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설악산 서북능선을 가다 1(한계령~한계삼거리)

林 山 2015. 6. 18. 17:15

설악산(雪嶽山) 서북능선(西北稜線)으로 떠나던 날 내 가슴은 설레었다. 오랜만에 설악산 서북능선을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으리라. 2001년도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서북능선 마룻금을 걸어본 이후 실로 14년만에 다시 온 것이다. 


이른 아침 한계령(寒溪嶺)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한계령 휴게소 포장마차에서 주먹밥을 한 덩어리 사서 어묵 국물과 함께 아침 끼니를 해결했다. 먼 산길을 가야 하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서북능선을 향해 떠났다.  


설악산 한계령 등산로 입구


백두대간(白頭大幹) 마룻금을 밟으며 설악루와 바로 위에 있는 한계령탐방지원센터를 지났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게 끼어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한계령


전망이 좋은 암봉에 올라서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히면서 한계령과 칠형제봉(七兄弟峰), 그리고 점봉산(點鳳山, 1,424m)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칠형제봉에는 안개가 띠처럼 걸려 있었다. 44번 국도 설악로는 한계령을 넘어 오색골을 뱀처럼 구비구비 돌아가고 있었다. 선경처럼 드러난 한계령 일대의 웅장하고 멋진 경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내가 신선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계령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노래 양희은-  


가수 양희은이 부른 노래 '한계령'이다. 설악산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이 노래 가사의 원작 시는 정덕수 시인의 작품이다. 원작 시는 노래보다 더 절절하다. 나도 서북주릉(西北紬綾)에서 한 줄기 떠도는 바람이고 싶다. 그래, 가자. 서북주릉으로! 


한계령에서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 육천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 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정덕수-   


정향나무꽃(야생 라일락)


마침 설악산에는 정향(丁香)나무(Syringa velutina var. kamibayashii)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향나무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 야생 라일락이라고도 한다. 1개의 꽃을 옆에서 보면 '못 정(丁)'자로 보이고, 꽃에 향기가 있어 정향나무라고 한다.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정향과는 다르다.


라일락은 정향나무를 원종으로 삼아 미국에서 개량된 나무다. 1947년 미 군정청 소속 식물채집가 엘윈 M. 미더(Elwin M. Meader)는 도봉산에서 정향나무의 씨를 채취해서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는 정향나무를 개량해서 만든 새로운 품종에 당시 식물자료 정리를 도왔던 한국인 타이피스트의 성을 따서 미스김 라일락(Miss Kim Lilac, Syringa patula 'Miss Ki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스김 라일락은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역수입되어 정원수나 가로수로 많이 식재되었다. 


정향나무는 꽃이 아름다워 정원수로 인기가 있다. 향기가 좋아 향료를 추출하기도 하며, 밀원식물로도 이용 가치가 크다. 수피는 민간에서 건위제로 쓰이기도 한다.  


한국에는 정향나무와 같은 종에 흰꽃이 피는 흰정향나무, 털이 많은 털개회나무, 울릉도에 나는 섬개회나무(var. venosa) 등이 있다. 같은 수수꽃다리속(Syringa)에는 꽃개회나무와 수수꽃다리, 개회나무 등이 있다.


귀때기청봉과 상투바위


백두대간 1307봉에서 바라본 귀때기청봉과 서북능선


설악산 서북능선


서북능선 1397봉과 1456봉

      

1307봉에 올라서자 서쪽의 비로소 귀때기청봉(耳靑峰, 1,578m)에서 동쪽의 1456봉에 이르는 서북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1307봉 정상에는 붉은병꽃과 정향나무꽃이 피어 있었다. 장대한 서북능선과 산봉우리들, 기암절벽과 깊은 계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연의 위대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악산 서북주릉(西北主稜) 또는 서북능선은 서쪽 끝의 안산(鞍山, 1,430m)에서 시작해서 대승령(大勝嶺, 1,210m), 귀때기청봉, 끝청봉(末靑峰, 1,604m)을 지나 중청봉(中靑峯, 1,672m)으로 이어지는 약 13km의 구간을 말한다. 설악산에서 가장 긴 능선이다. 서북능선은 남설악과 내설악을 가르는 경계이기에 두 설악을 두루 다 감상할 수 있다.


귀때기청봉은 그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귀때기청봉은 자기가 제일 높다고 으스대다가 대청봉과 중청봉, 소청봉 삼형제에게 귀싸대기를 맞아 지금의 저 자리로 나가떨어졌다고 한다. 귀때기청봉의 남쪽에 솟아 있는 암봉은 상투바위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왼쪽 계곡은 도둑바위골, 오른쪽 계곡은 석고당골이다.


1307봉 바로 앞에 있는 봉우리는 1310봉, 그 뒤에 솟은 암봉에서 백두대간과 서북능선이 합류한다. 저 암봉에서 백두대간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청봉(大靑峰, 1,708m)을 향해서 뻗어간다.    


함박꽃나무꽃


백당나무꽃


물참대꽃


갈 길이 멀어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1307봉에서 1310봉에 이르는 백두대간 산기슭에는 활짝 핀 함박꽃나무, 백당나무, 물참대 꽃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향그러운 꽃향기들이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에 실려오는 듯했다.   


1355봉의 도둑바위와 삿갓바위


1310봉에 올라서자 1355봉의 도둑바위와 삿갓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의 바위는 마치 도둑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복면을 쓴 것처럼 보여서 도둑바위라고 했을까? 도둑바위를 상승바위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도둑바위골은 저 바위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른쪽의 삿갓바위는 투구나 버섯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버섯바위, 투구바위라고도 불린다.     


흰철쭉(백철쭉)


이제 막 시들기 직전의 흰철쭉을 만났다. 설악산의 철쭉 잔치도 끝나가고 있었다. 원산지가 한반도와 만주, 우수리인 흰철쭉의 학명은 Rhododendron schlippenbachii Maxim. for. albiflorum이다. 우리나라 동해안의 암석 위에 핀 흰철쭉을 러시아 해군 슈리펜바키(Schlippenbachii)가 처음으로 일본과 유럽에 전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종명에 붙였다고 한다. 흰철쭉의 꽃말은 정열, 명예이다.


서북능선 한계삼거리


한계삼거리에서 바라본 백운동계곡과 용아장성능선, 공룡능선


1310봉을 지나 드디어 백두대간과 서북능선의 등산로가 만나는 한계삼거리에 올라섰다. 귀때기청봉은 여기서 서북쪽으로 1.6km, 대승령(大勝嶺)은 7.7km의 거리에 있다. 대청봉은 여기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다. 


한계삼거리 정상에 서서 내설악을 바라보았다. 비로 앞 작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왼쪽 계곡이 곡백운(曲白雲), 오른쪽 계곡이 직백운(直白雲), 그 사이에 있는 계곡이 제단곡(祭壇谷)이다. 제단곡이 흘러든 직백운과 곡백운이 만나 백운동(白雲洞)을 이룬다. 백운동은 구곡담계곡(九曲潭溪谷)으로 흘러들고, 구곡담계곡은 가야동계곡(伽倻洞溪谷)과 만나 백담계곡(百潭溪谷)으로 흘러든다. 


구곡담계곡 건너편으로 용아릉(龍牙稜), 가야동계곡 뒤로 공룡릉(恐龍稜)이 거대한 병풍을 친 것처럼 험준한 장성을 이루고 있었다. 기암절벽과 깎아지른 듯한 암봉들로 이루어진 공룡능선과과 용아장성릉의 우람하고, 거칠고, 날쌔고, 거침없는 산세는 말문을 막히게 했다. 신선대-칠형제봉-1275봉-큰새봉-나한봉-마등령으로 뻗어가는 장엄한 공룡능선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저항령(低項嶺, 1,100m) 너머 백두대간의 저 끝에는 황철봉(黃鐵峰, 1,319m)이 솟아 있었다.       


인가목꽃


한계삼거리에는 분홍색 인가목화(人伽木花)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인가목은 꽃 모양이 해당화와 아주 비슷해서 산해당화라고도 한다. 들장미라 부르기도 하는데..... 들장미는 야생 장미를 통틀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인가목은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과 강원도 이북의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희귀보호식물이다.  



큰앵초꽃


서북능선에는 귀엽고 예쁜 큰앵초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설악산에서 큰앵초를 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다행이었다. 앵초속(櫻草屬, Primula) 식물은 한국, 중국 동북부, 일본 등 고위도 지역의 고산지대에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앵초속 식물에는 앵초(櫻草, Primula sieboldii E. Morren)와 큰앵초(Primula jesoana Miq)가 있다. 꽃줄기와 잎자루에 긴 털이 많은 것을 털큰앵초(Primula jesoana var. pubescens)라고 한다.


큰앵초는 30cm 정도 올라온 꽃줄기에서 화려한 주홍색의 꽃이 핀다. 앵초의 잎은 작은 장타원형이고, 큰앵초는 단풍잎처럼 크고 넓으며 끝이 갈라져 있다. 큰앵초는 꽃이 아름다워서 관상용으로 많이 심고, 어린순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 큰앵초의 뿌리 앵초근(櫻草根)은 민간에서 기침, 가래, 천식의 치료에 쓰기도 한다. 


한계삼거리를 떠나 서북능선의 정향나무와 인가목, 큰앵초 등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감상하면서 끝청봉으로 향했다. 서북주릉의 한 줄기 떠도는 바람이 된 산길 나그네의 마음은 벌써 대청봉에 가 있었다. 


2015.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