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백두대간 닭목령, 오장폭포, 아우라지 기행

林 山 2016. 12. 20. 18:03


강릉의 염전해변을 찾았다가 돌아가는 길에 백두대간 닭목령을 넘어서 가기로 했다. 강릉남대천과 병행하는 국도 35호선을 따라 남서쪽으로 가다 보면 오봉산(五峰山, 539m) 동남쪽 기슭의 오봉저수지를 만난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왕산천이 오봉저수지로 흘러드는 지점에서 지방도 415호선이 갈라진다. 국도 35호선은 삽당령을 넘어서 정선군(旌善郡) 임계면(臨溪面)으로 이어지고, 지방도 415호선은 닭목령을 넘어 왕산면(王山面) 대기리(大基里)와 정선군 여량면(餘糧面) 구절리(九切里)로 통한다. 


닭목령에서 발원하는 왕산천과 삽당령에서 발원하는 도마천 상류 지역은 강릉시 왕산면에 속한다. 왕산면은 백두대간 능경봉(陵京峰, 1,123m)에서 오봉산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중간에 솟아 있는 제왕산(帝王山, 841m)에서 따온 이름이다. 제왕산이라는 이름은 14세기 유혈 쿠데타로 왕권을 찬탈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고려 32대 왕인 우왕(禑王)이 이 산 기슭으로 유배되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인 1914년 조선총독부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임금 왕(王)'에 일왕을 상징하는 '日(일)'자를 덧붙여 '왕산(旺山)'으로 지명을 바꿔버렸다. 일제는 강릉시 연곡면 '신왕리(新王里)'라는 지명도 일왕을 상징하는 단어를 사용한 '新旺里'로 변경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왕산면 주민과 녹색연합의 줄기찬 요구로 행정안전부에서는 2006년이 되어서야 한자 지명 '旺山里'를 '王山里'로 개칭하였다.  
 

왕산면의 남서부 산악지대에는 두리봉-삽당령-석두봉-화란봉-닭목령-고루포기산-능경봉 구간의 백두대간이 통과한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백두대간을 홀로 종주할 때인 2001년 6월 26일 삽당령을 떠나 석두봉과 화란봉을 넘어서 닭목재로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백두대간 닭목령


백두대간 닭목령


닭목령에 올라서니 며칠 전 내린 폭설의 흔적이 역력했다. 도로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닭목령에는 '백두대간닭목령'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닭목령은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 왕산골과 대기리(大基里) 닭목이 사이에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는 고개이다. 닭목령은 고개의 모양이 닭목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닭목령을 닭목재, 한자로 계항치(鷄項峙)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닭목령 주변에는 닭목골이나 닭목이, 닭목교 등의 지명도 있다.


닭목령 북서쪽에는 서득봉(1,053m)과 고루포기산(1,238m)이 있고, 북동쪽에는 화란봉(1,069m), 남동쪽에는 석두봉(991m)이 솟아 있다. 고루포기산과 서득봉, 옥녀봉(1,146m)으로 둘러싸여 있는 안반데기는 고냉지 채소재배단지로 유명한 곳이다. 안반데기는 떡매로 떡을 칠 때 밑에 받치는 안반처럼 평평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기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노추산로로 이어진다. 대기리 일대를 흐르는 하천이 대기천(大基川)이다. 대기천은 배나드리교에서 황병산(黃柄山, 1,407 m)과 매봉(1,173 m) 사이에서 발원하는 송천(松川)으로 흘러든다. 지방도 415호선은 대기천과 송천이 흐르는 협곡을 따라간다. 송천의 심한 곡류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 오장폭포에 이르게 된다.  


오장산 오장폭포


오장산 오장폭포


오장폭포는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와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의 경계 지점에 솟은 노추산(魯鄒山, 1,322 m) 남서쪽 능선의 오장산(736m)에서 발원한 물로 조성한 인공폭포이다. 지방도 415호선 오장1교 바로 앞에 있어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오장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오장폭포는 경사 길이 209m, 수직 높이 127m이다.


노추산은 삽당령과 석두봉 사이의 백두대간에서 대화실산, 매봉산을 지나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솟아 있다. 노추산의 북쪽에는 조고봉(鳥高峰, 1,188 m), 남서쪽에는 상원산(上院山, 1,421 m), 남동쪽에는 덕우산(1,007 m), 동쪽에는 사달산(四達山, 1,184m) 등이 솟아 있다.  


노추산은 신라시대 설총(薛聰)과 조선시대 이이(李珥)가 이 산에서 학문을 닦아 중국 노(魯)나라와 추(鄒)나라의 기풍을 이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노추산 정상부 남사면 벼랑 아래에는 설총과 이이의 위패를 모신 이성대(二聖臺)가 세워져 있다. 이성대는 공자와 맹자 두 성인을 흠모한 이이의 후학 박남현이 지방 유림들의 도움을 얻어서 세웠다고 한다. 원래는 움막집이었으나 50여년 전에 목조 2층 건물로 새로 지었다. 가을에는 구절리 주민들이 이성대에서 제사를 지낸다.


'증수임영지'에는 '강릉부 서쪽 80리 왕산면 구절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설총과 이율곡이 이곳에서 글을 읽고 대유학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릉시사'에도 '신라 때 설총, 조선 때 이율곡이 학문을 닦아 크게 성공하였으므로 중국 노나라의 공자, 추나라 맹자의 기풍이 서려 있는 곳'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기록을 통해서 노추산이라는 지명이 노나라와 추나라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절골에 터만 남아 있던 대성사(大成寺)도 최근 복원되었다. 대성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절이다. 전국을 다녀 보면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절이 매우 많다. 원효대사가 그 많은 절들을 언제 다 창건했는지 참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하다.


오장폭포에서 좀더 하류로 내려간 송천은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餘糧里)에서 백두대간 금대봉(金臺峰, 1418.1m)에서 발원한 골지천(骨只川)으로 합류하여 흐르다가 북평면 나전리에서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오대천(五臺川)이 합류하여 남한강의 상류인 조양강(朝暘江)을 이룬다. 송천과 골지천 두물머리 나루터가 바로 정선아라리 '애정편'의 발상지인 아우라지이다. 아라리는 영월과 정선, 강릉 지방에서 전승되는 곡명이다. 


아우라지를 중심으로 옥갑산(玉甲山, 1,285m)과 왕재산(997.2m), 반륜산(半輪山, 1,010m), 염장봉(鹽藏峰, 676m), 고양산(高陽山, 1,151m), 상정바위산(1,006.2m), 남산(754m)이 병풍처럼 들러싸고 있다. 남산은 정선아라리의 가사 중 '앞 남산 뻐꾸기는 초성도 좋다. 세살 적에 듣던 목소리 변치도 않았네.'에 나오는 바로 그 산이다.


정선 아우라지


여량은 첩첩산중 정선에서도 이곳의 들이 넓어 양식이 남아도는 고장이라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아우라지는 송천과 골지천 두 물줄기가 합쳐서 어우러지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풍수지리에서 송천은 양수(陽水), 골지천은 음수(陰水)에 해당되는데, 여름 장마철에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그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아우라지는 사람과 소식을 차안과 피안, 이쪽저쪽으로 건네주고 전해주던 나루터였다. 아우라지는 또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목재를 실어나르던 뗏목터이기도 했다. 아우라지 뗏목터가 한창일 때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뱃사공들의 아라리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과 함께 나루터와 뗏목터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애닯은 사연들이 쌓이고 쌓였을까?


골지천과 송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양지바른 언덕에는 여송정(餘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여송정 앞에는 아우라지  처녀상과 정선아라리의 발상지를 기리기 위한 아우라지 비가 세워져 있다. 빗돌에는 아우라지 처녀의 애닯은 사연이 서려 있는 아라리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아라리 노래가락의 노랫말이 심금을 울린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나 좀 건네주오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올동백은 낙엽에나 싸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 나 못 살겠네


아우라지에는 사랑하는 처녀, 총각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1910년대 아우라지를 사이에 두고 유천리 양지마을(일설에는 가구미)에 사는 처녀와 여량에 사는 총각이 서로 사랑을 했다. 그들은 남몰래 싸리골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곤 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뱃사공 지서방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싸리골로 머릿기름에 쓰는 올동백을 따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밤 사이에 내린 소나기로 인해 물이 크게 불어나서 그만 배가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강가로 나온 처녀, 총각은 그저 서로 안타까운 눈길만 주고받으며 애만 태웠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무슨 까닭인지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 소리를 잘했던 뱃사공 지서방이 노를 저으며 두 사람의 애닯은 사연을 구성진 아라리 가락에 실어 부른 것이 바로 이 노래였다. 일설에는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는 구절은 총각이 불렀고,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라는 구절은 처녀가 불렀다고 한다. 총각과 함께 올동백을 따러가기로 했던 처녀가 바로 아우라지 처녀상의 주인공이다. 


아우라지 처녀상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1956년에는 신부가 탄 가마를 싣고 가던 나룻배가 뒤집혀 신부가 물에 빠져 죽은 일도 있었고, 뗏목을 타고 가던 총각이 익사하자 그 총각과 혼인을 약속했던 처녀가 절망한 나머지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 이에 여량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은 처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두물머리 언덕에 아우라지 처녀상을 세워 주었다는 것이다.


정선 아우라지


정선아라리 중에서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는 가사가 들어있는 노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아우라지에 왔으니 정선아라리를 배워보는 것도 좋겠다. 정선아라리에는 '긴 아라리'와 '엮음 아라리'가 있다. 두 아라리 모두 가사가 매우 길다. '긴 아라리'는 첩첩산중 정선의 산세를 떠올리며 소리를 길게 끌어가면서 구성지게 불러야 한다. 아라리를 부르다가 가사가 막히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부른다. 정선아라리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서양음악의 후렴과는 달리 덧붙임 소리다. '엮음 아라리'는 서양음악의 랩처럼 빠르게 부른다. 되도록 호흡을 멈추지 않고 한번에 계속 이어서 부르는데, 마지막 두 소절의 가사는 긴 아라리 가락으로 불러야 한다. '긴 아라리' 가사를 한번 음미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간다지 못 간다지 얼마나 울었나 송정암 나루터가 한강수 되었오
개구장가에 포름포름에 날 가자구 하더니 온 산천이 어우러져도 날 가자구 안하네
그대 당신을 사모하다가 골수에 든 병 화타 편작이 치료한들 일어날 수 있나
금도 싫고 은도 싫고 문전옥답 내 다 싫어 만주벌판 신경(新京) 뜰을 우리 조선주게
꼬치밭 한 골을 못 매는 저 여자가 이마 눈썹은 여덟 팔(八)자로 잘 가꾸네
꽃 본 나비야 물 본 기러기 탐화봉접(探花蜂蝶) 아니냐 나비가 꽃을 보고서 그냥 갈 수 있나
나비 없는 강산에 꽃은 피여 뭣하며 당신 없는 요 세상 단장하여 뭣하나
날 따라오게 날 따라오게 날만 따라오게 잔솔밭 한중허리로 날 따라오게
내가야 왔다가 간 뒤에 도랑에 물이 뿔거든 내가야 왔다가 간 뒤에 울고 간 줄 알아요
네 팔자나 내 팔자나 이불 담요 깔겠나 마틀마틀 장석자리에 깊은 정 들자
노랑 저고리 진분홍 치마를 받고 싶어 받았나 우리 집 부모님에야 말 한마디에 울며불며 받았네
노랑두 머리에 파뿌리 상투를 언제나 길러서 내 낭군 삼나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도록 가지만 금전으로 사귄 정은 잠시 잠깐이라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담배불이야 반짝반짝에 님 오시나 했더니 저 몹쓸 놈의 반딧불이가 나를 또 속이네
당신은 거기에 있고서 나는야 여기에 있어도 말 한마디 못 전하니 수천리로구나
당신은 나를 알기를 흙싸리 껍질로 알아도 나는야 당신을 알기를 공산명월로 알아요
당신이 날만치만 생각을 한다면 오동지 섯달에도 진달래가 피지요
당신은 왔다가 그저 간 듯 하여도 삼혼칠백(三魂七魄)의 맑은 정신은 뒤따라간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暮春三月)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멀구 다래를 딸려거든 청서듥으로 들고요 이내 몸을 만날라거든 후원별당으로 들게
무정한 기차야 소리말구 가거라 산란한 이내 마음이 더 산란하구나
물결은 출러덩 뱃머리는 울러덩 그대 당신은 어데로 갈라고 이 배에 올랐나
물 한 동이를 여다 놓고서 물그림자를 보니는 촌살림 하기는 정말 원통하구나
맨드라미 줄봉숭아는 토담이 붉어 좋고요 앞 남산 철쭉꽃은 강산(江山)이 붉어 좋다
밥 한 냄비를 달달 볶아서 간난이 아버지 드리고 간난이하고 나하고는 저녁 굶어 자자
배달의 동포야 굶주리지 말고서 힘대 힘대로 일하여 자수성가합시다
변북이 산등에 이밥취 곤드래 내 연설을 들어라 총각 낭군을 만날라거든 해 연년이 나거라
봄철인지 갈철인지 나는 몰랐더니 뒷 동산 행화춘절(杏花春節)이 날 알려주네
사발그릇이 깨어지면은 두 세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로 뭉친다
살개바우 노랑차조밭 어느 누가 매느냐 비 오고 날 개는 날에 단둘이 매러 갑시다
삼신산(三神山)의 불로초도 풀은 풀이 아니냐 하루밤을 자고 가도 임은 임일세
삼십육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 꽃은 을유년(乙酉年) 팔월십오일 다시 만발하였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정들이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서울에 종로 네거리 솥 때우는 아저씨 우리들의 정 떨어진 것은 왜 못 때워주나
석새배 곰방치마를 둘렀을 망정 네까짓 하이칼라는 내 눈 밑으로 돈다
수수밭 삼밭을 다 지내 놓고서 빤빤한 잔디밭에서 왜 이렇게 졸라
술으는 술술술 잘도 넘어 가는데 찬물에 냉수는 중치에 미인다
시누야 올캐야 말내지 말게 삼밭 속의 보금자리는 내가 쳐 놓았네
시어머니 산소를 까투리봉에다 썼더니 아들딸 낳는 쪽쪽 콩밭골로 가네
시어머니 산소를 깨구리봉에다 썼더니 옆구리만 찔러도 해딱 자빠지네
시집간 지 삼일만에 부뚜막 장단을 쳤더니 시어머니 눈은 까재미 눈이 된다네
시집온 지 사흘만에 바가지 장단을 쳤더니 시아버지가 나오시더니 엉덩이 춤만 추네
신발 벗고 못가실 데는 참밤나무 밑이요 금전 없이 못갈 때는 술집 문전이라
싫으면 말어라 너만이 남자더냐 산 넘구 물 건너면 또 남자 있겠지
싫으면 말어라 너만이 여자더냐 산 넘구 물 건너면 또 여자 있겠지
아우라지 강물이 소주 약주 같다면 오고 가는 친구가 모두 내 친굴세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님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질아질 성마령(星摩嶺) 야속하다 관음베루 지옥같은 정선읍내 십년간들 어이가리
앞 남산 살구꽃은 필락말락 하는데 우리 둘이 정이야 들락말락 하네
앞 남산 실안개는 산허리를 돌구요 우리 님 양팔은 내 허리를 감네
앞 남산에 황국단풍은 구시월에나 들구요 이내 몸에 속단풍은 시시때때로 든다
앞 남산의 호랑나비는 왕거미줄이 원수요 시방시체 청년들은 삼팔선(三八線)이 원수라
영감아 홍감아 집 잘 보고 있거라 잠자리 팔아서 엿사다 줌세
오늘 갈는지 내일 갈는지 정수정망(定數定望)이 없는데 맨드라미 줄봉숭아는 왜 심어놨나
오늘 갔다가 내일 온다면 나는 안 따라가지만 오늘 갔다가 모레 온다면 나는 따라가요
오라버니 장가는 명년에나 가시고 검둥 송아지 툭툭 팔아서 날 시집보내주
우리 님 말씨는 얼마나 고운지 뒷동산 물푸레 회초리 착착 휘네
우리 어머니 나를 길러서 한양 서울 준댔죠 한양 서울 못 줄 망정 골라골라 주세요
원앙금침에 잣비개는 저녁마다 비련만 대장부 긴긴 팔은 언제나 비나
월미봉(月尾峯) 살구나무도 고목이 덜컥 된다면 오던 새 그 나비도 되돌아 간다
유전자(有錢者) 무전자(無錢者) 사람 괄세 말어라 인간세계 부귀영화는 돌고도 돈다
육칠월 감자싹으는 삼재팔난(三災八難)을 적는데 대한 청년 남아는 만고풍상을 다 겪네
이밥에 고기 반찬은 맛을 몰라 못 먹나 사절치기 강낭밥도 마음만 편하면 되잖소
이삼사월 긴긴 해는 점심 굶어 살아도 동지섣달 긴긴 밤이야 임 그리워 못 살겠네
저 건너 저 묵밭은 작년에도 묵더니 올해도 날과 같이 또 한해 묵네
정선같이 살기 좋은 곳 놀러 한 번 오세요 검은 산 물밑이라도 해당화가 핍니다
정선 사십리 발구럭 십리에 삼산(蔘山) 한치인데 의병난리가 났을 때도 피난지로다
정선앞 한강수(漢江水)는 소리없이 흐르고 옛 조상 옛 시(詩)는 변함이 없다
정선의 구명(舊名)은 무릉도원(武陵桃源) 아니냐 무릉도원 어데 가고서 산(山)만 충충하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에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왜 몰라
정선읍내야 백모래 자락에 비 오나 마나 어린 가장 품안에 잠자나 마나
정선읍내 일백오십호 몽땅 잠드려 놓고 임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창밖에 오는 비는 구성지게 오잔나 비 끝에 돋는 달은 유정(有情)도나 하구나
천기운기(天氣運氣)로 눈비 올라면 땅이 누기가 있드시 눈도 비도 다 오는데 당신은 왜 못오시나
하루밤 맺은 정을 끊지 못해서 우느냐 능나도 수풀 속에서 봄비가 온다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님의 맛만 같다면 올같은 흉년에도 봄살아 나지요
허공중천에 뜬 달은 임 계신 곳을 알건만 나는야 어이해서 임 계신 곳을 모르나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 만지산(滿池山) 전산옥(全山玉)이야 술판 차려놓아라 

*출전 : '함께하는 아리랑'(1999, 정선아라리학교)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선아라리는 기본적으로 한(恨)의 노래이다. 궁벽한 두메산골의 고달픈 삶을 이어가야 했던 정선사람들은 풍자와 해학을 실은 아라리 가락에 삶의 애환을 달래면서 살아왔다. 정선아라리에는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두메산골의 고달픈 삶, 떼꾼들의 고단함 등 민중들의 한과 애환이 담겨 있다. 또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울분,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 통일에 대한 염원 등 시대를 넘나드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것은 정선아라리가 어느 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연들이 계속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정선아라리는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 충북, 경기도 동부에서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온 민요로 그 기원은 여말선초(麗末鮮初)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가 망하자 이성계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선비들 중 일곱 사람이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숨어 들어오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와 지난 날의 회상,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율창(漢詩律唱)에 담아 부르곤 했다. 몰락한 고려 유민들이었기에 그들의 시는 비통하면서도 한이 맺혔을 것이고, 율창의 가락은 슬프고 구성졌을 것이다. 이들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노랫가락에 실리면서 그 애절함을 더해 갔다.


정선아라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조선후기 이후부터이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대량의 목재가 필요해지자 원목을 운반하던 정선의 뗏목꾼들에 의해 정선아라리는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이때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가사가 덧붙임 소리로 자리잡게 되면서 정선아라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오늘날 정선아라리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아라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정선에서 다른 지방으로 출가한 남녀나 떼꾼, 소리꾼, 여러 지방을 떠돌면서 장사를 하던 장돌뱅이, 화전민 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그곳의 문화적인 특성이 더해진 또 다른 이름의 수많은 아리랑을 생겨나게 했다.


특히 정선의 아우라지에서 출발해서 영월과 단양, 충주를 거쳐 광나루와 마포나루에 이르는 뗏목의 이동로였던 남한강(南漢江)은 정성아라리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장장 보름동안이나 천이백 리 남한강 물길을 따라 뗏목을 저어가야만 했던 뗏군들은 무료함을 달래거나 떼몰이의 고달픔을 잊으려고 정선아라리를 불렀다. 또, 뗏군들이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뗏목을 댄 강가의 주막에 들러 걸판진 술판을 벌일 때마다 부르던 소리도 정선아라리였다. 정선아라리는 그렇게 남한강 물길을 따라서 퍼져나가 남으로는 경북 구미의 '구미아리랑'에 반영되기도 했으며, 북으로는 만주 흑룡강성의 '아리랑련곡'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정선아라리는 노동 현장이나 놀이 공간을 가리지 않고 아무때, 아무데서나 불렸던 노래였다. 정선 사람들은 나물을 뜯거나 밭을 맬 때, 씨를 뿌리거나 김을 맬 때, 나무할 때, 떼를 매거나 탈 때, 삼 삼을 때, 아이를 재울 때, 부역을 할 때 뿐만 아니라 잔치 때, 여럿이 함께 모여 놀 때도 정선아라리를 불렀다. 이처럼 정선아라리는 노동요로서 뿐만 아니라 유희요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선아라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혼자서도 부를 수 있고 둘이 있을 때도 부를 수 있으며, 여럿이 있을 때도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둘이서 소리를 서로 메기고 받다가, 또는 여럿이 한마디씩 돌아가며 부르다가 가사가 막히는 사람은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 판을 깨지 않기 위해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를 불렀는데, 이 때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덧붙임 소리를 함께 부름으로써 정선 사람들은 나눔과 어울림의 대동세상을 열어갔던 것이다. 

 

정선아라리를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 노래가 두 줄짜리의 짧은 형식을 가진 가사 중심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즉 이 노래는 음폭의 높낮이가 크지 않고 가락이 길게 늘어지면서 단조롭기에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즉흥적으로 노랫말을 지어 붙여서 부르면 된다. 즉 정선아라리는 아무 말이나 찍어다 붙이면 되는 노래인 것이다. 그래서 정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정선아라리를 갖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까지 채록된 가사만 해도 천오백여 수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정선아라리는 정선 사람들의 삶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노랫말 하나하나에는 시대와 공간을 달리한 정선 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서와 삶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하나의 민요에 이렇게 가사가 많은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그 유래가 없다. 그것은 바이블이나 불경이 형성된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선아라리가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노래였음을 말해준다. 

 

아우라지에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우라지의 골지천과 송천에는 못 보던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때문에 아우라지 전설의 원형이 훼손된 것만 같아 아쉬웠다. 


2016.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