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527호인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을 보기 위해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백운암(白雲庵)을 찾았다. 백운암은 빌미산(352.2m)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조계종 소속 암자다. 빌미산은 천등지맥 옥녀봉에서 서쪽으로 갈라진 다음 갈기봉과 갈미봉을 지나 원곡천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 끝자락에 솟아 있다.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백운암 입구
엄정면사무소 소재지에서 531호선 지방도(내창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보면 괴동리 도로변에 백운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괴동리 들판을 가로지르는 논둑길로 들어선 다음 원곡천에 놓인 괴동교를 건너 빌미산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면 백운암이 나타난다.
백운암 전경
백운암(白雲庵)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백운암이 충주군 북쪽 태봉산(胎封山)에 있다고 하였다. 빌미산 남동쪽 산줄기 끝자락에 솟은 태봉(胎峰)에는 경종대왕태실(景宗大王胎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호)과 태실비(胎室碑)가 있다. 태봉 남쪽 가까운 곳에는 억정사지대지국사탑비(忠州億政寺址大智國師塔碑, 보물 제16호)가 있다.
백운암은 조선 후기 왕실 무녀인 진령군(眞靈君) 여대감(女大監)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886년 진령군은 인법당(因法堂)을 지어 법당 겸 요사로 사용했다. 1977년 요사를 따로 짓고, 법당을 대웅전(大雄殿)으로 편액하였다. 1991년 삼성각(三聖閣)을 건립하고, 요사를 수리하였으며, 1999년에는 주지 진송(眞松)이 대웅전을 재건하였다.
백운암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민비)가 충주로 피신했을 때 한 무당이 곧 환궁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예언대로 곧 환궁하게 되자 민비는 무당을 한양으로 불러 진령군 여대감의 벼슬을 내렸다. 어느 날 진령군의 꿈에 백의철불(白衣鐵佛)이 나타나 빌미산 동쪽 골짜기 아늑한 터에 안치해 달라고 하였다. 진령군은 꿈에서 본 그 자리에 백운암을 짓고 철조여래좌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설화와는 달리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인근의 대사찰이었던 억정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운암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 등이 있다. 백운암 소장 문화재에는 철조여래좌상을 비롯해서 1888년에 제작된 탱화 3점, 1965년에 제작된 탱화 3점, 반자(飯子) 1점이 있다. 반자는 '바라'라고 불려지는 징처럼 생긴 종의 일종으로 직경 43cm, 두께폭 10cm이다. 장식으로는 5개의 연과를 가진 자방이 있고, 그 주변에 12판의 연화문을 돌렸으며, 그 밖으로 3줄의 돌기선을 그었다. 반자에는 ‘乙亥二月十日寶林寺造衲飯子一口重拾四斤□□進士李仲衡(을해이월십일보림사조납반자일구중십사근□□진사이중형)’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백운암 대웅전
대웅전 편액
남향으로 앉아 있는 대웅전은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단층건물이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이다. 정면 기둥에는 부처의 덕을 찬송하는 주련(柱聯)이 걸려 있었다.
自在熾盛與端嚴(자재치성여단엄) 위광과 단정, 엄숙이 자재하시니
名稱吉祥及尊貴(명칭길상급존귀) 그 이름 상서롭고 존귀하게 불리리
如是六德皆圓滿(여시육덕개원만) 이와 같이 육덕이 두루 원만하시니
應當摠號薄加梵(응당총호박가범) 응당 모두 범천의 으뜸이라 부르리
대웅전 처마에 걸려 있는 '大雄殿(대웅전)' 편액은 퇴경당(退耕堂) 권상로(權相老, 1879∼1965)의 작품이다. 경상북도 문경 출신의 권상로는 1896년(건양 1) 김룡사(金龍寺)의 서진선사(瑞眞禪師)에게 출가하여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에서 사집과(四集科)와 사교과(四敎科),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였다. 대교과 수료 후 그는 불교 계통의 경흥학교(慶興學校), 성의학교(聖義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09년 불교원종종무원(佛敎圓宗宗務院) 찬집부장(纂輯部長)을 맡았다. 1911년에는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사장으로 1년간 재임한 뒤, 1918년부터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23년 불교사(佛敎社)의 사장, 1944년 불교총본산교학편수위원(佛敎總本山敎學編修委員)을 역임했다.
해방 후 권상로는 동국대학(東國大學)의 교수와 학장을 거쳐 1952년에는 동국대학교 초대총장에 취임했다.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文化勳章)을 받았다. 중앙불교연구원장(中央佛敎硏究院長), 대한불교조계종원로원장(大韓佛敎曹溪宗元老院長)도 역임했다. 사후에는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에 올랐다. 그의 저서에는 조선불교약사, 조선불교사, 삼국유사역강, 고려사불교초존, 한국불교사료, 한국사찰전서, 조선종교사, 조선선교사, 한국지명연혁고 등이 있다. 논문에는 능엄요초, 팔관회참고, 자학관규 등이 있다.
대웅전 법당
철불여래좌상(현재)
개금불사 당시의 철불여래좌상(출처 문화재청)
백운암 대웅전 법당 중앙의 불단에는 철조여래좌상 본존불(本尊佛)과 그 뒤에 후불탱화(後佛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지현동 대원사(大圓寺) 철조여래좌상(보물 제98호), 단월동 단호사(丹湖寺)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12호)과 함께 충주의 3대 철조여래좌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운암 철불상은 충주 3대 철조여래좌상 중 예술적, 조형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앉은 높이 90cm, 어깨폭 40cm, 가슴폭 70cm로 비교적 작고 아담한 편이다. 머리는 소라 모양의 나발(羅髮)이 촘촘히 박혀 있고, 정수리에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상호는 약간 길고 갸름하며, 코는 높고 오똑한 편이다. 표정은 원만하고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넘친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표현되어 있고,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감겨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어깨와 가슴은 넓고 당당하며 부피감이 느껴진다.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법의는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옆구리쪽으로 평행 원호(圓弧)를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양쪽 무릎을 덮고 있다. 부분적으로 번파식(飜波式) 옷주름이 보인다. 왼쪽 어깨에는 법의를 접어 높낮이가 다른 삼각형의 띠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을 짚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킨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음을 상징한다. 왼손은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무릎 위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린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다.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틀고,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에 올려 놓았다. 무릎 아래에는 부채꼴 옷주름이 깔려 있다.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의 몸통과 위팔 표면의 흔적을 보면 여러 조각을 나누어 주조한 뒤, 이어 붙인 것이 확인된다. 백운암 철불은 청양 장곡사(長谷寺)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 영암 도갑사(道岬寺)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평택 만기사(萬奇寺)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67호), 개성 적조사지(寂照寺址) 철조여래좌상, 포천 출토 철조여래좌상 등과 그 양식이 유사하다. 특히 그 양식이 유사한 것은 10세기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이다. 이것으로 보아 백운암 철불은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의 양식을 계승하고, 충주의 지역적인 특색이 더해져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운암 철불은 장곡사 불상보다 다소 늦은 고려시대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반기 각 지역에서는 같은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불들이 지역적 특색이 강한 유파를 형성하고 있다. 백운암 철불은 단호사 철불이나 대원사 철불로 이행되기 전 단계의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 이는 백운암 철불이 충주 철불의 유파를 형성하는 초기 양식임을 시사한다.
백운암, 대원사,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등은 당시 충주 지역에 철불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문화적 수준을 갖춘 호족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려 준다. 또한, 세 철불은 철의 산지였던 충주의 지역적인 특징과 함께 불상 제작 양식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한때 불상의 전면에 금칠을 하는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한 적이 있다. 2006년 불상을 보수할 때 개금과 녹을 걷어내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신중탱화
본존불 동쪽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화에는 제석도(帝釋圖), 제석범천도(帝釋梵天圖), 천룡도(天龍圖), 제석천룡도(帝釋天龍圖), 제석금강도(帝釋金剛圖), 39위신중도(三十九位神衆圖)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신중탱화에 등장하는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은 불교 고유의 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신들도 많이 섞여 있다. 이는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토속신들이 불교의 신으로 수용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신중탱화는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 바탕을 둔 39위신중도가 그 원형을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점차 민간신앙과 결합되면서 보다 많은 토착신들을 수용하여 104위신중도로 발전하게 된다. 한국의 신중탱화는 대예적금강신(大穢跡金剛神)을 중심으로 한 탱화, 제석천(帝釋天)과 대범천(大梵天)과 동진보살(童眞菩薩)을 중심으로 한 탱화,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탱화 등 네 가지 유형이 있다.
대예적금강신을 주축으로 한 탱화는 전체 화면의 3분의 1을 금강신이 차지하고 좌측에 제석천, 우측에 대범천, 아래에 동진보살을 도설(圖說)한다. 주위에는 성군(星君)과 명왕(明王), 천녀(天女) 등을 배치한다.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탱화는 3위의 신중을 중심으로 그 권속의 수는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좌측의 천상(天像)을 중심으로 이중 구조를 이루는 점이 이 탱화의 특징이다.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천신(天神)을 위쪽,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금강신장(金剛神將)을 아래쪽에 배치하기도 한다.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를 제석도(帝釋圖)라고도 하며, 모든 신중을 제석천의 주위에 배치한다. 제석도는 무장을 하지 않은 보살이나 왕의 모습으로만 표현되는 것과 무장을 한 신장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탱화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팔부신장(八部神將)과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 등 신장만을 배치하기에 신장탱화(神將幀畫)라고도 한다.
금강반야바라밀경 경탑
대웅전 서쪽 벽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경탑(經塔)이 걸려 있다. 이 경탑은 다층탑 형태의 도형에 금강반야바라밀경 경문을 절묘하게 배치하였다. 북방불교가 전파된 한자문화권에서는 경문의 전권을 탑형(塔形)의 도상 내부에 배치하는 경탑이 유행하였다. 경탑을 경만다라(經曼茶羅), 탑다라니(塔陀羅尼)라고도 한다. 다라니(陀羅尼, dha-rani)는 진언(眞言)으로 신주(神呪)를 의미한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대승불교의 근본을 이루는 경전으로 보통 금강경이라고 한다. 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 중 제9회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의 별역(別譯)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와 제자 수보리(須菩提)의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다. 선종에서는 육조 혜능(六祖慧能)이 이 경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가장 중요시한다.
금강경의 핵심은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이 모든 현상이 모양이 없는 것임을 직관할 줄 알면 곧 부처를 보는 것이요, 마음을 깨친 것이다)'라는 4구 18자에 다 들어있다고 한다. 금강경은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공사상(空思想)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혜능은 공사상을 '무상(無相)을 머리(宗)로 삼고, 무주(無住)를 몸(體)으로 삼으며, 묘유(妙有)를 팔다리(用)로 삼는다'고 한 줄로 정리하였다. 무상(無相), 고(苦), 무아(無我)~!
범종
대웅전 법당 한쪽에는 작은 범종이 종틀에 걸려 있다. 산길을 걷다가 절간의 범종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이 평화로와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불교에서는 범종소리를 듣는 순간만은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백운암 삼성각
삼성각 편액
삼성각 법당
칠성단의 칠성탱화
독성단의 독성탱화
산신단의 산신탱화
대웅전 서쪽에 자리잡은 삼성각(三聖閣)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三聖閣' 편액 글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다.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한 전각이다.
삼성각 법당 한가운데의 칠성단(七星壇)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그 서쪽의 독성단(獨聖壇)에는 독성탱화(獨聖幀畵), 동쪽의 산신단(山神壇)에는 산신탱화(山神幀畵)가 모셔져 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것으로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고도 하며, 도교적 민간신앙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이다. 북두칠성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이기도 하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재물, 재능 등을 관장하며, 농경시대에는 비를 내리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칠성신은 각각 북두제일(北斗第一) 자손만덕(子孫萬德) 탐낭성군(貪狼星君), 북두제이(北斗第二)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巨門星君), 북두제삼(北斗第三) 업장소제(業障消除) 녹존성군(祿存星君), 북두제사(北斗第四) 소구개득(所求皆得) 문곡성군(文曲星君), 북두제오(北斗第五) 백장진멸(百障殄滅) 염정성군(廉貞星君), 북두제육(北斗第六)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武曲星君), 북두제칠(北斗第七)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破軍星君) 등 맡은 바 그 역할이 있다. 요약하면 칠성신은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재물의 신이다.
불교에서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도교에서는 이 별을 자미대제(紫微大帝)로 신격화했다. 옛날에는 북극성이 모든 천체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이 별에서 신령스런 빛이 나온다고 해서 치성광(熾盛光)이라고 했다. 치성광여래를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일광보살)은 해,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 월광보살)은 달을 각각 신격화한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일월성수(日月星宿)를 권속으로 삼아 털구멍에서 치성광을 내뿜어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주며, 무병장수하고,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 이는 약사불과 그 역할이 비슷하다. 그래서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자, 자녀의 수명을 기원하는 이들이 치성광여래를 많이 믿었다.
칠성도는 보통 치성광여래와 일광여래, 월광여래 삼존불을 중심으로 상단에 칠여래, 하단에 칠원성군, 그리고 좌우에 삼태, 육성,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도상화한 것이다. 칠원성군의 중앙에 자미대제를 도설하는 경우도 있다. 칠원성군은 보통 도사상으로 그려진다.
산신단에 봉안된 산신도는 노송(老松)을 배경으로 신선풍의 산신이 호랑이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이다. 백발에 수염이 늘어진 산신은 붉은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인간과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진 호랑이는 매우 해학적이다.
산신은 불법 수호의 서원을 세운 호법선신(護法善神) 중 하나인 산왕대신(山王大神)으로 흔히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산신은 가람 수호신이자 산중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산신은 옛날 농경민들에게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豊産神), 유목민 또는 수렵민들에게 사냥감을 풍성하게 내리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신은 또 인간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고,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칠성과 마찬가지로 산신도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다. 도교(道敎) 또는 선교(仙敎)에서 유래한 산신은 무속(巫俗)의 대표적인 신이기도 하다. 또,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악숭배신앙이 강했다. 백제의 산신신앙을 비롯해서 신라에는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악신(四岳神)과 산천신(山川神)을 매우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제사를 관장하기도 했다.
산중의 왕은 호랑이였고,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의 신령이라 믿었다. 그래서 산신도에서 산신의 모습은 호상(虎像)과 신선상(神仙像)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바로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긴다'는 기록처럼 이미 고대로부터 산신의 형상을 호상이나 신선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제(山祭) 또는 산신제(山神祭)는 무속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다. 산에 묘지를 쓸 때 산신에게 고하는 예식은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산악회나 등산동호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산신에게 안전한 산행을 비는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심마니들도 산에 들어가기 전에 대물 점지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린다. 산신신앙은 이처럼 우리 민중들 사이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신도를 봉안하는 산신각(山神閣)은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다. 현존하는 산신도도 조선 후기 이전의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보아 사찰에 산신도를 봉안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산신도는 일반적으로 백발이 성성한 신선과 호랑이가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맹수인 호랑이를 용감하고 위엄있게 그리기보다는 해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많다. 때로는 백발수염의 신선 옆에 고양이처럼 귀엽고 우스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시대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친군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다. 산신도의 호상도 조선시대 민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수입 종교다.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은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신앙이었다. 이질적인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기존의 토착신앙과 모순과 갈등이 생기면서 신앙투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시대는 유교를 지도적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배불정책을 펼쳤던 시대였다.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당시 민중들의 광범위한 신앙의 대상이었던 칠성과 산신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 불교는 살아남아 세계 3대 종교가 되었고, 오랜 기간 한반도의 주류 신앙이었던 칠성과 산신은 불교 사찰의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포용과 관용 나는 이것이 불교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서쪽 독성단의 독성도에는 심산유곡의 아름드리 낙락장송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독성이 왼손에 주장자(柱杖子)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독성 주변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노송에는 송라가 표현되어 있다.
독성존자를 묘사한 독성도를 불교에서는 독수성탱(獨修聖幀) 또는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고도 하며, 보통 16나한도(十六羅漢圖)와 같은 구도법으로 그린다. 독성도에는 보통 산과 소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삭발 머리에 길고 흰 눈썹을 가진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종종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독성은 스승 없이 독수선정(獨修禪定)으로 진리를 깨달아 부처의 반열에 오른 성자다. 그래서 독성을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한다. 독성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독성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者)가 독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반존자는 옛날 천태산에서 스승 없이 홀로 도를 닦아 무상 진리의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독성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가 부처 없는 세상에 태어나 미륵불(彌勒佛)의 용화세계(龍華世界가 도래할 때까지 현세 머물러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역할을 맡은 존재라고 믿는다.
독성을 환웅(桓雄)이나 단군(壇君)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칠성과 산신을 각각 칠성각과 산신각에 안치하는 것처럼 독성각에 모신 독성은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단군이라는 것이다. 독성이 단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의 나반존자는 우리나라의 토착신앙을 수용하여 새로운 신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으로 독특한 독성신앙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불교가 핍박받던 말법의 시대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말법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다. 나반존자는 불자들 사이에 매우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독성 기도를 많이 올리고 있다.
백운암 요사
요사채 뒤편에 서서 원곡천 건너 장병산을 잠시 바라보다가 불교의 공사상을 생각하면서 백운암을 떠나다.
2016.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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