 앞에는 모자가 놓여 있다. 낯익은 음악을 들려준 고마움에 동전 하나를 그의 모자속에 넣어주었다. 밤이 되자 날씨가 제법 선선하다.
라군 비치 호텔의 칵테일 바
워터프론트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가 있는 차로 5~10 분 거리인 밀너톤(Milnerton)으로 향한다. 테이블 베이 바닷가에 자리잡은 밀너톤의 라군 비치 호텔(Ragoon Beach Hotel)에 도착하여 프론트에서 체크 인(Check in)을 한다. 요하네스버그를 떠나기 전에 예약을 해놓은 호텔이다. 하루 숙박비가 12만원으로 비교적 저렴한 콘도식 객실에는 더블 베드가 놓인 침실 두 개, 주방과 거실이 각각 하나, 욕실이 두 개 딸려 있다. 여기서 앞으로 이틀을 묵을 예정이다. 부모님은 피곤하셨는지 바로 침실로 들어가신다.
나는 정하와 함께 호텔 칵테일 바에 가서 한 잔 하기로 한다. 먼저 온 손님들이 테이블 두 개를 차지하고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고 있다. 먼저 진토닉을 음미하면서 테이블 베이와 워터프론트의 아름다운 야경에 취한다. 폭탄주 예거봄(Jagerbomb)과 데퀼라(Tequila)도 한 잔씩 맛본다. 이 칵테일은 먼저 레드 불(Red Bull)이라는 음료을 따른 술잔에 예거마이스터(Jagermeister)라는 술을 탄 것이다. 처음엔 달콤하고 뒤끝에 알코올을 느끼는 감미로운 맛이다. 데퀼라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혀끝에 소금을 약간 머금고 데퀼라를 단숨에 마신 다음 레몬 한 조각을 입술에 문 채 즙을 짜서 빨아먹는다.
백포도주와 데퀼라 선라이즈(Tequila Sunrise)도 한 잔씩 시킨다. 백포도주는 특유의 포도향에 담백하면서도 드라이(달지 않은 맛)한 맛이 난다. 데퀼라 선라이즈는 1960년대 멕시코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아침 일출을 연상케 한다는 이름의 유래를 가진 칵테일이다. 먼저 술잔에 그레나딘(Grenadine) 시럽을 떨어뜨리고 오렌지 쥬스와 데퀼라를 섞어서 만든다. 오렌지 쥬스의 노란색과 석류 시럽의 빨강색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비중의 차이로 아래로 갈수록 붉은색이 진해지는 칵테일이다. 처음에 마실 때는 쥬스 같지만 마시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흠뻑 취하는 까닭에 일명 '레이디 킬러' 또는 '버진 킬러'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이 칵테일은 남자가 흑심을 품은 여자에게 권하는 술이렷다.
밤이 이슥해서 객실로 돌아오니 배가 출출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한국에서 컵라면을 가지고 오지 않았던가! 컵라면을 하나 먹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역시 라면은 국물맛이 얼큰한 한국 라면이 최고다.
욕실에서 대충 씻고 침실로 들어가 여로에 지친 몸을 누이다. 케이프 타운에서 맞이한 첫날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2007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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