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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추평리 삼층석탑을 찾아서

林 山 2016. 1. 12. 12:15

충주시(忠州市) 엄정면(嚴政面) 괴동리(槐東里)에 있는 빌미산 백운암(白雲庵)을 돌아본 뒤, 백운암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추평리(楸坪里) 삼층석탑(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25호)을 찾았다. 추평리 삼층석탑은 천등지맥(天登支脈) 옥녀봉(玉女峰, 719m)에서 원곡천(院谷川)을 향해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 산발치 탑평(塔坪)마을 양지바른 곳에 세워진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추평리 삼층석탑에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도로변에 차를 세워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관광 충북', '관광 충주'는 구호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충청북도와 충주시에서는 외지에서 추평리 삼층석탑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주차시설을 시급히 갖추기 바란다.    


충주 추평리 삼층석탑


충주 추평리 삼층석탑


충주 추평리 삼층석탑


충주 추평리 삼층석탑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조(忠原縣條)의 엄정면 추평리에 해당하는 탑일리(塔一里)와 탑이리(塔二里), 지금의 추평리 탑평(塔坪) 마을은 삼층석탑에서 유래한 지명임이 확실하다. 석탑이 있으면 사찰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삼층석탑 주변의 민가와 논밭 일대, 이른바 추평리 사지(楸坪里寺址)에서는 주초석(柱礎石)과 자기(磁器), 고려시대 기와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곳에 있던 사찰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엄정사(嚴政寺)일 가능성이 크다. 추평리 사지의 암자터로 추정되는 삼층석탑 뒷산 8부능선에서도 많은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추평리 사지는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사방 약 1만평 규모로 추정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충주 지역의 청룡사(靑龍寺), 김생사(金生寺), 용두사(龍頭寺), 억정사(億政寺), 향림사(香林寺) 등과 함께 엄정사가 기록되어 있다. 청룡사지는 소태면 오량리, 김생사지는 금가면 유송리, 용두사지는 동량면 대전리, 억정사지는 엄정면 괴동리, 향림사지는 엄정면 용산리에서 각각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엄정사지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엄정사의 존재가 밝혀짐에 따라 엄정면과 엄정산의 지명이 엄정사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엄정사에 해당하는 사지는 추평리 사지 외에도 유봉리 사지와 신만리 사지가 있다. 세 곳 중 엄정사에 가장 근접한 사지는 추평리 사지이다. 옛날부터 추평리 사지가 있는 탑평 마을 삼거리 부근에 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추평리 삼층석탑의 기단부(基壇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수막새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이는 추평리 사지에 이미 통일신라 때부터 사찰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엄정사는 고려시대에 삼층석탑을 건립할 정도로 번창하였다. 배불정책(排佛政策)을 실시했던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엄정사는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비는 사찰인 자복사(資福寺) 지정을 받았다. 태종실록(太宗實錄) 7년 12월 2일 기사에 조계종(曹溪宗)의 양주(梁州, 양산) 통도사(通度寺)와 함께 천태종(天台宗)의 충주 엄정사(嚴正寺), 용구(龍駒, 용인) 서봉사(瑞峰寺) 등이 자보사로 지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엄정사는 당시 충주 지역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엄정사는 조선왕조의 혹독한 배불정책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07년 태종은 조계종(曹溪宗),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 법화종(法華宗), 총지종(摠持宗), 남산종(南山宗), 화엄종(華嚴宗), 도문종(道門宗), 자은종(慈恩宗), 중도종(中道宗), 신인종(神印宗), 시흥종(始興宗) 등 11종의 종파를 조계종, 천태소자종과 법화종을 합쳐 천태종(天台宗), 총지종과 남산종을 합쳐 총남종(摠南宗),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쳐 중신종(中神宗), 도문종을 흡수한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 등 7종의 종파로 통폐합시켰다. 1424년 세종은 7종의 종파를 다시 조계종과 천태종, 총남종을 합쳐 선종(禪宗), 화엄종과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쳐 교종(敎宗)으로 축소시켰다. 


태종에 이어 세종에 의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의 통폐합과 축소는 불교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종파 통폐합과 축소를 거치면서 양종 소속 사찰 및 승려 수와 전답은 극히 제한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왕조에서 몰수해 버렸다. 그 결과 선종은 사찰 18개소와 전답 4,250결(結), 승려 1,970명, 교종은 사찰 18개소와 전답 3,700결, 승려 1,800명만 남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극심한 탄압으로 불교 종단은 극도로 위축되어 이른바 불교 말법의 시대를 맞았다.


세종의 종파 통폐합과 축소는 충주 지역의 사찰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8년조에 '충주의 청룡사, 김생사, 용두사, 엄정사, 억정사, 향림사 등의 사전지(寺田地)를 부당하게 빼앗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처벌하지 않는 수령을 추핵(推劾)하여 아뢰라'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충주 지역의 사찰 사전지들을 약탈하던 자들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가신(家臣)과 노비(奴子)들이었다고 한다. 충주 지역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엄정사도 사전지를 약탈당한 뒤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엄정사는 조선왕조라는 불교 말법의 시대를 맞아 삼층석탑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2008년 충청대학교박물관 관계자들이 추평리 사지 주변을 시굴, 조사한 바 있다. 이때 도로 바로 아래 논에서 연화문(蓮花文)을 새긴 대석(臺石)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삼층석탑 아래에서는 탑의 기단부(基壇部)가 확인되었다.   


추평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갖춘 평범한 석탑이다. 전체적으로 층간 비례도 적당하여 안정감을 준다. 하층기단(下層基壇)과 하대갑석(下臺甲石)은 생략하고, 지대석(址臺石)과 하대저석(下臺底石) 위에 기단괴임을 놓고 단층기단(單層基壇)을 올렸다. 단층기단 위에는 갑석부연(甲石副椽) 없이 상대갑석(上臺甲石)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탑신괴임을 놓고, 3층의 옥신(屋身, 몸돌)과 옥개(屋蓋, 지붕돌)를 차례로 올렸다. 지대석과 하대저석 중 일부, 탑신 괴임 등은 석탑 축조 당시 원래의 부재(部材)가 아니라 보수 과정에서 새로 끼워 맞춘 것이다. 


상대갑석과 탑신괴임은 각각 2매로 되어 있다. 대개 탑신괴임은 초층 탑신부, 갑석부연은 기단의 너비와 비슷하다. 또, 상대갑석의 너비도 일반적으로 갑석부연보다 넓다. 따라서 탑신괴임은 갑석부연(甲石副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석탑의 보수 과정에서 상대갑석과 갑석부연이 뒤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각층의 탑신괴임이 생략된 것으로 보아 상대갑석과 갑석부연이 뒤바뀌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생각된다.


기단과 옥신의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탱주(撐柱)는 생략되어 있다. 옥개의 낙수면은 경사가 매우 급하며, 옥개받침(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합각부(合角部)가 뚜렷하고, 전각(轉角)을 살짝 들어올려 반전을 주었다. 옥개의 양쪽 끝에는 풍경원공(風磬圓孔)의 흔적이 또렷하다. 탑의 건립 당시 옥개에는 화려한 장신구들이 달려 있었을 것이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복발(覆鉢)로 보이는 부재가 남아 있다.


추평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갖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탑의 원래 위치도 불분명하다. 간략한 기단부와 두툼한 옥개석, 높은 처마면과 낙수면의 급경사 등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이다. 옥개석의 좌우 너비가 탑신석의 너비에 비하여 좁은 점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탑신석을 높게 마련하고, 우주의 모각(模刻)과 전각의 반전 등은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추평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추평리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 석탑의 양식을 고찰할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고려 태조 왕건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승과(僧科)를 실시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그 결과 전국에 많은 사찰이 창건되면서 석탑도 함께 조성되었다. 추평리 사지 가까운 곳에는 억정사지가 있어 두 사찰은 고려시대 이 지역 불교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곡저수지


원곡천 상류 원곡리 하일마을에 있는 원곡저수지(院谷貯水池)를 찾았다. 원곡저수지는 규모가 매우 작아서 원곡소류지(院谷小溜池)라고도 한다, 가뭄 탓인지 원곡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충주시 엄정면과 제천시 백운면,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의 경계 지점에 솟은 천등지맥 옥녀봉에서 서쪽으로 녹재고개와 갈기봉(550m), 갈미봉(595m, 관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의 하일골에서 남류하는 웃하일천과 외춘이고개의 외춘이골에서 남동류하는 다리실천은 하일마을 다리실에서 합류하여 원곡천이 된다. 원곡천은 엄정면 추평리와 괴동리 등을 거쳐 엄정면 목계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원곡저수지는 하일 앞들과 옥성마을 앞 공시매들 등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87년 1월 1일 착공하여 1992년 1월 1일 준공되었다.


서산에 해는 지고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원곡리 소림마을에서 원주시 귀래면 녹재마을로 넘어가기 위해 녹재고개에 올랐다. 녹재고개 북쪽의 가파르고 응달진 도로에는 얼음이 살짝 얼어 있었다. 녹재고개 넘는 것을 포기하고 귀로에 올랐다. 


2016.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