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부안 삼절 이매창(李梅窓)의 묘소를 찾아서

林 山 2017. 1. 16. 16:35

2016년 12월 31일 마지막 지는 해를 바라보기 위해 부안군(扶安郡) 변산면(邊山面) 도청리(道淸里) 솔섬으로 향했다. 용이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여의주를 입에 문 솔섬 해넘이를 기대하면서 먼 길을 달려 변산반도로 들어섰다. 하지만 하늘에는 온통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구름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솔섬 해넘이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2017년 1월 1일 계화도(界火島) 해돋이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계화도에 도착하니 동녘 하늘에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해돋이 시간이 지나서도 구름은 여전히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화도 해돋이도 인연이 아니었던가?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없어 아쉬웠지만 태양은 내일 또 다시 떠오를 것이다.  


부안 매창공원


부안 땅에 왔으니 조선시대 시(詩)와 거문고로 이름을 떨친 이매창(李梅窓)의 묘(전라북도기념물 제65호)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매창(梅窓) 묘는 부안읍(扶安邑) 서외리(西外里) 매창공원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묘소 주위에는 매창과 그녀의 정인(情人)이었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글벗이었던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을 인용하여 고려~조선 시대까지의 시기(詩妓)에 대해 기록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용성의 창기(娼妓) 우돌(于咄), 팽원의 창기 동인홍(動人紅)만이 시를 지을 줄 알았고, 조선시대에는 송도 기생(妓生) 황진이(黃眞), 부안 기생 매창(梅窓)과 추향(秋香) 그리고 복랑(福娘), 호서 기생 설죽(雪竹)과 취선(翠仙), 진주 기생 승이교(勝二喬), 성천 기생 일지홍(一枝紅) 등이 시로 유명했다.


일찌기 황진이, 박연폭포(朴淵瀑布), 서경덕(徐敬德)은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부안 출신 시인 신석정(辛夕汀)은 이매창, 직소폭포, 유희경를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했다. '남매북황(南梅北黃), 남쪽에는 매창이요 북쪽에는 황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조선 최고의 시기(詩妓)였다.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었던 부안삼절 이매창의 삶과 시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이매창 묘


1573년 계유년(癸酉年) 어느 날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첩은 산통 끝에 딸을 낳았다. 이탕종은 딸의 이름을 향금(香今)이라 짓고, 자를 천향(天香)이라 했다. 향금의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난 지 석 달만에 죽었다. 어머니와 사별한 향금은 아버지로부터 한문과 거문고를 배웠다. 향금의 나이 열두 살에 아버지마저 갑자기 죽고 말았다.     


부안현감 서우관(徐雨觀)은 향금을 관아의 선화당으로 들어오게 하여 잔심부름을 시켰다. 향금의 나이 겨우 열네 살 때 서우관은 그녀에게 수청을 들게 하였다. 1588년 임기를 마친 서우관은 향금을 데리고 한양으로 떠났다. 향금은 서우관의 첩으로 들어간 지 3년만에 부안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천애 고아 향금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생(妓生)이 되는 길 밖에 없었다. 향금은 계생(癸生)이라는 기명(妓名)을 받고, 기안(妓案)에 이름이 올라감으로써 (官)가 되었다. 관기는 노비문서처럼 기안에 이름이 올라갔으며, 양반 벼슬아치들의 각종 연회에 동원되어 흥을 돋우는 역할을 맡았다. 관기들은 이름조차 호방(戶房)에서 점검할 때 부르기 편하도록 지어졌다. 계생이라는 기명도 '계유년에 태어난 기생'이라는 뜻이었다. 향금은 계생이라는 기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똥이, 쇠똥이'식으로 붙인 이름이 마음에 들리 없었던 향금은 계생 대신 매창이라고 자호하였다.  


기생이 된 매창은 타고난 재주로 각종 악기와 가무는 물론 시와 문장,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매창은 특히 시와 노래에 능했으며, 거문고를 잘 탔다. 매창은 단연 부안 제일의 명기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매창은 성품 또한 아름답고 고왔다. 신분이 기녀였기에 매창은 늘 술에 취한 손님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어느 날 취객이 명주저고리를 움켜쥐자 매창이 몸을 돌려 피하려다 그만 찢어지고 말았다. 매창은 값비싼 명주저고리가 찢어진 것보다 보내 주신 은정에 금이갈까 두렵다는 시를 지어서 취객에게 주었다. 매창의 인품과 도량이 그대로 드러난 시였다.

   

이매창의 '증취객' 시비


증취객(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리다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를 잡으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 명주저고리 손길 따라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명주저고리 하나쯤 아깝지 않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주신 은정까지 찢어졌을까 두렵워라


매창의 명성은 한양 땅 조선의 대시인 유희경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유희경은 종7품인 계공랑(啓功郎) 유업동(劉業仝)과 허씨(許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천민 출신이었지만 성품이 깨끗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특히 시를 잘 지었다. 그는 서경덕의 문인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고,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또 서경덕의 문인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장례의식에도 밝았던 그는 왕실이나 사대부가의 장례를 예법에 맞게 치르도록 했기 때문에 경향 각지에 이름이 높았다.  


유희경은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 정치(鄭致), 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신분의 시인들이 주로 참여했다. 유희경과 백대붕은 시를 잘 짓기로 소문이 나서 문인들 사이에 '유백(劉白)'으로 일컬어졌다. 당대의 학자나 문인들도 '유백'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예우했다. 


사대부들은 유희경의 신분이 낮았음에도 한시를 잘 지었기 때문에 신분을 떠나 교류하고 싶어 했다. 유희경은 한양의 북촌 자기 집 뒤 시냇가에 침류대(枕流臺)를 지어 이름난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았다. 그와 교류했던 사람들은 허균, 차천로(車天輅), 임숙영(任叔英), 이수광(李晬光), 유몽인(柳夢寅) 등 당대의 이름난 시인과 재상들이었다. 그는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를 모아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유희경의 명성은 전라도 부안 땅 매창의 귀에까지 들려 왔다.    


1591년 유희경은 예법(禮法)과 관련하여 전라도에 내려왔다가 부안에 들르게 되었다. 유희경은 지체하지 않고 매창을 찾았다. 매창은 유희경이 한양의 유명한 시객(詩客)이라는 말을 듣고, 그에게 '유백 가운데 뉘신지요? 하고 물었다. 유희경은 '내가 바로 유니라' 하고 대답했다. 당대 최고의 시인 유희경을 만난 매창은 뛸 듯이 기뻤다. 매창은 자신의 마음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유희경에게 전했다. 유희경도 매창의 마음을 읽었다.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 매창의 모습은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선녀인 듯 싶었다. 과연 듣던 대로 매창은 시와 노래, 거문고의 명인이었다. 


일찌기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희경도 매창의 매력에 빠져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유희경의 눈에는 매창이 신선들이 산다는 삼청궁에 내려온 무산신녀로 보였다. 그는 매창을 만난 기쁨을 칠언절구로 읊었다.  


증계랑(贈癸娘) 1-계랑에게 주다 1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찌기 남쪽의 계랑이란 이름 들었네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글 재주 노래 솜씨 한양에까지 울렸네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에서야 그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무산신녀가 삼청궁에 내려온 듯하여라  


매창도 자신을 선녀로 극찬한 유희경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천민 신분이라 동병상련이었을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사랑에 빠졌다. 유희경의 나이 마흔여섯 살, 매창은 낭랑 18세였으니 28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은 사랑이었다. 매창과 처음 운우지정을 나누고 돌아오던 날 밤 유희경의 가슴은 환희로 가득찼다.


산중추야(山中秋夜)-산 속의 가을 밤


白露下秋空(백로하추공) 가을 하늘에선 흰 이슬이 내리고

山中桂花發(산중계화발) 산속 계수나무 꽃이 활짝 피었네

折得最高枝(절득최고지) 가장 높이 솟은 가지 꺾어 들고서

    歸來伴明月(귀래반명월) 밝은 달 동무삼아 집으로 돌아오네   


매창에 대한 유희경의 사랑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유희경은 매창이 언짢거나 우울할 때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조차 가슴아파 했다. 그만큼 매창을 사랑했던 것이다.   


증계랑(贈癸娘) 2-계랑에게 주다 2


我有一仙藥(아유일선약) 나에게 신선의 명약이 하나 있는데

能醫玉頰嚬(능의옥협빈) 찡그린 얼굴도 곱게 고칠 수 있다네

深藏錦囊裏(심장금낭리) 비단 주머니 깊이 감추어 두었다가

 欲與有情人(욕여유정인) 정인이 생기면 나누어 주고 싶어라 


이제 유희경과 매창 두 사람 사이에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두 사람의 운우지정은 환희와 황홀함 그 자체였으리라. 유희경은 남녀간의 운우지정를 노골적으로 담은 한시를 지어 매창에게 주었다.   


희증계랑(戱贈桂娘)-장남삼아 계랑에게 주며


柳花紅艶暫時春(유화홍염잠시춘) 버들꽃 아리따움도 잠시동안 봄이라서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옥협빈)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감고침냉) 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찌 참을 수 있으리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하래빈) 무산의 운우지정을 자주 나누도록 하세 


유희경과 매창의 불 같은 사랑은 너무나 짧았다. 꿈처럼 황홀한 날들은 쏜살처럼 흘러갔다. 두 사람 사이에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유희경이 부안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매창을 데려갈 수 없었던 유희경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안타깝고 슬프기는 매창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를 원망하고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밤새도록 봄비가 내리던 어느 봄날 매창은 눈물로 유희경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자한(自恨) 1-스스로 한탄하다 1


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봄바람에 밤이 새도록 비가 내리더니

柳興梅爭春(류여매쟁춘) 버들잎과 매화는 봄을 다퉈 피는구나

對北最難堪(대북최난감) 이 좋은 날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은 

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술잔 앞에 놓고 임과 이별하는 일이지


부안을 떠난 유희경은 매창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객지에서 길을 가다가도 매창의 고운 얼굴이 문득문득 떠올라 발걸음을 멈추고는 했다.매창에 대한 그리움은 오동나무 잎을 때리는 빗소리에도 구구절절 묻어났다.  


중억계랑(途中憶癸娘)-길을 가다가 계랑을 떠올리고


一別佳人隔楚雲(일별가인격초운) 고운 임 이별한 뒤 구름이 막혔으니

客中心緖轉紛紛(객중심서전분분)  나그네 마음 속 생각도 어지럽다오

靑鳥不來音信斷(청조불래음신단) 청조가 오지 않아 소식조차 끊겼으니

碧梧凉雨不堪聞(벽오량우불감문) 오동잎 때리는 빗소리 차마 못듣겠네


유희경은 한양으로 올라온 뒤에도 오매불망 매창을 그리워했다. 틈이 날 때마다 그는 침류대에 올라 멀리 남쪽 부안 땅에 두고 온 매창을 생각했다. 매창이 보고 싶어 오동나무에 내리는 빗소리에도 그의 애간장은 시커멓게 탔다.


유희경의 '회계랑(懷桂娘)' 일명 '오동우(梧桐雨)' 시비


회계랑(懷桂娘)-계랑을 그리며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계랑의 집은 바닷가 낭주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내 집은 한양 도성 입구에 있으니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서로가 그리워해도 만나지 못하고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잎에 비 내리면 애간장이 타네


부안 땅에 남은 매창에게도 첫사랑 유희경과의 이별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다. 매창의 눈에는 바람에 배꽃이 비처럼 흩날리던 날 울며 이별한 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꿈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임이 너무나도 안타까왔다.  


이매창의 '이화우(梨花雨)' 시비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1592년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떠났다. 의병을 이끌고 왜적들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에서도 그는 단 한순간도 매창을 잊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임을 전쟁터로 보낸 매창은 가슴 졸이며 임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백년하청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녀의 가슴에 쌓이는 것은 근심이요 한이었다.


자한(自恨) 2-스스로 한탄하다 2


春冷補寒衣(춘냉보한의) 봄날이 차서 얇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비단 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珠淚滴針絲(주루적침사) 구슬같은 눈물 실과 바늘 적시네 


憶昔(억석)-옛날을 생각하다


謫下當時壬癸辰(적하당시임계진) 임께서 임진 계사년에 귀양살이 가셨으니

此生愁恨與誰伸(차생수한여수신) 이 내 몸의 근심과 한 그 누구에게 말하리

瑤琴獨彈孤鸞曲(요금독탄고난곡) 거문고 끼고 홀로 앉아 고란곡을 연주하며

悵望三淸憶玉人(창망삼청억옥인) 시름없이 삼청궁 바라보며 임을 생각하네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유희경은 면천을 받아 양반이 되었으며, 벼슬길에도 나아갔다. 뜨겁게 운우지정을 나누던 임은 멀리 떠나버리고 부안에 홀로 남은 매창은 소식조차 끊어진 임을 그리며 한밤중에도 잠 못 이루고 아픈 가슴만 쓸어내렸다. 한양 땅천리 먼 길 임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은 더욱 더 깊어만 갔다. 매창은 임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시에 담아 풀어내는 수 밖에 없었다.


故人(고인)-옛 님


松栢芳盟日(송백방맹일)  송백처럼 푸르자 맹세하던 날

恩情與海深(은정여해심) 은총과 사랑 바다처럼 깊었는데

江南靑鳥斷(강남청조단)  멀리 떠난 임 소식 끊어졌으니

中夜獨傷心(중야독상심) 한밤중에 홀로 가슴만 아프구나

 

이매창의 '억고인(憶故人)' 시비


억고인(憶故人)-옛 사랑을 추억하다


春來人在遠(춘래인재원) 봄은 왔다지만 그대 먼 곳에 계시니

對景意難平(대경의난평)  경치를 보면서도 마음 편치 않아라

鸞鏡朝粧歇(난경조장헐)  짝 잃은 몸으로 아침 화장을 마치고

瑤琴月下鳴(요금월하명)  거문고 뜯으며 달 바라보며 운다오

看花新恨起(간화신한기)  꽃을 볼수록 새로운 설움 일어나고

聽燕舊愁生(청연구수생)  제비 우는 소리에 옛 시름 생겨나니

夜夜相思夢(야야상사몽)  밤이면 밤마다 임 그리는 꿈 꾸다가

還驚五漏聲(환경오루성)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깬다오


유희경이 없는 세상은 매창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매창은 보아줄 임이 없기에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몸을 가꾼다(女爲悅己者容)는 말도 있잖은가! 매창은 사무치는 외로움에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 임 그리움에 하룻밤새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손가락이 야위어 금가락지가 헐렁할 정도였다. 


이매창의 '규원(閨怨)' 시비


규원(閨怨)-여인의 원망(매창)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  애끓는 정 말로는 다할 길이 없어서

一夜心懷鬂半絲(일야심회빈반사) 하룻밤 그리움에 머리털 반이나 셌네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그대 그립고 아픈 내 사랑 알고프거든

須試金環減舊圓(수시금환감구원) 금가락지도 안 맞는 내 여윈 손 보소 


유희경이 떠난 매창을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여기고 많은 양반 벼슬아치, 시인묵객들이 흑심을 품고 달려들었다. 하루는 어떤 과객(過客)이 매창의 명성을 듣고 시를 지어 그녀를 유혹했다. 매창은 과객의 시를 보더니 그대로 차운(次韻)하여 '내 비록 기녀지만 사랑하는 임이 있으니 아무에게나 몸과 마음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의 한시를 지어 되돌려 주었다. 임 향한 일편단심을 선언한 시였다.


愁思(수사)-시름겨워


平生不學食東家(평생불학식동가)  평생 여기저기 떠도는 삶 배우지 않고

只愛梅窓月影斜(지애매창월영사) 오로지 매창에 빗긴 달만을 사랑했어라

時人未識幽閑意(시인미식유한의)  세상 사람들 내 깊고 그윽한 뜻 모르고

指點行雲枉自多(지점행운왕자다)  뜬구름이라 손가락질하며 헛되다 하네


1599년 묵재(默齋) 이귀(李貴)가 김제군수로 내려왔다. 이귀의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 어머니는 청송부사 권용(權鎔)의 딸이었다. 그는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찌기 문명을 떨쳤으며, 이덕형(李德馨)과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었다. 후에 그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의 녹훈을 받고, 서인 계열인 공서파(功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귀도 매창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귀는 매창을 정인(情人)으로 삼았다. 쟁쟁한 벼슬아치 이귀의 청을 매창은 감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601년 3월 21일 이귀는 암행어사 이정험(李廷馦)의 탄핵을 받고 김제군수에서 쫓겨났다.  


매창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1601년 7월 23일 시대의 이단아 허균이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전라도에 내려왔다. 허균은 부안에 은거하고 있던 학자 고홍달(高弘達)의 소개로 매창을 만났다. 허균이 보기에 매창은 박색이었지만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시인들이었기에 곧 의기투합하여 밤이 새도록 시를 주고 받았다. 이후 허균과 매창은 오랜 세월 인생과 시문을 논하는 돈독한 글벗이 되었다.  


9월 7일에는 허균의 장형(長兄) 허성(許筬)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전주의 전라감영으로 내려왔다. 허성의 관찰사 부임 축하연이 전라감영에서 열렸다. 허균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매창도 축하연에 참석하여 노래와 거문고 연주를 선보였다. 남매북황, 북황남매(북쪽에는 황진이, 남쪽에는 매창)로 일컬어지던 매창이었기에 전라도 최고 권력자의 부임 축하연에는 단연 참석 일순위였던 것이다.


1602년 1월 허성의 후임으로 한준겸(韓浚謙)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허균은 12세나 연상인 한준겸과도 친하게 지냈다. 3월에는 윤선(尹銑)이 부안현감으로 내려왔다. 한준겸은 전라도 각지를 순시하다가 부안에 들렀다. 부안현감 윤선이 한준겸을 위해 베푼 연회에 매창도 참석했다. 한준겸은 허균으로부터 조선 최고의 시기(詩妓) 매창에 대해 이미 들은 바 있었다. 한준겸은 매창의 절창과 거문고 연주에 매료되었다.  


얼마 후 한준겸의 생일이 돌아왔다. 한준겸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축하연을 열고 매창을 초대했다. 부안현감 윤선은 매창과 함께 한준겸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다. 한준겸은 생일을 맞은 오늘 같은 좋은 날에도 임금 걱정에 눈물을 흘린다는 소회를 오언율시에 담아 읊었다. 사실 이 시는 그가 원주목사 시절 영월의 청령포를 찾았을 때,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한 단종(端宗)을 생각하면서 쓴 시를 첫 구와 마지막 구만 살짝 고친 것이었다.     


문자규유감(聞子規有感)-자규새 울음소리를 듣고


蜀魄聲何苦(촉백성하고) 두견 울음소리 어찌 이리 괴로운가

長安路不通(장안로불통) 한양으로 통하는 길 모두 끊어졌네

思歸千古恨(사귀천고한) 돌아가고픈 마음 천 년의 한이러니

啼血五更風(제혈오경풍) 피 눈물 흘리면서 새벽 바람 맞노라

月白刀山曙(월백도산서) 창백한 달 아래 칼산의 날은 밝은데

天寒錦水空(천한금수공) 차디찬 하늘엔 은하수도 텅 비었어라

孤臣再拜淚(고신재배루) 외로운 신하 절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獨酒亂雲中(독주난운중) 홀로 술마시니 어지러운 구름 속이라


한준겸이 비통한 어조로 '문자규유감(聞子規有感)'을 읊자 좌중은 일순간 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분위기의 반전이 필요했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매창이 한준겸의 시에서 수련(首聯)의 '통(通)', 함련(頷聯)의 '풍(風)', 경련(頸聯)의 '공(空)', 미련(尾聯)의 '중(中)'을 차운하여 밝고 명랑한 답가를 지어 불렀다.  

     

복차한순상수연시운(伏次韓巡相壽宴時韻)-한순상이 수연에서 지은 시에 차운하며


 地接神山近(지접신산근) 이곳은 신선들이 사는 산과 가까우니

谿流弱手通(계류약수통) 시냇물은 흘러흘러 약수와 통했어라

遊蜂飛暖日(유봉비난일) 벌들은 따뜻한 봄날 맞아 날아다니고

新燕語淸風(신연어청풍) 돌아온 제비는 맑은 바람에 지저귀네

妙舞搖花影(묘무요화영) 묘한 춤사위에 꽃 그림자도 흔들리고

嬌歌響碧空(교가향벽공) 아리따운 노랫소리 하늘 높이 울리네

蟠桃王母壽(반도왕모수) 서왕모께 선도 바치며 장수를 비나니

 都在獻盃中(도재헌배중) 모두 술잔 높이 들어 생신 축하합니다 


매창이 차운해서 읊은 절묘한 시 한 수로 연회장은 다시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를 되찾았다. 매창의 시재(詩才)에 좌중은 모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매창의 진가가 여지없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매창으로부터 축수를 받으면서 술 한 잔을 받아든 한준겸은 자신의 근심과 슬픔을 시 한 수로 달래준 그녀가 몹시 고맙고 또 사랑스러웠다. 


1603년 매창의 31살이 되던 해였다. 한준겸은 매창과 함께 김제 모악산 근처의 용안대(龍安臺)를 유람했다. 한준겸은 매창을 중국 당나라 때의 뛰어난 여류시인 설도(薛濤)에 빗대어 시를 지었다. 그는 매창의 삶과 시가 설도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증가기계생(贈歌妓桂生)-가기 계생에게 주며


邊山淑氣孕人豪(변산숙기잉인호) 변산의 맑은 기운 귀인을 품었더니 

閨秀千年有薛濤(규수천년유설도) 규수 천 년에 설도가 다시 태어났네 

聽書新詞淸夜永(청서신사청야영) 시와 노래 들으며 푸른 밤 지새우니 

桃花枝上月輪高(도화지상월륜고) 복사꽃 핀 가지 위에 둥근 달 높아라


한준겸의 시는 매창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매창도 자신을 조선의 설도에 비유한 한준겸의 시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창은 한준겸을 조선 최고의 호걸이라고 칭송했다.  


등용안대(登龍安臺)-용안대에 올라


云是長安一代豪(운시장안일대호) 이르기를 장안의 으뜸가는 호걸이라지요

雲旗到處靜波濤(운기도처정파도) 구름 깃발 닿는 곳 파도조차 잠잠해지네 

今朝陪話神仙事(금조배화신선사) 오늘 아침 임을 모셔 신선 얘기 듣노라니 

燕子東風西日高(연자동풍서일고) 제비는 봄바람 맞아 날고 서산에 해 높네


매창과 용안대를 유람하고 돌아온 한준겸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매창을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해 준 한준겸은 그렇게 떠나갔다. 왜적이 당포 등을 침범하자 한준겸은 정승 이덕형(李德馨)의 추천으로 4도도원수(四道都元帥)에 임명되었다. 부안현감 윤선도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다. 부안현민들은 윤선을 기리는 선정비를 성황산에 세워 주었다. 한양으로 올라간 한준겸은 1604년 이조참판(吏曹參判)과 부제학(副提學),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겨울에 다시 이조참판에 제배되어 세자시강원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을 겸임하였다.    


1605년 무장현(茂長縣, 고창군 무장면)에는 임서(林㥠)가 현감으로 내려와 있었다. 임서는 바로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사촌동생이었다. 임서는 자신의 생일잔치에 매창을 초대하고 싶었다. 그는 매창을 정중하게 초대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임서가 매창을 초대한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현감 정도면 해당 관아의 허락을 얻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생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임서는 매창을 기생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예우한 것이었다.  


蓬萊消息杳難傳(봉래소식묘난전) 봉래산 소식이 아득하여 전해지지 않으니

獨香東風思惘然(독향동풍사망연) 홀로 봄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생각합니다

爲報佳人無恙否(위보가인무양부) 아름다운 사람이여 잘 지내시고 있는가요

 搖池席上待回仙(요지석상대회선) 요지에서 선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보다 더 멋진 초대장은 없었다. 매창은 자신을 선녀에 빗대어 표현한 초대시를 보고 임서의 인간됨을 알았다. 그녀는 즉시 임서의 초대에 응하는 답시를 적어 보냈다. 매창은 자신의 시와 음악을 알아주는 임서를 선계에서 내려온 신선으로 극찬했다. 


靑鳥飛來尺素傳(청조비래척소전) 파랑새 날아와 반가운 소식을 전하지만

病中愁思轉悽然(병중수사전처연) 병중 근심에 도리어 처연한 마음이어라

搖琴彈罷無人識(요금탄파무인식) 내 거문고 연주를 알아주는 사람 없으니

 欲向長沙訪謫仙(욕향장사방적선) 이제 장사 땅 신선을 찾아서 떠나렵니다 


시에서 보듯 매창은 몸도 아팠고, 마음도 편치 않았다. 첫사랑 옜 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서는 매창이 보낸 답시 밑에 '낭의 이름은 계생이다. 노래와 거문고를 잘했고, 또한 시에도 능하다. 일찌기 내 친구의 첩이 되었다가 지금은 청루에 있다. 생일잔치에 오도록 하기 위해 시를 써서 초청했다.(娘名桂生, 善歌辭琴瑟, 又能詩. 曾爲友人之妾, 今在靑樓. 欲致於壽筵席上, 以詩招之)'는 기록을 남겼다. 임서의 친구는 곧 매창의 첫 남자 서우관이었다. 


1607년 윤선의 후임으로 심광세(沈光世)가 부안현감이 되어 내려왔다. 허균은 공주목사로 임명되어 부안을 떠나기 전까지 심광세, 매창과 함께 능가산(楞伽山) 어수대(御水臺) 등 변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시를 주고받았다. 변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매창은 '등어수대(登御水臺)'란 제목의 오언절구를 남겼다. 


이매창의 '등어수대(登御水臺)' 시비


등어수대(登御水臺)-어수대에 올라


王在千年寺(왕재천년사) 왕이 천 년 전에 계시던 절터엔 

空餘御水臺(공여어수대) 부질없어라 어수대만 남았구나 

往事憑誰問(왕사빙수문) 지나간 일을 누구에게 묻겠는가

臨風喚鶴來(임풍환학래) 바람 맞으며 학이나 불러볼까나


기다려도 오지 않는 옛 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매창은 몸과 마음에는 깊은 병이 들고 말았다. 옛 임이 너무 그리워 상사병(相思病)에 걸린 매창은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매창은 삶의 의지마저 잃어버렸고, 몸에는 병한만 남았다. 그녀의 사무친 병한(病恨)을 치유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리운 임 뿐이었다. 고운 임은 소식조차 끊어져 매창의 마음 속 깊이 병한이 들었으니 만물이 화락하는 봄이 와도 매창에게는 봄이 온 것이 아니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었다. 


병중(病中) 1-병이 들어 1


不是傷春病(불시상춘병) 봄이라서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어라 

只因憶玉郞(지인억옥랑) 오직 고운 임 잊지 못해 난 병이어라 

塵豈多苦累(진기다고루) 티끌 같은 세상 어찌 괴로움도 많을꼬

 孤鶴未歸情(고학미귀정) 하나 뿐인 정인이 돌아오지 않아서라오


매창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1607년 63세가 된 유희경이 부안에 내려왔다. 매창의 나이는 35세였다. 두 사람은 긴 세월을 돌고 돌아 16년만에 다시 만났다. 유희경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던 매창은 그때까지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중봉계랑(重逢癸娘)-다시 계량을 만나


從古尋芳自有時(종고심방자유시) 예로부터 꽃 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樊川何事太遲遲(번천하사태지지) 두목은 어인 일로 이리도 늦었던고

吾行不爲尋芳意(오행불위심방의) 내가 꽃 향기만 찾아 온 것이 아니라

唯趂論詩十日期(유진논시십일기) 열흘만 시 읊자던 약속 좇을 뿐이오


하지만 유희경은 예전의 그 정인이 아니었다. 그는 운우지정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논하기 위해 매창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유희경은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아 젊은 매창과 운우지정을 나눌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시에 핑계를 댈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유희경은 예전처럼 매창과 자유롭게 운우지정을 나눌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면천한 뒤 승승장구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되어 있는 지금 만약 나쁜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자신은 물론 자손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칠 것을 염려했다. 


春愁(춘수) 2-봄날의 시름 2


曾年此夕瑤池會(증년차석요지회) 지난해 오늘 저녁 요지의 잔치에서 

我是樽前歌舞人(아시준전가무인) 이 몸은 술잔 앞에서 춤까지 추었소

宣城舊主今安在(선성구주금안재) 선성의 옛 임은 지금 어디 있는가요

一砌殘花昔日春(일체잔화석일춘) 꽃잎만 봄인 양 섬돌 위에 남았어라


매창은 그런 유희경을 바라보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술잔 앞에서 춤까지 추었거늘, 임은 그 옛날 운우지정을 나누던 그 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매창에게서 유희경이 영원히 떠나가고 있었다. 섬돌 위에 떨어진 시든 꽃잎처럼 사랑이 떠나가고 있었다. 


유희경이 떠나간 이듬해 봄이 돌아왔다. 봄은 사랑의 계절, 꾀꼬리조차 암수 서로 노니는 계절이 아니던가! 그러나, 짧은 만남 끝에 사랑하는 임과 영원히 이별한 매창에게는 빼앗긴 봄이었다. 매창은 꽃 피고 새 우는 봄조차 원망스러웠다. 거문고를 끌어안고 상사곡을 뜯는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춘원(春怨)-봄날을 원망하며


竹院春深鳥語多(죽원춘심조어다) 대숲 뜰에 봄은 깊어 새소리 들리기에

 殘粧含淚捲窓紗(잔장함루권창사)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창사를 걷었어라

 瑤琴彈罷相思曲(요금탄파상사곡) 거문고를 끌어다가 상사곡을 뜯고 나니

花落東風燕子斜(화락동풍연자사) 꽃 지는 봄 바람에 제비들도 비껴 나네

 

심광세는 매창의 시에서 차운하여 화답시 '차계랑운(次桂娘韻)'을 지었다. 매창의 근심과 슬픔을 심광세도 읽었던가 보다. 그는 이 시의 끝에 매창에 대해 '부안시기(扶安詩妓)'라고 적었다.    


차계랑운(次桂娘韻)-계랑의 시에 차운하며


   閒愁壓夢覺偏多(한수압몽각편다) 한가한 시름도 꿈에서 깨는 경우가 많은데 ​ 

粧淚盈盈濕枕紗(장루영영습침사) ​눈물 그렁그렁하여 베개를 흥건히 적셨네

滿地落花春色去(만지락화춘색거) 땅에 가득 꽃잎 떨어지며 봄빛도 떠나는데

一簾微雨篆煙斜(일렴미우전연사​) 대발 사이로 가랑비 내리고 향연기 비끼네


공주목사로 있던 허균은 매창, 심광세, 조희일(趙希逸) 등을 초대하여 부여 백마강을 유람했다. 조희일은 문장과 시부는 물론 서화에도 능했다. 매창은 이때 '유부여백마강(遊扶餘白馬江)'이란 제목의 칠언절구를 남겼다.  


유부여백마강(遊扶餘白馬江)-부여 백마강에서 노닐며


水村來訪小柴門(수촌래방소시문) 강변 마을을 찾아 가난한 집 사립문 여니 

荷落寒塘菊老盆(하락한당국로분)  연못엔 연꽃 지고 화분엔 국화도 시드네

鴉帶夕陽啼古木(아대석양제고목) 저녁노을빛 띤 갈가마귀는 고목에서 울고

雁含秋氣渡江雲(안함추기도강운) 가을 하늘 기러기 강 건너 구름 속에 드네


그 해 가을 허균은 관아에 서자 친구들을 거두었다는 이유로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부안으로 내려왔다. 허균은 부안에 농장을 마련하고 종들도 머물게 했다. 그는 우반동의 정사암(靜思庵)에도 머물렀다. 그는 고홍달, 매창과 함께 능가산 월명암(月明庵)과 천층암(天層菴) 등 변산 일대를 유람했다. 매창은 변산을 유람하고 '등월명암(登月明庵)'과 '등천층암(登天層菴)' 등의 시를 썼다. 


등월명암(登月明庵)-월명암에 올라


卜築蘭苦倚半空(복축난고의반공) 터잡아 지은 절이 하늘에 솟아

一聲淸磬徹蒼穹(일성청경철창궁) 맑은 풍경소리 멀리 퍼지는데

 客心怳苦登兜率(객심황고등도솔) 나그네 도솔천에 오른 듯 싶어 

讀罷黃庭禮赤松(독파황정예적송) 황정경 읽고 적송자에 절하네


등천층암(登天層菴)-천층암에 올라


千層隱佇千年寺(천층은저천년사) 천층 위 우두커니 서 있는 천년 묵은 절

瑞氣祥雲石逕生(서기상운석경생)  맑은 정기 흰 구름은 돌길에 서려 있네

淸磬響沈星月白(청경향침성월백) 풍경소리 내려앉고 별빛 달빛은 밝은데

滿山楓葉鬧秋聲(만산풍엽료추성) 온 산에 단풍 드니 가을바람 요란하여라


허균은 매창에게 유희경을 잊기 위한 한 방편으로 불교의 참선 수행과 도교의 선관을 지닐 것을 권했다. 두 사람은 정사암에서 참선을 하기도 했다. 도교의 선계는 매창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승은 그녀에게 절망과 고통 뿐이었기 때문이다. 남성 위주의 유교 윤리가 판치고 노예제가 실시되던 조선사회는 매창 같은 기녀들에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매창은 슬픔도 아픔도 없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신선과 선녀들이 영생과 복락을 누리는 선계는 바로 그녀가 꿈꾸던 이상향이었다.      


仙遊(선유)-선계에 노닐다


三山仙境裡(삼산선경리) 삼신산 신선들이 노니는 곳엔

蘭若翠微中(난야취미중) 푸르른 숲 속에 사원이 있다네

鶴唳雲深樹(학려운심수) 구름 깊은 나무에선 학이 울고

猿啼雪壓峰(원제설압봉) 눈 덮인 봉우리 원숭이가 우네


霞光迷曉月(하광미효월)  노을빛 밝아 새벽달 희미하고

瑞氣映盤空(서기영반공) 상서로운 기운 하늘 가득 서렸네

世外靑牛客(세외청우객)  푸른 소 타고 속세 떠난 나그네

何妨禮赤松(하방예적송) 적송자를 찾아가 예한들 어떠리


매창은 이승에서 임과 못다 이룬 사랑을 선계에서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유한한 인간계를 벗어나 세월의 오고감이 없는 선계로 들어가면 영생을 누리면서 임과 영원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贈友人(증우인)-친구에게 주다


贈聞東海降詩仙(증문동해강시선) 일찌기 동해에 시선이 내려왔다는데

今見瓊詞意悵然(금견경사의창연) 보아하니 말은 고우나 뜻은 서글퍼라

緱嶺遊蹤思幾許(구령유종사기허) 구령선인이 노닐던 곳 그 어드메던가

三淸心事是長篇(삼청심사시장편) 신선 세계의 심사를 장편으로 엮었네


壺中歲月無盈缺(호중세월무영결) 호중의 세월은 차고 기울지 않지만

塵世靑春負少年(진세청춘부소년) 속세의 청춘은 소년 시절 잠깐이네

他日若爲歸紫府(타일약위귀자부) 만일 먼 훗날 선계로 들어가게 되면

請君謀我玉皇前(청군모아옥황전) 옥황님께 청하여 임과 함께 살리라


허균은 매창에게 자신의 누이 난설헌(蘭雪軒) 허초희(楚姬)의 시를 소개했다. 난설헌은 매창보다 10년, 허균보다 6년 연상이었다. 남존여비의 조선 사회에서 난설헌은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규방에서 한숨을 토하며 한 많은 삶을 살아간 여인이었다. 매창은 그런 난설헌의 삶과 시에 공감했다. 그녀는 특히 돌아오지 않는 임에 대한 원망을 노래한 난설헌의 '규원(閨怨)'이라는 시에 더 공감했을 것이다. 매창도 같은 제목의 시를 남겼기 때문이다.   


규원(閨怨)-여자의 원망(난설헌)


錦帶羅裙積淚痕(금대나군적루흔) 비단 띠 깁 저고리에 적신 눈물은

一年芳草恨王孫(일년방초한왕손) 여린 방초 임 그리운 한이랍니다

瑤箏彈盡江南曲(요쟁탄진강남곡) 거문고 뜯어 한가락 속 풀고 나니

雨打梨花晝掩門(우타이화주엄문) 배꽃도 비맞아 우수수 떨어집니다


月樓秋盡玉屛空(월루추진옥병공) 다락에 가을은 깊은데 울 안은 비고

 霜打蘆洲下暮鴻(상타로주하모홍) 서리쌓인 갈밭에 기러기만 내려앉네

瑤瑟一彈人不見(요슬일탄인불견) 거문고 뜯어도 임은 돌아오지 않고

 藕花零落野塘中(우화영락야당중) 들못에 연꽃만 후두둑 고개를 떨구네


난설헌의 시를 읽고 나서 매창은 그녀의 영향을 받은 듯한 시 '추천(鞦韆)'과 '춘사(春思)'를 지었다. 매창의 두 시는 난설헌의 칠언율시 '추천사(鞦韆詞)'와 칠언고시 사시사(四時詞) 중 '춘사(春思)'를 압축해서 재구성한 듯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허균은 매창의 시에서 1589년에 죽은 누이 난설헌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추천사(鞦韆詞)-그네뛰기 노래(난설헌)


隣家女伴競鞦韆(린가여반경추천) 이웃 사는 벗들과 그네 뛰며 놀았는데요

結帶蟠巾學半仙(결대반건학반선) 띠 매고 수건 두르니 신선놀음 같았어요

 風送綵繩天上去(풍송채승천상거) 오색 그네줄 굴러 바람 차고 하늘 오르니

  佩聲時落綠楊烟(패성시락녹양연) 노리개 소리 울리자 버들엔 먼지 일었지요 

 蹴罷鞦韆整綉鞋(축파추천정수혜) 그네타기 마치고 수놓은 꽃신 고쳐 신고는

下來無語立瑤階(하래무어입요계) 내려와 숨가빠 말도 못하고 섬돌에 섰어요

 蟬衫細濕輕輕汗(선삼세습경경한) 매미날개 같은 적삼엔 땀이 촉촉히 배어서

忘却敎人拾墮釵(망각교인습타채) 떨어진 비녀 주워 달라는 말도 잊었답니다


추천(鞦韆)-그네뛰기(매창)


兩兩佳人學半仙(양양가인학반선) 아름다운 두 여인은 선녀런가 사람이런가

綠楊陰裡競鞦韆(녹양음리경추천) 버드나무 그늘 속에서 다투어 그네를 뛰네

珮環遙響浮雲外(패환요향부운외) 노리개 소리 구름 너머로 아득히 울리더니

却訝乘龍上碧天(각아승용상벽천) 마치 용을 타고 푸른 하늘로 오르는 듯해라


춘사(春詞)-봄의 심사(난설헌)


​院落深沈杏花雨(원락심침행화우) 고요한 정원에는 살구꽃비 떨어지고 

流鶯啼在辛夷塢(유앵제재신이오) 목련꽃 피어난 언덕엔 꾀꼬리 노니네

流蘇羅幕襲春寒(유소나막습춘한) 오색수실 비단 장막 봄기운 차가운데

博山輕飄香一縷(박산경표향일루) 박산향로 향연기 하늘거리며 날려요

 美人睡罷理新粧(미인수파리신장) 잠 깨어난 아가씨 곱게도 단장하는데 

香羅寶帶蟠鴛鴦(향라보대반원앙) 고운 비단옷 보대엔 원앙을 수놓았네

斜捲重簾帖翡翠(사권중렴첩비취) 드리운 겹발 거두고 비취휘장 치고서

懶把銀箏彈鳳凰(나파은쟁탄봉황) 시름없이 은쟁 잡고 봉황곡을 타누나


 金勒雕鞍去何處(금륵조안거하처) 금굴레 구슬 안장 얹고 임 어데 갔을까 

多情鸚鵡當窓語(다정앵무당창어) 앵무새도 다정히 창가에서 속삭이네요

 草粘戱蝶庭畔迷(초점희접정반미) 풀밭에 날던 나비 뜨락에서 사라지더니 

花肩遊絲蘭外舞(화견유사란외무) 난간밖 아지랑이 꽃밭에서 춤추고 있네

 誰家池館咽笙歌(수가지관열생가) 누구네 연당에서 피리 소리 들려오는가 

月照美酒金波羅(월조미주금파라) 향그런 술 담긴 잔 속엔 달빛 가득하네

愁人獨夜不成寐(​수인독야불성매) 시름 많은 여인 밤새 홀로 잠 못 이루고 

曉起鮫綃紅淚多(효기교초홍루다) 새벽에 일어나 눈물만 옷자락에 적시네

춘사(春詞)-봄의 심사(매창)


東風三月時(동풍삼월시) 삼월이라 봄바람이 불어올 때에

處處落花飛(처처낙화비) 곳곳마다 지는 꽃잎 흩날리누나

綠綺相思曲(녹기상사곡) 거문고 뜯으며 상사곡 노래해도

 江南人未歸(강남인미귀) 강남 가신 내 임 돌아올 줄 모르네


허균이 부안에 내려올 때 화가 이징(李澄)도 따라왔었다. 이징은 산수, 인물, 영모, 묵죽, 화훼 등 모든 분야에 두루 뛰어난 17세기 최고의 화가였다. 1623년 이징은 유희경의 부탁을 받고 그의 별서(別墅)를 묘사한 실경산수화 '임장도(林莊圖)'를 그리기도 했다. 허균은 이징을 가리켜 이정(李楨) 이후 '본국제일수(本國第一手)'라고 극찬했다. 이징도 자연스레 허균과 함께 매창과 어울렸다. 이징이 부안을 떠날 때 매창은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증별(贈別)'이란 시를 써 주었다. 


증별(贈別)-이별하며


我有古秦箏(아유고진쟁) 나에겐 그 옛날 진나라 거문고 있어

一彈百感生(일탄백감생) 한 번 타면 갖가지 감회가 일어나네

世無知此曲(세무지차곡) 세상에는 이 곡조 아는 사람 없기에

 遙和緱山笙(요화구산생) 멀리서 오신 임의 젓대에 화답하리라


1608년 12월 부안에 내려온 지 넉 달만에 허균은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허균이 한양으로 떠나는 날 그의 정치적 동지 이재영(李再榮)과 심광세, 고흥달 등은 조촐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허균은 매창에게 '낙엽이 지는 가을 즈음에는 돌아오겠소' 하고 언약하였다. 하지만 그 언약은 매창이 죽은 뒤에야 지켜질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간 허균은 맏형 허성의 추천으로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에 임명되었다. 


매창은 자신의 시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알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통했던 허균이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마음이 아팠다. 매창은 허균을 세상의 명리를 떠나 가혹한 억압과 착취가 행해지던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진정한 풍류객이라 생각했다. 그런 허균이었기에 그와의 이별은 매창의 가슴을 더욱 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자상(自傷) 2-홀로 마음 아파하며 2


洛下風流客(낙하풍류객) 멀리 한양에서 내려오신 풍류객

淸談交契長(청담교계장) 청담 주고받은 지 오래되었어라

今日飜成別(금일번성별) 오늘 돌연 마음 바꿔 이별하자니

離盃暗斷腸(이배암단장) 이별 술잔에 애간장 끊어지네요


1609년 1월 한양에서 권필(權鞸)이 부안에 내려왔다. 권필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술과 시를 즐기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허균은 일찌기 권필의 시에 대해 '화장을 하지 않은 절대가인이 등불 아래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듯 가성으로 가늘게 내는 높은 소리인 알운성(遏雲聲)으로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를 번갈아 부르다가 곡이 끝나지 않았는데, 문득 일어나서 가버리는 것과 같다'고 평한 바 있었다. 허균도 인정했듯이 권필은 당대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 


권필은 심광세, 매창 등과 함께 고홍달의 집을 방문하여 시회(詩會)를 열었다. 부안현감을 사직하고 떠나는 심광세의 송별연을 겸한 것이기도 했다. 어지러운 한양의 조정을 떠나 자원해서 부안으로 부임한 심광세는 모친상을 당해 부안현감을 사직하고 부안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권필이 먼저 부안의 산 속에서 묻혀 지내는 고흥달을 위해 '제고달부홍유거(題高達夫弘幽居)'를 읊었다. 권필은 고홍달과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반가움을 시를 통해 전했다. 


제고달부홍유거(題高達夫弘幽居)

고홍달이 그윽한 곳에 거주하는 것에 제하며


一別身仍遠(일별신잉원) 한번 이별한 뒤 몸이 멀어졌다가

重來歲已華(중래세이화) 다시 오니 세월이 많이 흘렀어라

無端半夜雨(무단반야우) 한밤중에 끝없이 비가 내리더니

更發幾枝花(갱발기지화) 몇 가지에 또 다시 꽃을 틔웠네

 古縣山圍野(고현산위야) 옛 고을에는 산이 들판 에워쌌고 

春塘水沒沙(춘당수볼사) 봄 연못에는 물이 모래 덮었구나

知君好看客(지군호간객) 그대가 나그네 좋아하는 줄 아니

忘却在天涯(망각재천애) 하늘 끝 타향에 있는 줄도 잊었네

 

심광세는 권필의 시에서 차운하여 '차석주증고달부운(次石洲贈高達夫韻)'이란 제목의 시 두 편을 연달아 읊었다. 심광세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연산군 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나열한 악부시(樂府詩) '해동악부(海東樂府)'를 쓸 정도로 시에도 능했다. 심광세는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슬펐다. 어머니의 죽음과 세월의 무상함은 그를 더욱 더 서글프게 했다.


차석주증고달부운(次石洲贈高達夫韻) 1

권필이 고홍달에게 주는 시에 차운하여 1


餘生離順境(여생리순경) 남은 생애는 순탄한 삶에서 벗어나

幾度送年華(기도송년화) 그런 세월 몇 번 보낼 수 있으려나

萬事凋霜鬢(만사조상빈) 모든 일은 흰 귀밑머리처럼 시들고

三杯纈眼花(삼배힐안화) 석 잔 술에도 취해 눈동자 흐릿하네

逢迎欣握手(봉영흔악수) 만나서 반가와 손을 덥석 잡았지만

憔悴更懷沙(초췌갱회사) 초췌한 모습 굴원을 생각나게 하네

怊悵今朝別(초창금조별) 아 슬퍼라 오늘 아침에 이별함이여

翻同嶺海涯(번동령해애) 몸을 돌이키면 바다 끝 넘어가겠지


차석주증고달부운(次石洲贈高達夫韻) 2

권필이 고홍달에게 주는 시에 차운하여 2

 

行吟良踽踽(행음량우우) 시를 읊조리며 쓸쓸히 걸으며 보니

贏得鬢添華(영득빈첨화)  귀밑머리에 피어난 꽃만 남았어라

臘酒仍浮蟻(랍주잉부의) 지난해 담근 술 익어 지게미 떠있고

寒梅已着花(한매이착화) 한겨울 매화나무엔 꽃 벌써 피었네

風霜餘短褐(풍상여단갈) 모진 세월에 거친 베옷만 남았는데

 身世老長沙(신세노장사) 장사에서 늙어가는 신세가 되었어라

昨夜三更夢(작야삼경몽) 지나간 밤 삼경쯤에 꿈을 꾸었는데

分明漢水涯(분명한수애) 분명코 한수 끝 한양이 보이더라오


좌중의 분위기는 심광세의 시로 인해 가라앉고 말았다. 매창은 권필과 심광세의 시에서 차운하여 '선유(仙遊) 3'을 지어 읊었다. 매창이 시를 읊고 나자 좌중의 분위기는 다시 살아났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이 시를 읊었지만 부안에 홀로 남게 될 매창의 마음은 오히려 더 쓸쓸다. 권필과 심광세, 고홍달, 매창 이 네 사람은 아마도 밤이 새도록 시주(詩酒)를 나누었을 것이다.  


선유(仙遊) 3-신선세계에 올라 놀다 3


樽酒相逢處(준주상봉처) 두 사람 서로 만나 술잔을 나누는데

東風物色華(동풍물색화) 봄바람까지 불어와 물색도 화려하네

綠垂池畔柳(녹수지반류) 실버들은 하느적 연못가에 드리웠고

紅綻檻前花(홍탄함전화) 누각 앞 꽃봉오리들은 붉게 터뜨리네

孤鶴歸長浦(고학귀장포) 외로운 학은 홀로 물가로 돌아오는데

殘霞落晩沙(잔하낙만사) 날 저문 모래밭엔 저녁노을 드리웠네

臨盃還脈脈(임배환맥맥) 술잔을 맞들고 하염없이 바라보지만

明日各天涯(명일각천애) 날 밝으면 각각 하늘 끝에 가 있으리


권필은 이원형(李元亨), 매창과 함께 성황산에 있는 전 부안현감 윤선의 선정비를 찾았다. 매창은 윤선의 선정비 앞 금대(琴臺)에 앉아 거문고를 타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고사(鶿鴣詞)'란 노래를 불렀다. 윤선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노래였다. 그 모습을 본 고을 사람들은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은 허균의 귀에도 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은 허균은 선정비 앞에서의 일을 나무라는 편지를 매창에게 보냈다.   


매창은 한양으로 떠난 시벗 심광세가 그리웠다. 심광세도 허균만큼이나 매창의 시재를 아꼈다. 그의 소개로 매창은 많은 문인들을 만났다. 그런 심광세가 부안을 떠나고 없으니 매창은 몹시 허전했을 것이다. 매창은 자신을 알아줄 이 없음을 한탄했다. 그래서 심광세가 더욱 더 그리웠다.  


자한(自恨) 3-스스로 한탄하다 3


含情還不語(함정환불어) 마음에 품은 뜻 말할 수가 없으니 

如夢復如癡(여몽부여치) 꿈 속과도 같고 바보와도 같아라 

綠綺江南曲(녹기강남곡) 거문고를 안고서 강남곡 타보지만

無人問所思(무인문소사) 이 내 심사 물어보는 사람도 없네 


자상(自傷) 4-홀로 마음 아파하며 4


夢罷悲風雨(몽파비풍우) 꿈 깨니 비 바람에 서글퍼지고 

沈吟行路難(침음행로난) 행로난이나 나직이 읊어본다네 

慇懃梁上燕(은근양상연) 무심하구나 대들보 위의 제비여

何日喚人還(하일환인환) 어느 날에야 임을 불러오게 하리


시벗이 된 권필과 매창은 자주 만나 시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 매창이 '탄금(彈琴)'이라는 시를 짓자, 권필은 '증천향여반(贈天香女伴)'이라는 시로 화답했다. 살구꽃이 떨어질 무렵 권필이 찾아와 '무제(無題)'라는 시를 주자, 매창은 '춘수(春愁) 1'라는 시를 지어 화답했다.


탄금(彈琴)-거문고를 타며 


誰憐綠綺訴丹哀(수련연기소단충) 거문고로 속마음 호소한들 누가 불쌍타 하랴

萬恨千愁一曲中(만한천수일곡중)  온갖 원망 갖은 시름 이 한 곡조에 담았어라

重奏江南春欲暮(중주강남춘욕모)  강남곡을 거듭 타는 동안에 봄도 저물어가네

不堪回首泣東風(불감회수읍동풍) 고개 돌려 봄바람 맞으며 차마 울지 못하겠네



증천향여반(贈天香女伴)-여자 친구 천향에게 주며


仙姿不合在風塵(선자불합재풍진) 선녀 같은 자태 풍진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獨抱瑤琴怨暮春(독포요금원모춘) 홀로 거문고 껴안고 저무는 봄을 원망하누나

絃到斷時腸亦斷(현도단시장역단) 거문고 줄 끊어질 때 애간장 또한 끊어지나니

世間難得賞音人(세간난득상음인) 세상에 그 소리 알아주는 이 만나기 어려워라


무제(無題)


江潭芳草綠萋萋(강담방초록처처) 강 가에 풀꽃은 파릇파릇 무성한데

別恨撩人路欲迷(별한요인로욕미) 이별로 슬픈 임은 먼 길을 헤매시리

想得洞房春寂寞(상득동방춘적막) 골방에서 임 생각에 봄조차 쓸쓸한데

杏花零落子規啼(행화영락자규제) 살구꽃은 지고 두견새는 울고 있으리


춘수(春愁) 1-봄날의 시름 1


長堤春草色淒淒(장제춘초색처처) 긴 뚝방 위 봄풀은 빛이 스산하여서

舊客還來思欲迷(구객환래사욕미) 옛 임 오시다가 길을 잃었나 하겠네

故國繁華同樂處(고국번화동락처) 그 옛날 꽃 만발해 함께 노닐던 곳도

滿山明月杜鵑啼(만산명월두견제) 달빛 가득한 산에 두견새만 우는구나


부안을 유람하던 권필도 기한이 다 되어 서울로 떠나게 되었다. 매창은 또 다시 부안 땅에 홀로 남았다. 그녀의 곁에 영원히 머무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기녀 매창의 운명이었다.9월 허균은 매창에게 부안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10월 허균의 친구 이원형은 매창이 윤선의 선정비 앞에서 거문고를 타며 '자고사'를 부르던 모습을 보고 '윤공비(尹公碑)'란 시를 지었다. 그런데, 또 그 소문이 잘못 나서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있던 허균은 세 차례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윤공비(尹公碑)-윤선의 선정비


一曲瑤琴怨鷓鴣(일곡요금원자고) 거문고 한 곡조 뜯으며 자고새 원망하는데

 荒碑無語月輪孤(황비무어월륜고) 묵은 비석은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구나

 峴山當日征南石(현산당일정남석) 현산이라 그 옛날 진나라 양호의 비석에도 

亦有佳人墮淚無(역유가인타루무) 눈물을 떨어뜨린 아름다운 사람 있었던가 


허균은 억울한 사정을 적은 편지를 이원형에게 보내왔다. 이래저래 구설수에 오른 매창은 괴롭기 짝이 없었다. 자신과 이원형을 오해한 사람들과 허균을 탄핵한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원망스러웠다. 매창의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치고 몸에는 병만 남았다. 


병중(病中) 2-병이 들어 2


 誤被浮虛說(오피부허설) 잘못은 없다지만 헛소문 떠도니 

還爲衆口暄(환위중구훤) 도리어 여러 사람 입방아 거리네

空將愁與恨(공장수여한) 공연히 시름과 원망만 쌓이노니

抱病掩柴門(포병엄시문) 병듦을 핑계삼아 사립문 닫노라


病中愁思(병중수사)-병들고 시름겨워


空閨養拙病餘身(공규양졸병여신) 홀몸 제대로 돌보지 못해 몸에는 병만 남고

長任飢寒四十春(장임기한사십춘) 춥고 배고프게 보낸 사십 년 길기도 하여라

借問人生能幾許(차문인생능기허) 묻노니 우리네 인생살이 그 얼마나 되는가

  胸懷無日不沾巾(흉회무일불첨건) 가슴에 맺힌 회한과 눈물 마를 날이 없어라 


1610년에 들어와서 매창의 병은 더욱 더 깊어갔다. 자신의 병이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은 매창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죽음을 앞둔 매창은 피울음을 삼키며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농학(籠鶴)-새장에 갇힌 학


  一鎖樊籠歸路隔(일쇄번롱귀로격) 새장 속에 갇힌 뒤 돌아갈 길이 막혔으니 

崑崙何處閬風高(곤륜하처낭풍고) 곤륜산 어드메에 낭풍대 높이 솟았던가

靑田日暮蒼空斷(청전일모창공단) 푸른 들판에 해는 지고 창공도 끊어지고

緱嶺月明魂夢勞(구령월명혼몽로) 구씨산 밝은 달은 꿈속에서도 괴로와라

瘦影無儔愁獨立(수영무주수독립) 짝 잃고 야윈 몸으로 시름겹게 사노라니

昏鴉自得萬林噪(혼아자득만림조) 황혼녘에 까마귀떼만 시끄럽게 지저귀네

長毛病翼摧零盡(장모병익최영진) 긴 털 병든 날개는 꺾여 죽음이 가까운데

哀唳年年憶九臯(애려년연억구고) 해마다 슬피 울며 먼 하늘연못 생각하네


매창은 마지막으로 유희경에게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절명시를 남긴 그해 여름 평생을 새장에 갇힌 학의 신세로 살아온 매창은 한많은 이승의 삶을 마치고 하늘나라 여행을 떠났다. 매창의 나이 38세였다. 


結約桃園洞裏仙(결약도원동리선) 도원에 맹세할 때는 선녀같던 이 몸이

豈知今日事悽然(기지금일사처연) 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坐懷暗恨五絃曲(좌회암한오현곡) 애닯은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어 볼까

萬意千思賦一篇(만의천사부일편) 가락가락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 볼까

塵世是非多苦海(진세시비다고해) 이 풍진 세상 고해에는 말썽도 많아서

深閨永夜苦如年(심규영야고여년) 홀로 새는 이 밤이 몇 해인 듯 길구나

藍橋欲暮重回首(남교욕모중회수) 남교에 날도 저물어 고개를 돌려 보니

靑疊雲山隔眼前(청첩운산격안전) 구름 속에 첩첩 청산 눈앞을 가리우네 


그녀는 죽어서야 비로소 좁고 답답한 새장을 벗어나 창공을 훨훨 날아가는 자유인이 되었다. 유언에 따라 그녀는 부안 봉덕리 공동묘지에 평생을 함께 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매창이 묻힌 뒤 사람들은 이 공동묘지를 매창이뜸이라고 불렀다. 


매창은 자신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당시 첩실제도가 있었음에도 자신을 기적에서 빼내어 첩으로 들이지 못한 유희경에 대한 사랑과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창의 부음을 접한 유희경은 절명시를 쓰면서 죽어간 매창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매창을 탈기적시켜 면천시켜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그의 가슴은 더욱 아팠다. 유희경은 붓을 들어 시로써 매창의 죽음을 애도했다. 


도옥진(悼玉眞)-옥진의 죽음을 애도하며


香魂忽駕白雲去(향혼홀가백운거) 향기로운 넋 홀연 흰구름 타고 떠나는데

碧落微茫歸路賖(벽락미망귀로사) 푸른 하늘 아득히 가는 길 멀기만 하노라

只有梨園餘一曲(지유리원여일고) 다만 배나무 동산에 노래 한곡 남아 있어

王孫爭說玉眞歌(왕손쟁설옥진가) 귀공자들 다투어 옥진의 노래를 말한다오


차임정자도옥진운(次任正字悼玉眞韻)-임정자의 옥진 애도시에 차운하여


明眸皓齒翠眉娘(명모호치취미낭)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썹 계랑이여

 忽逐浮雲入杳茫(홀축부운입묘망) 홀연히 뜬구름 따라 간 곳 아득하구나

縱是芳魂歸浿色(종시방혼귀패색) 꽃다운 넋은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誰將玉骨葬家鄕(수장옥골장가향) 그 누가 그대의 옥골 고향에 묻어주리

更無旅襯新交弔(갱무여친신교조) 객지의 초상이라 문상객도 다시 없고

只有粧奩舊日香(지유장렴구일향) 오로지 경대만 남아 옛 향기 그윽하네

丁未年間辛相遇(정미년간행상우) 정미년간 다행히도 서로 만나 즐겼건만

  不堪哀淚濕衣裳(불감애루습의상) 이젠 애닯은 눈물만 흘러 옷깃 적시네   


매창의 부음을 들은 허균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매창으로 인해 곤경을 겪기도 했으나 허균은 진정으로 그녀의 시재를 아끼고 사랑했다. 허균과 매창은 오래 사귀었으나 서로 몸을 나누지는 않았다. 매창은 음란함을 즐기지 않았고, 허균은 난잡함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우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런 매창이 허균을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났으니 어찌 애통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랴! 허균은 피울음을 토하며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 수를 올렸다.


허균의 '애계랑' 시비


애계랑(哀桂娘)-매창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堪擒錦(묘구감금금) 아름다운 문장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淸歌解駐雲(청가해주운) 청아한 노래는 하늘의 구름도 멈추게 하네 

偸桃來下界(투도래하계) 복숭아를 훔친 죄로 인간세계에 내려와서 

竊藥去人群(절약거인군)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등암부용장) 부용꽃 수놓은 휘장에는 등불조차 어둡고 

香殘翡翠裙(향잔비취군) 비취색 치마에는 향내 아직도 남아있는데 

明年小桃發(명년소도발) 이듬해 작은 복사꽃 활짝 피어날 때 쯤엔 

誰過薛濤墳(수과설도분) 그 누가 악기 설도의 무덤곁을 지나가려나


 凄絶班姬扇(처절반희선) 처량하도다 반첩여가 부치던 가을 부채여 

悲凉卓女琴(비량탁녀금) 구슬프기도 해라 탁문군 타던 거문고일세

飄花空積恨(표화공적한) 흩날리는 꽃잎엔 속절없이 한만 쌓이는데

衰蕙只傷心(쇠혜지상심) 시들은 향초에 오로지 마음만 상할 뿐이네

 蓬島雲無迹(봉도운무적) 봉래도라 구름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는데 

 滄溟月已沈(명월이침) 넓고 큰 바다에는 달도 이미 져서 어두워라

 他年蘇小宅(타년소소댁) 먼훗날 봄이 와 항주미인 소소의 집 찾으면

殘柳不成陰(잔류부성음) 남은 버드나무는 그늘도 드리우지 못하리

 

허균은 매창이 죽은 그해 10월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취소되고, 11월 1일 별시문과 대독관이 임명되었으나 조카들을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12월에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1611년 4월 23일 허균은 유배지에서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64권(지금은 26권만 전해 짐)을 완성했다. '성소부부고' 권25 설부(說部) 4에 수록된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그는 매창의 시를 처음 소개하고 평했다. 8월에는 허균의 맏형 허성이 죽었다. 


허균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매창의 시벗 권필은 광해군 외척의 인사 농단과 언로 탄압을 풍자하는 '문임무속삭과(聞任茂叔削科)' 일명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가 왕의 친국 후에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길에 올랐다. 그는 한양을 떠나면서 동대문 밖 주막에 들러 폭음을 하고는 이튿날 장독으로 죽었다.    


1612년 11월 유배에서 풀려난 허균은 다시 부안으로 왔지만 매창이 없는 부안은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허균은 부안에 머물면서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썼다. '홍길동전'은 조선 인조 때를 배경으로 신분제와 적서차별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자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이 소설은 당시 억압과 착취에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허균이 평생 사대부 문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서류 문인들과 교류한 것도 적서차별에서 사회적 모순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허균은 부패한 조선 사회와 어지러운 광해군 정권을 뒤엎어버리고 차별이 없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 소설 '홍길동전'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허균의 혁명 기도는 그의 제자 기준격(奇俊格)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허균을 아꼈던 광해군은 친국 후에 처형을 망설였다. 허균과 벼슬 동기였던 이이첨(李爾瞻)은 광해군을 협박하여 처형을 서둘렀다. 1618년 8월 24일 허균은 결안(結案)도 없이 그의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 사거리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했다. 


허균을 배신하고 이이첨에 붙었던 이재영도 6년 뒤 능지처사를 당했다. 허균이 처형당한 바로 그 자리였다. 이재영은 허균이 평생 동지로 생각하고 돌봐 주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1613년 혁명적 사상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과 관련된 기축사화(己丑士禍, 己丑獄事)에서 서자 친구들 6명이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이재영은 허균의 혁명에 반대하고 이이첨에 붙었던 것이다.     


부안현감 시절 매창과 가깝게 지냈던 심광세는 정4품 관직인 응교(應敎)까지 올랐다. 그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나자 성묘하러 고향에 갔다가 피난한 인조의 행재소로 가던 중 부여에서 병으로 죽었다. 같은해 임서도 세상을 떠났다. 임서는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어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까지 올랐다. 인조반정으로 자신의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영돈녕부사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진 한준겸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자를 전주에 시종한 뒤 죽었다. 김제군수로 내려왔다가 매창을 총애했던 이귀는 이조판서까지 올랐다가 1633년에 죽었다. 


매창의 정인 유희경은 종2품 관직인 가의대부(嘉義大夫)까지 올랐으며, 92세까지 장수한 뒤 1636년에 죽었다. 윤선은 정2품 관직인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고 1637년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권필과 깊이 교유했던 고홍달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부안에 은거하면서 학문만 닦다가 1644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매창의 첫 남자 서우관과 화가 이징의 사망에 관한 기록은 없다.


매창은 그녀의 무덤을 돌볼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매창을 아낀 나무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매창이 죽은 뒤 45년이 지난 1655년 부안의 풍류단체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그녀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다. 


매창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수백 편의 시를 남겼다. 그녀의 시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의 시는 거의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전들에 의해 구전되던 그녀의 시 58수는 1668년 10월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 '매창집'으로 간행되었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는 한준겸의 외손자인 여성제(呂聖濟)였다.


1807년 부안에 대대로 뿌리를 박고 살던 진주 김씨 가문의 김정환이 '매창집'을 필사하면서 목판본에서 볼 수 없는 시와 주석을 덧붙였다. 1655년에 세운 매창 묘 앞의 비석은 세월이 많이 지나 글자가 많이 깨지고 이지러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풍시사는 1917년에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다시 세웠다. 

 

매창의 묘는 1983년 8월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됐다. 1974년 4월 27일 매창기념사업회는 매창이 즐겨 노닐던 성황산 기슭 서림공원 금대와 혜천(惠泉) 중간쯤에 매창의 시비(詩碑)를 세웠다. 매창 시비를 세우던 날 김월하(金月荷) 명창은 매창이 쓴 시조 '이화우'를 읊었다. 2001년 4월 부안군은 매창이뜸 일대의 공동묘지에 있던 무덤 천여 기를 이장하고 매창과 명창 이중선(李中仙)의 묘만 남겨 매창공원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조시인 이병기(李秉岐)는 매창의 무덤을 찾아 그녀를 기리는 시조 '매창뜸'을 읊었다. 이병기는 익산 출신으로 술과 시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매창에 대한 애상이 진하게 묻어나는 시조다. 


이병기 '매창뜸' 시비


梅窓뜸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항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羅彩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이 간 지 400여 년도 더 지났다. 매창뜸에 서 있자니 어디선가 매창이 '이화우'를 읊으면서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400여 년 전 어느 봄날 이화우를 흩뿌렸던 그 매화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매창은 가고 그녀의 시 58수만 남아 후세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매창의 무덤 앞에서 기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한 많은 삶과 유희경과의 애닯은 사랑을 생각하다. 부안삼절 매창을 기리며 그녀의 무덤 앞에 시 한 수를 올리다. 


남녘 땅 부안삼절 매창 묘를 찾아드니

이화우 오동우 보일 듯 간 곳 없고

어즈버 찬바람에 낙엽우만 흩날리네


2017.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