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가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 고려산(高麗山, 436m)으로 향했다. 고려산에는 마침 진달래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고려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진달래를 보러 온 등산객들로 붐볐다. 사람들이 한산해진 늦은 오후에 고려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려산 정상
고려산 진달래능선
고려산 진달래능선
고려산 진달래 군락지
고려산 진달래 군락지
고려산 정상에서 서쪽의 낙조봉(落照峰, 350m)으로 이어지는 일명 진달래능선에는 이제 막 진달래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고 있었다. 진달래가 만개한 진달래능선 북쪽 산기슭은 진분홍 물감을 쏟아부은 듯했다. 진달래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내 마음도 붉게 물들어 왔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송해면에 걸쳐 있는 고려산의 원래 이름은 오련산(五蓮山)이었다. 몽골이 침략했을 때 고려왕조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고려산이란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산은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출생지라는 설도 있다. 낙조봉 낙조대(落照臺) 해넘이 풍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낙조봉 남쪽 기슭의 적석사(積石寺)는 낙조대 일몰과 함께 강화팔경 중 하나이다.
진달래능선에서 필자
오련지
고려산 정상 북쪽 산기슭에는 오련지(五蓮池)가 있다. 오련지는 연못이라기보다는 우물에 가까왔다. 오련지 안을 들여다보니 가뭄 탓인지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오련지에는 전설이 있으니.....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394~491)의 명을 받은 인도의 고승 천축조사(天竺祖師)는 동자승과 함께 지금의 함경북도에서 남쪽으로 내려 오면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았다. 혈구군(穴口郡, 강화도)까지 내려온 조사는 밤이 되도록 섬을 샅샅이 뒤졌으나 절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조사는 염불을 하면서 선정에 들었다. 바로 그때 백발노인이 나타나 '날이 밝으면 이 산(고려산) 꼭대기로 올라가 보라. 오련(五蓮)을 보거든 허공에 날리라'고 현시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조사가 산에 올라가 보니 신기하게도 정상 부근에 다섯 곳의 연못이 있었다. 연못에는 각각 청련(靑蓮)과 적련(赤蓮), 황련(黃蓮), 백련(白蓮), 흑련(黑蓮, 墨蓮)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조사는 다섯 가지 연꽃을 꺾어서 하늘 높이 날렸다. 적련과 황련, 백련, 흑련은 조사가 바라는 절터에 떨어졌으나 청련만은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조사는 붉은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적련사(赤蓮寺, 지금의 積石寺), 노란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황련사(黃蓮寺), 흰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백련사(白蓮寺), 검은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흑련사(黑蓮寺, 墨蓮寺)를 지었다. 푸른 연꽃이 떨어진 터에도 절을 짓고는 원하던 곳이 아니라 하여 '원통암'이라 하였으니 곧 청련사(靑蓮寺)이다.
백련사
백련사 극락전
고려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로 비구니 사찰인 백련사에 들렀다. 백련사 바로 앞 전통찻집 마당에는 수령이 450살이 넘은 느티나무 보호수가 멋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또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 서로 다정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1997년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높이 30m, 둘레 5.5m에 이르렀다.
백련사 마당에는 사월 초파일을 앞두고 형형색색의 연등(燃燈)이 걸려 있었다. 백련사의 전각들은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口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었다.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불법(佛法)을 설한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로 봉안한 전각을 극락전 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 한다. 무량수전(無量壽殿), 미타전(彌陀殿), 수광전(壽光殿)도 아미타불을 주불로 봉안한 전각이다. 전에는 관음전(觀音殿)이었다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게 되면서 당호를 극락전으로 고쳤다고 한다.
극락전 불단에는 본존불(本尊佛)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좌우 협시불(脇侍佛)로 모셨다. 벽면에는 아미타후불탱화(阿彌陀後佛幀畵),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현왕도(現王圖), 신중도(神衆圖) 등의 탱화도 함께 봉안했다. 원래 본존불 자리에 봉안되어 있던 철조아미타불좌상(鐵造 阿彌陀佛坐像, 보물 제994호)은 안타깝게도 1989년 12월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극락전 한쪽으로 튀어나온 다락 형태의 전각 처마에는 옹호각(擁護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옹호각은 선방을 겸한 인법당(因法堂)으로 지장탱과 신중탱을 모셨다. 인법당은 큰 법당이 없는 사찰에서 승려가 머무는 승방에 불상을 함께 봉안한 전각이다.
한때 백련사에는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해 새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했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했을 정도면 그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련사 부도전
부도
부도와 사리비
백련사 부도전(浮屠殿)은 삼성각(三聖閣) 오른쪽에 있었다. 부도전에는 백련사를 중건한 성탄(性坦) 비구니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로 의해당(義海堂) 처활대사(處活大師)의 사리비(舍利碑)와 부도(浮屠)가 나란히 모여 있었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6대 법손(法孫)인 의해당의 부도는 소박했다. 사각의 굄돌(飼石) 위에 배흘림 몸돌(塔身)을 올려 놓았고, 지붕돌(屋蓋石)에는 보주(寶珠)가 올려져 있었다.몸돌에 '신녀o지탑(信女o之塔)'이라 새겨진 것은 신도의 부도로 추정된다. 나머지 1기의 부도는 몸돌에 '여화당(麗華堂)'이라는 당호가 새겨져 있었다.
해는 이미 저물어 어둑어둑해져 오고 있었다. 고려의 숨결을 느끼면서 산을 내려가다.
201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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