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江華島) 고려산(高麗山) 가는 길에 서해안 최북단의 섬 교동도(喬桐島)를 돌아보았다. 몇 년 전 강화도에 왔을 때 교동도라는 섬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교동도에 꼭 한번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교동대교
교동대교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삼거리에 있는 해병대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발급받은 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교동대교(喬桐大橋)를 건넜다. 2014년 7월 1일 개통된 교동대교는 길이 3.44㎞로 904억원의 사업비가 들어갔다고 한다.
교동도는 북부 해안선이 바로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이기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섬이다. 교동대교 양쪽 끝에도 해병대 초소가 있었다. 해병대원들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초소를 지나면서 이곳이 분단의 현장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다. 아직까지도 동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고 반목하는 현실이 참으로 슬프면서도 부끄럽다. 새들도 자유롭게 오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새만도 못한 인간들이란 비아냥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쥐와 닭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인간들이 있지 않은가!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있는 섬이다. 섬 전체가 교동면을 이루고 있다. 면적은 46.25㎢, 인구는 약 3천여 명이다. 1970년대 이후 점차 인구 감소 현상을 보이고 있다.
섬의 동쪽으로는 강화군 양사면과 내가면,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와 미법도, 서검도가 있다. 서쪽과 북쪽으로는 불과 2∼3㎞의 바다 건너 북한의 황해도 연안군과 배천군이 있다. 섬의 북쪽 해안에서는 황해도 땅이 바로 앞에 보인다. 북벽 망루에 오르면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의 송악산도 볼 수 있다. 실향민들은 섬의 제일봉인 화개산(華蓋山, 260m)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기도 한다.
교동도는 고구려시대 고목근현(高木根縣)이었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喬桐)으로 변경되어 혈구현(穴口縣)에 속하였다. 달을참(達乙斬),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 등으로도 불렸다. 달을참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에도 교동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서해안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교동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을 설치했다.
교동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또, 외세의 침범이 잦았기 때문에 섬에는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유적으로는 고려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華蓋山城址), 고려 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慶源殿), 조선시대 축조된 읍성지(邑城址),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喬桐鄕校), 교동구현허(喬桐舊縣墟), 철종잠저소(哲宗潛邸所), 봉수대(烽燧臺), 단묘(壇廟) 등이 있다.
섬의 주산은 화개산이다. 그외 봉황산(75m), 율두산(89m), 고양이산(35m), 수정산(75m)도 있다. 대부분 낮은 구릉들이다. 남북 분단 이전에는 화암효종(華菴曉鐘), 빈장모범(濱章暮帆), 잠두목적(蠶頭牧笛), 말탄어화(末灘漁火), 수정낙조(水晶落照), 호포제월(虎浦齊月), 인산관창(仁山觀漲), 진망납량(鎭望納凉) 등 교동팔경이 있었다.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교동도에서 생산되는 쌀은 교동미라 하여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인삼 재배와 왕골공예품도 유명하다. 왕골공예품으로는 화방석, 꽃삼합, 광주리, 손가방, 화문석 등이 있다.
교동 읍내리 비석군
화개사(華蓋寺)로 가다가 교동면 읍내리 비석군(碑石群)에 들렀다. 비석군은 교동향교와 화개사 갈림길에 있었다. 원래 이 비석들은 교동양조장 앞 비석거리에 있던 것을 1970년 옛 교동의 관문 남산포길로 이전했다가 1991년에 다시 교동향교 입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교동의 수령이었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겸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도호부사(都護府使), 방어사(防禦使) 등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선정비(善政碑) 등 총 33기가 세워져 있었다. 앞에 있는 3기는 거사대(去思臺) 양식의 비석이었다.
조선시대 후기는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시대였다. 지방의 수령 자리도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나갈 수 없었다. 돈으로 벼슬을 산 지방 수령들은 뇌물 비용을 뽑기 위해 탐관오리가 되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지방 수령들은 임기를 마치면 자신의 통치를 찬양하는 비석을 세워주기를 원했다. 학정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수령이 떠날 때가 되면 또 선정비를 세워주기 위해 돈과 노동력을 바쳐야만 했다. 포악한 탐관오리도 선정비에는 훌륭한 목민관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영세불망비나 선정비에는 백성들의 한과 눈물이 서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화개사
화개사 부도탑
화개사 소나무 보호수
화개사 법당
화개사는 화개산 서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인 화개사는 고려시대 때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화개산 남쪽에는 화엄사(華嚴寺)와 안양사(安養寺)라는 두 절이 있었다. 안양사는 얼마 안가서 폐사되고, 화엄사는 화개산 북쪽으로 옮겨져 재운암(載雲菴)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곧 되돌아왔다. 1890년대에 화엄사는 화개암(華蓋庵)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 암자가 바로 화개사의 전신이다.
1937년 3월 안석연(安錫淵)은 화개암을 답사하고 '화개암지(華蓋庵誌)'를 썼다. '화개암지'에는 '화개암은 법당 1동과 요사 1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다란 법당은 기와가 깨지고 기둥도 기울어 보수가 필요하였으나, 재정 여건이 어려워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불상과 불화는 요사에 옮겨져 있었다. 3칸(間) 22평의 요사에는 철제아미타불좌상 2점, 철제관세음보살좌상 1점과 후불탱화, 미타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신중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리고 절 소유의 토지는 답(畓)이 3,663평, 대지 163평으로 합계 3,826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동도는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인연이 많은 섬이다. 이색은 자신의 문집 목은집(牧隱集)에서 '14세 때 친구 두 명과 함께 책을 싸들고 바다 건너 교동 화개산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고 쓰고 있다. 교동을 주제로 쓴 이색의 한시(漢詩)에 ‘화개산’, ‘승방(僧房)’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공부한 곳은 화개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2년에 간행된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도 이색이 화개암에서 공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동을 좋아했던 이색은 화개산을 고려 8대 명산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화개산 정상 북쪽 화개산성 끝자락에는 갈공사지(葛空寺址)가 있다. 옛 갈공사 터다. 무학대사, 낙공선사, 지공선사도 한때 갈공사에 머물면서 화개사로 공부하러 다녔다고 한다.
화개사 경내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도(浮屠)가 하나 있었다. 간결한 형태의 작고 아담한 석종형(石鍾形) 부도였다. 기단부(基壇部)는 없고, 탑신부(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 상륜부(相輪部)의 보주(寶珠)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몸돌에 새겨진 글씨를 찾을 수 없어 부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려시대 이래 수백 년 동안 교동 주민들에게 불교 신앙의 중심지였을 화개사는 지금은 퇴락한 듯 보였다. 비구니 스님은 보이지 않고 200살도 더 먹은 늙은 소나무 한 그루만 빈 절간을 지키고 있었다.
교동향교 홍살문
수령변장하마비
교동향교
명륜당
노룡암
대성전
대성전 선성선현위패 봉안위차도
성전약수
화개산 남쪽 산기슭에 있는 교동향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는 화개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향교 입구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세워져 있었다. 홍살문은 원주형 주춧돌 위에 두 개의 둥근 나무기둥을 세운 뒤 두 개의 사각기둥을 위아래로 짜맞춰서 연결하였다. 삼지창(三枝槍) 형태의 가운데 홍살에는 삼태극(三太極) 문양의 장식을 두었고, 그 좌우에는 각각 7개의 홍살이 꽂혀 있었다.
홍살문 앞에는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향교에는 공자(孔子)를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이 있기에 지방의 수령이나 변방을 수비하는 장수라도 말에서 내리는 것이 당시의 예법이었다.
홍살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 교동향교 외삼문(外三門)에 이르렀다. 바깥담에 세 칸으로 세운 외삼문은 솟을삼문 형식이었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가서 맨처음 만나는 건물은 향교 부설 강학당(講學堂)인 명륜당(明倫堂)이었다. 명륜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외삼문과 명륜당 사이의 마당은 매우 좁아서 상당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동재(東齋), 서쪽에는 서재(西齋)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ㄱ자 형태의 동재는 부엌과 온돌방을 갖춘 앞면 3.5칸, 옆면 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서재도 ㄱ자 형태의 건물이었다. 앞면 2칸, 옆면 3칸 규모의 서재는 동재보다 조금 작은 편으로 온돌방과 고방(庫房)만 갖춘 구조였다.
명륜당 뒤편에는 음각으로 명문을 새긴 노룡암(老龍巖)이라는 작은 바위가 세워져 있었다. 노룡암은 원래 교동현 동헌 북쪽뜰 층계 아래에 있던 것을 1987년에 교동향교로 옮겼다.1717년(숙종 43)에 충민공 이봉상(李鳳祥)이 '노룡암' 석자를 새긴 뒤, 1773년(영조 49)에 그의 손자 이달해(李達海)가 다시 글을 지어 새겼다. 1820년(순조 20)에 통어사 이규서는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 灑風, 호거암 장군이 풍기를 깨끗이 하였다)' 일곱 글자를 더 새겨 넣었다.
명륜당 바로 뒤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올라가 내삼문(內三門)으로 들어섰다. 내삼문도 솟을삼문 형식이었는데, 머리를 숙여야 할 만큼 낮고 작았다.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 내삼문 안쪽은 제향공간(祭享空間)인 대성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성전은 앞면 5칸, 옆면 1.5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에 단청 건물로 지붕 양쪽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교동향교에서 유일하게 초익공(初翼工) 양식의 공포(栱包)를 갖춘 건물이었다. 초익공은 기둥 사개에 창방과 직교하여 익공 하나를 물려 보 밑을 받치는 양식이다. 대성전 앞에는 희생단(犧牲壇)으로 짐작되는 방형의 판석이 있었다. 대성전의 동쪽에는 동무(東廡), 서쪽에는 서무(西廡)가 있었다. 동서무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민도리 맞배집이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五聖)과 송조 2현(宋朝二賢) 등 16현(十六賢)을 배향(配享)하고, 동무와 서무에는 해동 18현(海東十八賢)의 위패를 각각 반씩 나누어 봉안했다. 1949년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대한 반성으로 중국 16현 가운데 주자(朱子, 朱熹)와 정자(程子, 程頤)를 제외한 14현을 매향하고, 해동 18현을 높여 배향했다. 춘추석전(春秋釋奠)도 폐지하고, 공자의 탄생일인 음력 8월 27일에만 석전을 봉행했다. 1952년부터 공문십철(孔門十哲)과 송조 4현은 복위되고, 춘추석전도 다시 봉행하고 있다.
서무에 들어가서 보니 북쪽 벽에 대성전 선성선현위패 봉안위차도(大成殿先聖先賢位牌奉安位次圖)가 걸려 있었다. 오성위(五聖位)에는 중앙 최고위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 그 아래 동쪽에 연국복성공안자(兗國復聖公晏子)와 기국술성공자사(沂國述聖公子思), 서쪽에 성국종성공증자(郕國宗聖公曾子)와 추국아성공맹자(鄒國亞聖公孟子)가 들어가 있었다.
동벽십현배위(東壁十賢配位)는 해동의 홍유후 설총(弘儒候薛總)을 비롯해서 문성공 화원 안향(文成公晦轅安珦),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 寒喧堂 金宏弼), 문정공 정암 조광조(文正公 靜菴 趙光祖), 문순공 퇴계 이황(文純公 退溪 李滉), 문성공 율곡 이이(文成公 栗谷 李珥), 문원공 사계 김장생(文元公 沙溪 金長生), 문경공 신독재 김집(文敬公 愼獨齋 金集), 문정공 동춘당 송준길(文正公 同春堂 宋浚吉), 송조의 휘국공 회암 주희(徽國公 晦菴 朱熹) 등 모두 10명이었다.
서벽십현배위(西壁十賢配位)에는 해동의 문창후 고운 최치원(文昌候 孤雲 崔致遠)을 비롯해서 문충공 포은 정뭉주(文忠公 圃隱 鄭夢周), 문헌공 일두 정여창[文獻公 一蠹 鄭汝昌),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문정공 하서 김인후(文正公 河西 金麟厚), 문간공 목암 성혼(文簡公 牛溪 成渾), 문열공 중봉 조헌(文烈公 重峯 趙憲), 문정공 우암 송시열(文正公 尤庵 宋時烈), 문순공 남계 박세채(文純公 南溪 朴世采), 송조의 예국공 명도 정호(豫國公明道程顥) 등 10명이 들어가 있었다.
제기고(祭器庫)는 대성전의 동쪽에 있었다. 홑처마에 납기둥, 민도리 형식의 소박한 건물이었다. 앞면 3칸, 옆면 1.5칸 규모로 맞배지붕에 풍판을 달았다.
교동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는 한편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화개산 북쪽, 지금의 고구리에 세워졌다. 1286년(고려 충렬왕 12)에 왕을 따라 원(元)에 들어간 안향(安珦)은 공자와 주자(朱子)의 상을 처음 그려왔다. 김문연(金文衍) 등은 중원 대륙에 들어가 선현과 72제자의 상을 그린 뒤 각종 제기와 악기, 육경(六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고려로 돌아왔다. 김문연 등은 서해를 통해 돌아오다가 교동도에 도착해서 기물과 책들을 교동향교에 잠시 보관했다가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조선시대인 1741년(영조 17) 강화부사 조호신(趙虎臣)은 교동향교를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옛 향교터는 고구리에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으로부터 전답과 노비 등을 지급받았으며, 훈도(訓導)가 배치되어 교생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현재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없다. 춘추석전은 해마다 봉행(奉行)되고 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향을 올린다. 향교의 운영은 1명의 전교(典校)와 여러 명의 장의(掌議)가 맡고 있다.
대성전 서쪽에는 성전약수(成殿藥水)가 있었다. 가뭄이 든 탓인지 약수는 물이 바싹 말라 있었다. 대성전 밑에서 약수가 발원한다고 해서 성전약수라고 불린다. 성전약수는 위장병과 아토피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향교의 유생들이 이 약수 덕분에 과거에 많이 급제했다고 전한다.
교동읍성
교동읍성 거북상
교동읍성 거북상
교동읍성 홍예문
홍예문 상부
교동읍성에 들어선 민가
교동읍성(喬桐邑城,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은 교동면 읍내리 남산포로 가는 길 어귀에 있었다. 읍성이 눈에 들어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읍성의 성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홍예문(虹霓門) 하나만 달랑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보존 정책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교동읍성은 1629년(인조 7)에 서해안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고을성으로 높이 약 6m, 둘레 약 430m 규모의 작은 성곽이었다. 교동읍성에는 동문 통삼루(統三樓), 북문 공북루(拱北樓), 남문 유량루(庾亮樓) 등 문루를 갖춘 세 곳의 성문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동문과 북문은 무너지고, 남문만 남았다. 남문은 1921년의 폭풍으로 무너졌으나 홍예문만은 천정 일부가 무너진 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어 군영의 본진이 주둔하기도 했다.
홍예문에 올라 옛날의 성안터를 바라보았다. 협소한 성안터에는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남산포 쪽으로는 벌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서녘 하늘에는 저녀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교동읍성을 뒤로 하고 귀로에 올랐다.
201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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