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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 규슈(九州) 여행 - 오이타 현(大分県) 우사 신궁(宇佐神宮)

林 山 2018. 3. 2. 15:24

우사 진구(宇佐神宮, うさじんぐう, 우사 신궁)는 일본 규슈(九州) 북동부 오이타 현(大分県) 우사 시(宇佐市)에 있다. 구 부젠(豊前) 국의 남동단과 구 분고(豊後) 국의 경계에 위치한 우사 시는 규슈 본토와 구니사키 반도(国東半島)의 경계 지점 북안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은 스오나다(周防灘), 서쪽은 나카쓰 시(中津市), 남쪽은 구스 정(玖珠町)과 유후 시(由布市), 동쪽은 기쓰키 시(杵築市), 분고타카다 시(豊後高田市)와 인접해 있다. 우사 진구 주변에는 주변에 오이타 현립 역사박물관(大分県立歴史博物館), 신야마타이코쿠(新邪馬台国), 도코사 오백나한(東光寺五百羅漢), 오기쿠노이케(小菊の池) 등이 있다.


기타규슈 지도(출처 네이버 hara1234567)


신토(神道)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민속 신앙(民俗信仰)과 자연 신앙(自然信仰)을 바탕으로 성립된 고유의 다신교(多神敎, polytheism)적 신앙이다. 신토는 호족층이 다스리던 중앙 및 지방 정치체제와 깊은 연관을 가지면서 70% 이상의 일본인들이 믿는 종교로 성장했다. 


우주 삼라만상에 신이 머문다고 여기는 일본인들은 다카아마하라(高天原)에 있거나 거기에서 내려온 아마쓰카미(天律神), 땅에서 생겨났거나 아마쓰카미에게서 태어난 구니쓰카미(国律神), 선조의 영혼으로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생전의 모습을 잃었거나 그 집합체로서 존재하는 소레이(祖靈) 등을 모시고 지내는 제사를 중시한다. 신토는 다른 종교와 달리 명확한 교리나 경전이 없다. 그 대신 '고지키(古事記)', '니혼쇼키(日本書紀)', '고고슈이(古語拾遺)', '센묘(宣命)' 등 '신전(神典)'이라 불리는 고전들을 그 규범으로 삼는다. 


현대의 신토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중기에 편찬된 율령의 시행세칙인 엔기식(延喜式)을 기준으로 옛날부터 야마토 정권(大和政權, 250~710)에서 제사를 지내던 신들을 중심으로 재편하고, 불교 및 조상신 등 지방의 신들을 합쳐 이세 진구(伊勢神宮)를 본종으로 하여 진쟈혼초(神社本庁)에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관리하고 있다. 진쟈혼초는 현재 일본 전역의 97,000여 개의 신사 대부분을 총괄하고 있다.


일본의 신토 신앙에 근거해서 고래의 토속신들을 모시는 건물을 진쟈(神社)라고 한다. 진쟈는 그 장소에 머무는 신을 모시는 제사 시설이다. 그래서 진쟈를 해상이나 산꼭대기, 건물의 옥상에 세우기도 한다. 진쟈는 원래 교회나 모스크 등 예배를 위한 예배당이나 교리를 전파하는 포교소와는 그 성격이 상당히 달라서 참배나 결혼식을 위한 시설이 없었다. 최근 시대의 추세에 맞춰 예배소와 예식장 시설을 갖춘 진쟈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제사 대상은 신토의 신, 민속신 외에도 매우 다양하다. 실재의 인물이나 신화, 전설, 설화 속의 주인공을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불교의 부처나 보살, 도교의 신 등 외래의 신도 제사 대상에 포함된다. 닭, 비둘기, 소, 뱀, 까마귀, 원숭이, 거북, 삼족오, 왜가리, 사슴, 멧돼지, 토끼, 여우, 장어, 늑대 등 동물도 신으로 모신다. 곡물신을 모시는 신사도 있다.    


진쟈의 기원은 이와쿠라(磐座, 신이 머무는 산속의 큰 바위나 절벽)나 킨소쿠치(禁足地, 신이 머무는 장소) 등에서 제사를 지낼 때 임시로 세운 히모로기(神籬) 같은 제단이었다. 그 원형은 오키나와 현(沖縄県)의 우타키(御嶽)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오래된 진쟈에는 본전(本殿)이 없는 곳이 있으며, 이와쿠라(磐座)나 킨소쿠치(禁足地)의 산과 섬에는 가까운 곳에 배전(拜殿)만 있는 곳도 있다. 진쟈에도 신전(神殿)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 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다. 신전을 세운 이후 진쟈에는 언제나 신이 머물고 있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일본의 신토 신앙은 1868년부터 시작된 메이지 유신(明治维新) 이후 일본 제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 제국 정부는 황국사관(皇國史觀)을 바탕으로 덴노(天皇)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국가가 조직적으로 신토를 관리하는 전체주의적 종교 정책을 실시했다. 이른바 곳카신토(國家神道)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연합국총사령부(聯合國總司令部, GHQ)가 신도지령(神道指令)을 발표하면서 곳카신토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진쟈 주위에는 일반적으로 '신의 숲'으로 불리는 산이나 숲이 있다. 진쟈 입구에는 속계(俗界)와 신계(神界)의 경계를 나타내는 도리이(鳥居)가 있다. 도리이는 불교 사원의 일주문에 해당한다. 참배길의 곁에는 몸을 깨끗하게 씻기 위한 초즈야(手水所), 진쟈를 관리하는 사무소 등이 있다. 큰 진쟈에는 가미케(연못)나 진바시(떡집)가 있는 경우도 있다. 시메나와(注連縄, 금줄)가 걸려 있는 가미키(神木)는 거의 모든 진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신전은 일반적으로 앞쪽의 하이덴(拝殿)과 뒤쪽의 혼덴(本殿, 正殿)으로 구성된다. 참예자가 절을 하고 박수를 치면서 참배하는 전각이 하이덴, 신체를 안치하거나 신령을 모시는 전각이 혼덴이다. 혼덴과 하이덴 사이에 참예자가 폐백을 올리기 위한 헤이덴(幣殿)이 설치되어 있는 신사도 있다.


진쟈의 경내에는 주신을 모시는 세쓰샤(摂社), 그 외의 신을 모시는 마쓰샤(末社)가 있는데, 이들을 아울러 세쓰마쓰샤(摂末社)라고 부른다. 게이가이샤(境外社)는 진쟈 부지 밖에 있는 세쓰마쓰샤다.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시작되는 나라 시대(奈良時代, 710~794)에는 진쟈의 경내에 불교의 부처나 보살을 봉안한 사찰인 진구우지(神宮寺)를 세우기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 초기 일본 제국 정부의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에 의해 진쟈에서 사찰이 분리되면서 경내에 있던 불당이나 석탑 등이 철거되고, 승려와 신관도 구별되었다. 이로 인해 진쟈와 사찰 사이에 문화재 귀속을 놓고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닛코 도쇼 구(日光東照宮)와 린노우지(輪王寺) 사이에 '우는 용'으로 유명한 본지당(本地堂, 린노우지 약사당)을 놓고 벌어진 귀속 분쟁이다. 


신토는 일본 법률에 의해 종교 법인에 속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진쟈의 신관(神官)은 다른 종교와 달리 성직자가 아니라 사이진(祭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일을 맡은 봉사자다. 신관은 기독교나 불교 성직자처럼 포교자로서의 성격도 띠지 않는다. 규모가 작은 진쟈에는 대부분 전속 신관이 없었다. 그래서, 제사가 있을 때는 신관을 불러야만 했다. 진구우지가 있을 경우에는 진구우지의 승려가 진쟈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다. 현재 신관이 되려면 대학에서 신토를 전공하고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졸업을 한 뒤에는 전국의 진쟈에서 신관 연수를 해야 한다. 


일본의 진쟈들은 대부분 유명 진쟈로부터 사이진을 칸죠(勧請, 분령)하고 있다. 칸죠(勧請)란 사이진의 분리된 영혼을 다른 진쟈에 불러 모시는 것이다. 한 촛불에서 다른 촛불로 불을 옮기듯이 신토의 신은 무한하게 칸죠할 수 있고, 사이진은 칸죠해도 본래의 신위(神威)가 손상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칸죠한 진쟈는 그 사이진에게 응한 명칭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진쟈의 명칭도 동일하다. 같은 사이진을 모시는 진쟈끼리는 계열 진쟈로 불린다. 


오이타 현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진쟈의 명칭은 가시마 진구(鹿島神宮), 가스가 타이샤(春日大社), 야사카 진쟈(八坂神社), 무나카타 진쟈(宗像神社), 히에 진쟈(日枝神社)처럼 지명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시는 신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많다. 텐만 구(天満宮), 하치만 진쟈(八幡神社), 이나리 진쟈(稲荷神社), 스미요시 진쟈(住吉神社), 니우쓰히메 진쟈(丹生都比売神社) 등이 그 예다. 시토리 진쟈(椎取神社) 같이 봉재(奉斎)하는 씨족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고, 헤이안 진구(平安神宮)나 야에가키 진쟈(八重垣神社)처럼 사이진에게 관련된 어구를 붙이는 경우도 있다. 쇼콘샤(招魂社), 소레이샤(祖霊社) 등 신사의 종별을 나타내는 명칭도 있고, 로쿠쇼 진쟈(六請神社)나 요하시라 진쟈(四柱神社) 등 사이진의 좌수(座數)에 의한 명칭도 있다. 아사마 진쟈(浅間神社)처럼 유래를 정확히 모르는 진쟈명도 적지 않다. 이나리 진(稲荷神)이나 하치만 진(八幡神)을 모시는 진쟈처럼 전국에 넓게 분포하는 진쟈에는 사명(社名)에 지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伏見稲荷大社), 다자이후 텐만 구(太宰府天満宮), 하코다테 하치만 구(函館八幡宮) 등이 그 예다.


텐만 구(天満宮)처럼 음독으로 사명을 읽는 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텐만 구는 그 근원이 된 사이진인 텐진(天神) 자체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한문어 사명을 갖게 되었다. 하치만 구와 아사마 진쟈는 원래 '야와타', '아키마'라고 훈독했지만, 신불습합 이래 불교의 영향으로 음독명으로 굳어졌다. 하치만 진쟈나 아사마 진쟈는 음독과 훈독의 경우가 다 있지만, 음독으로 사명을 읽는 것은 불교의 영향이다. 


진구(神宮), 구(宮), 타이샤(大社)와 진쟈의 차이는 무엇일까? 타이샤는 원래 시마네 현(島根)의 이즈모 타이샤(出雲大社)에만 쓰이던 명칭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이후 나라 현(奈良)의 카스가 타이샤(春日大社), 나가노 현(長野)의 스와 타이샤(諏訪大社) 등 타이샤 이름을 가진 진쟈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전국의 진쟈에 등급을 매겨서 최상위를 차지한 진쟈에 타이샤라는 사호(社号)를 주었다. 타이샤는 일본 전국의 수많은 동명의 진쟈를 정리하는 권한이 있었다. 조계종으로 말하면 본산(本山)이라고나 할까? 


진쟈에 봉안된 사이진이 왕실(皇室)의 선조이거나 왕족(皇族)과 관련이 깊은 진쟈를 진구(神宮)라고 부른다. 진구는 하치만 다이진(八幡大神)과 히메노 오미카미(比売大神), 진구 코고(神功皇后, 170? ~ 269?) 등 하치만 삼신(八幡三神)이 봉안된 우사 진구, 일본 최고의 신이자 일왕 가문의 선조 여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봉안된 미에 현(三重)의 이세 진구(伊勢神宮), 메이지 일왕(明治天皇, 1852~1912) 부부를 안치한 도쿄의 메이지 진구(明治神宮) 등이 유명하다. 이세 진구는 20년마다 옛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다시 똑같은 건물을 세운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들 세 진구가 바로 일본의 3대 진구다. 일본의 3대 진쟈는 이세 진구, 이즈모 타이샤, 나라 현 사쿠라이 시(櫻井市) 오미와 진쟈(大神神社)다.


구(宮)도 진구(神宮)와 마찬가지로 왕족과 관계가 깊은 진쟈다. 구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1684~1751),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를 신으로 모시는 진쟈 우에노 도쇼 구(上野東照宮)와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를 안치한 진쟈 다자이후 텐만 구(太宰府天満宮)가 유명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요시무네, 요시노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등은 일왕가(天皇家)의 남자라는 뜻으로 신노우(親王)라고 불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마지막 바쿠후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江戶幕府, 1603~1867)의 창시자다.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戰鬪)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일본의 패자(覇者)가 되자, 실권은 없고 의례적인 권위만 있던 일왕은 1603년 그에게 쇼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일본 최강의 다이묘(大名) 이에야스가 덴노로부터 일본 최고의 권력자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덴노의 이름 아래 이에야스는 일본의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도쿠가와 바쿠후의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마지막 쇼군이다. 요시노부는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비교적 평화적인 정권교체인 메이지 유신의 달성에 일익을 담당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헤이안 시대 일본 제일의 천재라고 칭송받은 인물이다. 격은 낮지만 학자 가문인 스가와라 가(菅原家)에서 태어나 신분적 한계와 일왕의 외척인 후지와라 가(藤原家)의 견제를 극복하고 재상급인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오른 인물이다. 


최근 일본의 수상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 등 A급 전범 14명을 안치한 야스쿠니 진쟈(靖國神社, 長州神社)를 참배하면서 한국, 중국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를 입은 국가들의 거센 비난을 사고 있다. 1869년(메이지 2) 메이지 일왕은 메이지 유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3,588명을 제사지내기 위해 도쿄 쇼콘샤(東京招魂社)를 창건했다. 1879년 메이지 일왕은 전몰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사명을 도쿄 쇼콘자에서 야스쿠니 진쟈로 바꿨는데, '나라를 안정케 한다.'는 뜻의 '야스쿠니(靖国)'는 '좌씨춘추(左氏春秋)'의 '吾以靖國也(오이정국야)'에서 따온 것이다. 


벚꽃 명소로도 유명한 야스쿠니 진쟈에는 만주사변(滿洲事變), 중일전쟁(中日戰爭),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美日戰爭) 등 침략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도 합사되어 현재는 제사의 대상이 약 250만 명에 이른다. 태평양전쟁에서 악명을 떨쳤던 자살특공대 가미카제(神風)도 이곳에 합사되어 있다. 그만큼 야스쿠니 진쟈에 대한 일본 왕실의 숭배심도 두텁다. 1945년 이전에는 일왕 숭배와 군국주의 보급에 야스쿠니 진쟈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가 관리에서 벗어나 단독 종교법인으로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 총리 등 정부 관리의 공식적인 야스쿠니 진쟈 참배는 이곳에 합사된 침략전쟁 전범들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던 주변 피해국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지난날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식민지 지배로 고통을 준 나라들에게 진정 용서를 구한다면 일본 정부 각료들의 공식적인 야스쿠니 진쟈 참배부터 즉각 중단해야 한다. 영미권 언론에서 야스쿠니 진쟈를 '전쟁 진쟈(戰爭神社, war shrine)'라는 용어로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은 알고 있는가? 일본은 전후 피해 당사국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 나아가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독일을 본받아야 한다. 속좁은 일본인, 영원한 이류국가로 불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우사 진구 지도(출처 천사랑세계여행)


하치만 다이진(八幡大神)과 히메노 오미카미(比売大神), 진구 코고(神功皇后) 등 하치만 삼신(八幡三神)을 모시는 우사 진구는 725년에 창건되었다. 우사 진구는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4만여 하치만 구(八幡)의 총본부이다. 그래서 정월에는 일본 전국에서 수많은 참배객들이 몰려온다. 우사 진구를 우사 하치만(宇佐八幡), 우사 하치만 구(宇佐八幡宮)라고도 한다. 또, 하치만 진을 제사지내는 진쟈를 하치만 구, 하치만 진쟈, 하치만 노야시로(八幡社), 하치만 님(八幡さま), 와카야마 진쟈(若宮神社)라고도 부른다. 하치만 진쟈는 이나바 진쟈(稲荷神社)에 이어 일본 전국 2위 규모다. 


우사 진구 경내에는 하치만 삼신을 안치한 조구(上宮)을 비롯해서 왕의 후궁들을 안치한 게구(下宮), 그리고 임시 신궁인 돈구(頓宮) 등이 있다. 닌토쿠 덴노(仁徳天皇, 257~399), 오야마쓰미(大山積尊),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등을 모시는 말사(末社) 진쟈(神社)도 있다. 입구에서 조구 본전에 이르는 곳곳에는 쿠루 진쟈(黒男神社), 와카미야 진쟈(若宮神社), 야사카 진쟈(八板神社), 하루미야 진쟈(春宮神社),  가메야마 진쟈(龜山神社), 모쿠타쿠미소 진쟈(木匠祖神社), 미주와케 진쟈(水分神社), 야코 진쟈(八子神社) 등이 자리잡고 있다. 근처 오모토 산(御許山) 위에는 외궁(外宮)인 오모토 진쟈(大許神社)가  있다. 


우사 진구에서는 하치만 다이진, 히메노 카미, 진구 코고 등 하치만 삼신을 모시지만 신사에 따라서는 히메노 오미카미, 진구 코고 대신 주아이 덴노(仲哀天皇, ? ~ 200)나 다케노우치노 스쿠네(武内宿禰), 다마요리히메노 미코토(玉依姫命)를 모시기도 한다. 일본 3대 하치만 구는 우사 진구를 비롯해서 교토 부(京都府) 야와타 시(八幡市)의 이와시미즈 하치만 구(石清水八幡宮), 후쿠오카 시(福岡市)의 하코자키 하치만 구(筥崎八幡宮)를 꼽는다. 하코자키 하치만 구 대신 가마쿠라 시(鎌倉市)의 쓰루가오카 하치만 구(鶴岡八幡宮)를 넣기도 한다. '하치만 우사 구 어선탁집(八幡宇佐宮御託宣集)'에는 후쿠오카 현(福岡県) 이즈카 시(飯塚市) 소재 다이부 하치만 구(大分八幡宮)가 우사 진구의 본궁이자 하코자키 구(筥崎宮)의 원궁(元宮)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치만 우사 구 어선탁집' 등에는 긴메이 덴노(欽明天皇, 재위 539~571) 32년(571년) 정월 초하루 호무타노 스메라미코토 히로하타노 하치만마로(誉田天皇広幡八幡麿)라고 자칭하는 하치만 다이진이 우사(宇佐) 땅에 나타났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하치만 다이진은 오진 덴노(応神天皇, 재위 270~310)의 신령과 동일시되었다. 하치만은 훈독으로 야하타노 카미(やはたのかみ)라고도 읽으며, 혼다와케노 미코토(誉田別命)라고 불렸다. 


하치만 다이진은 원래 기타큐슈(北九州)의 호족이었던 구니노미야쓰코(国造) 우사 씨(宇佐氏)의 씨족신(氏族神)으로 농업, 항해,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민속학자인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는 하치만 다이진을 대장장이 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치만 다이진에게 최초로 제사를 지낸 사람은 긴메이 덴노 때 오카노 히키(大神比義)로 알려져 있다. 


하치만 다이진은 우사 진구에서 제사를 받든 이후 신탁을 잘 내리는 등 많은 영험을 보이며 야마토 정권의 수호신이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92~1333)의 군담소설 '조큐기(承久記)'에 '일본국의 제위(帝位)는 이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하치만 대보살께서 점지하시는 바'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하치만 다이진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버금가는 일본 왕실의 수호신으로 간주되었다. 예로부터 오진 덴노와의 깊은 연고로 인해 호무타 하치만 구(誉田八幡宮)가 창건되었으며, 일본 왕실도 우사 진구나 이와시미즈 하치만 구를 이세 진구만큼이나 중요한 진쟈로 여기고 숭배했다.


하치만 다이진은 과연 오진 덴노의 혼령일까? 나라 시대(710~794)의 '고지키(古事記)'나 '니혼쇼키(日本書紀)', 헤이안 시대(794~1185)의 '쇼쿠니혼기(続日本紀)'에는 하치만 다이진이 오진 덴노의 혼령이라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하치만 다이진의 유래를 오진 덴노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치만 다이진이 오진 덴노라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스미요시 타이샤 진다이키(住吉大社神代記, 789)'와 12세기 역사서 '도다이지 요로쿠(東大寺要錄)'다. 나라 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하치만 다이진과 오진 덴노가 동일시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하치만 다이진은 일본 왕실의 조상신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요로(養老) 4년(720년) 규슈 사츠마(薩摩), 오스미(大隅) 등지에서 하야토(隼人)의 난이 일어나자 일본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우사 하치만 다이진에게 신탁을 받도록 했다. 이에 하치만 다이진은 '내가 친히 정벌하러 내려가 항복시키겠다.'는 신탁을 내렸다고 한다.  


'니혼료이키(日本霊異記)'의 야하타노 카미(矢幡神)나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제22첩 다마카즈라(玉鬘)의 야하타노 미야(ヤハタの宮)처럼 처음에는 '八幡大神'을 '야하타노 오미카미'로 훈독했지만, 신불습합이 이루어지면서 불교 방식대로 점차 음독 '하치만 다이진'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하타(幡)는 신이 내려오는 강림처로서의 깃발, 야하타(八幡)는 여덟(많은) 깃발을 의미한다. 전설에는 진구 코고가 삼한정벌(三韓征伐)을 위해 쓰시마(對馬)에 이르렀을 때 제단에 여덟 개의 깃발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 오진 덴노가 태어났을 때도 지붕 위에 여덟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고 한다.  


'하치만 우사 구 어선탁집' 권2와 권6에는 덴표 20년(748년) 9월 1일 하치만 다이진이 '나는 오래전 진단국(震旦国, 고대 중국)에 강림하였으며, 지금은 일역(日域, 일본)을 진수하는 대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부젠 국 풍토기(豊前国風土記)'에는 '옛날 신라국의 신이 건너오셔서 가와라(河原)에 머무르셨다.'고 하였다. '신도노 카타노 카바네 계도(辛嶋勝姓系図)'에는 하치만 다이진이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戔嗚尊)와 그 아들 이소타케루노 카미(五十猛神)의 자손으로 아마테라스와 친척간이라고 하였다. 


덴표 21년(749) 쇼무 덴노(聖武天皇, 재위 724∼749)는 나라 현(奈良県) 소재 도다이지(東大寺)에 비로자나대불(毘盧遮那大佛)을 제작해서 봉안하라고 명했다. 이때 우사 하치만 진(宇佐八幡神)은 덴노와 함께 금은제 봉황으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수도로 들어와 대불 제작을 도왔다고 한다. 나라 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꾸준하게 신불습합(神仏習合)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도다이지는 경내에 하치만 진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타무케야마 하치만 구(手向山八幡宮)를 세웠다. 


진고 케이운(神護景雲) 3년(769년) 고켄 덴노(孝謙天皇, 재위 749~758)의 총애를 등에 업은 승려 도쿄(道鏡)는 덴노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신탁을 이용했다. 그는 고켄 덴노가 자신을 덴노로 지명케 하고자 '도쿄를 덴노에 앉혀야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하치만 다이진으로부터 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조정은 와케노 기요마로(和気清麻呂)를 우사 진구에 보내 하치만 다이진의 신탁을 재확인하도록 했는데, 이때 기요마로는 '무도한 자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신탁을 받아왔다. 이로써 덴노가 되려던 도쿄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고켄이 다시 쇼토쿠 덴노(称徳天皇, 재위 764~770)로 즉위하였다.


덴오(天応) 원년(781년) 일본 조정은 우사 하치만에게 일본을 지키고 불교를 수호하는 신으로써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하치만 다이진은 대보살이라는 불교 칭호를 받은 일본 신토 최초의 신이기도 하다. 일본의 신화학자들은 하치만 다이진을 토착신과 외래신의 요소가 융합된 본보기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신불습합이 진행되면서 진쟈에도 하치만 대보살을 모시는 진구우지(神宮寺)가 세워졌다.

도다이지(東大寺) 소장 하치만 좌상 


이후 일본 전국의 사찰에서 하치만 다이진을 수호신으로 칸죠(권청)해 오는 일이 많아지면서 하치만 신앙은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혼지스이자쿠(本地垂迹) 관념에 따라 아미타불이 하치만 다이진의 혼지부츠(本地仏)라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니치렌(日蓮, 1222~1282)은 하치만 대보살은 아미타불이 아니라 석가모니불의 혼지부츠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하치만 다이진은 승려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를 승형(僧形) 하치만 다이진이라고 한다.


헤이안 시대 후기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 903~940)는 반도(坂東, 지금의 関東地方)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신노(新皇)라 자칭하였다. '쇼몬키(将門記)'에는 덴교(天慶) 2년(939년)에 고즈케(上野)의 관아에서 하치만 대보살이 마사카도에게 신노의 지위를 내렸다고 한다. 교토(京都) 조정에서는 이를 조복(調伏)하기 위해 이와시미즈 하치만 구에서 제사를 올렸다. 마사카도는 시모우사(下總)에 왕성을 세우려 하였으나 다이라노 사다모리(平貞盛)와 그와 협력한 시모쓰케(下野)의 압령사(押領使) 후지와라 히테사도(藤原秀鄕)에게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마사카도의 난이 진압된 뒤 하치만 다이진은 국가를 진호하는 신으로서의 숭경이 높아져 덴노의 이와시미즈 하치만 구 행차는 엔유 덴노(円融天皇, 재위 969~984) 이래 240번이나 이루어졌다.


이요(伊豫) 지방의 호족이자 관리였던 후지와라 스미토모(藤原純友, ?~941)는 히부리 시마(日振島)를 근거지로 해적들을 이끌고 세토 나이카이(瀨戶內海)를 휩쓸면서 요도 코(淀江)를 거슬러 올라와 교토를 노략질하였다. 그의 세력은 시코쿠(四國)와 기이(紀伊), 스오(周防)까지 미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스미토모를 토벌하기 위해 오노 요시후루(小野好古)를 파견하였다. 스미토모는 치쿠젠(筑前)까지 도망쳐 다자이후(大宰府)를 노략질하였다. 요시후루는 해륙 양면작전으로 이요까지 추격하여 스미토모를 죽였다. 마사카도와 시미토모의 난을 죠헤이(承平), 덴교(天慶)의 난(939~941)이라고 한다. 


죠헤이, 덴교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등 일본 전국의 무가들 사이에서 하치만 다이진이 널리 숭앙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교토 조정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조상신으로 받들었지만, 무가들은 유미야 하치만(弓矢八幡)을 수호신으로 숭배하였다. 세이와 겐지는 하치만 다이진을 씨족신으로써 숭배하였고, 일본 전국 각지에 칸죠하였다. 세이와 겐지의 일파인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는 가와치노 쿠니(河内国) 쓰바이(壷井, 지금의 오사카 부 하비키노 시 쓰바이)에 칸죠한 쓰바이 하치만 구(壺井八幡宮)를 가와치 겐지의 씨족신으로써 선포하였다. 요리요시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家)도 이와시미즈 하치만 구에서 원복(元服, 冠禮)을 치르고 자신의 이름을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郎義家)라 칭했다. 이후 요리요시, 요시이에 부자는 전9년의 역(前九年の役), 후3년의 역(後三年の役)을 진압하고 무사들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겐지 씨의 기반을 다졌다.


지쇼(治承) 4년(1180년) 헤이케(平家) 타도를 명분으로 거병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1147~1199)는 시즈오카 현(静岡県) 기세가와(黄瀬川)의 하치만(八幡) 부근에 본영을 세우고 헤이케 군과 첫 번째 전투인 후지가와(富士川) 전투를 치뤘다. 오슈(奥州)에서 형을 돕겠다고 달려온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 1159~1189)가 요리토모와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 시즈오카 현 슨토 군(駿東郡) 시미즈 정(清水町)의 기세가와 하치만 진쟈(黄瀬川八幡神社)에는 당시 형제가 만나 헤이케 타도를 맹세했다는 대면석(対面石)이 남아 있다. 요리토모가 자신을 배신하고 달아난 요시쓰네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한 부케세이켄(武家政権)이 탄생하였다.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에 의지해 히라이즈미(平泉)로 달아났던 요시쓰네가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 1155~1189)에게 배신당해 자결한 뒤, 요리토모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슈 후지와라 씨의 거점 히라이즈미를 함락시키고 오슈 전역을 차지하였다. 이때 요리토모는 '이세 다이진 구(伊勢大神宮) 하치만 대보살'의 이름을 비단에 적은 깃발을 앞세웠다고 한다.


요리토모는 자신이 세운 바쿠후(幕府)의 거점 가마쿠라(鎌倉)에 하치만 진을 모셔다 쓰루가오카 하치만 구(鶴岡八幡宮)를 세웠고, 바쿠후의 고케닌(御家人)들도 무가의 주된 수호신으로써 그들의 영지 안에 하치만 다이진을 칸죠해 진쟈를 세웠다. 이후 많은 무장들은 군신(軍神) 또는 전쟁신(戰爭神)으로 하치만 다이진을 숭배하였고, 이런 현상은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아시카가 씨(足利氏) 바쿠후가 수립된 뒤로도 계속되었다. 아시카가 쇼군케(将軍家)는 아시카가 구보케(公方家)와 함께 겐지 부흥을 목표로 내세웠고, 역대 부케세이켄 가운데서도 가장 신실하게 하치만 다이진을 숭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사후 자신을 신하치만(新八幡)으로 모실 것과 나라 도다이지 대불전(大仏殿)의 다무케야마 하치만 구를 본떠 국가진호(国家鎮護)를 위해 세운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의 호코지(方広寺)를 수호할 하치만 구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죽어서 신하치만이 되려던 히데요시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사후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에 의해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덴노(後陽成天皇, 1571~1617)가 하사한 도요쿠니 다이묘진(豊国大明神)이라는 이름으로 도요쿠니 진쟈(豊国神社)에 봉안되었다.


1868년(메이지 원년) 메이지 덴노는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을 선포했다. 신불분리령에 따라 전국의 하치만 구는 진쟈로 개조되었고, 진구지(神宮寺)도 폐지되었으며, 본지불이나 승형 하치만 신상도 철거당했다. 하치만 대보살이라는 칭호도 폐지되었다. 우사 하치만 구나 이와시미즈 하치만 구에서 열리던 방생회도 추슈 마쓰리(仲秋祭), 이와시미즈 마쓰리(石清水祭) 등으로 바꼈다. 쓰루가오카 하치만 구의 경우 6월과 9월에 반딧불이 방생회, 방울벌레 방생회가 열리고 있다.


신불분리령에도 불구하고 하치만 다이진의 군신으로써의 신앙은 유지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육군과 해군 항공기지에는 '나무 하치만 대보살(南無八幡大菩薩)'이라고 쓴 깃발을 걸어놓았고, '하치만'의 이름을 딴 공습부대(空輸部隊, airborne raiding force)도 있었다. 하치만 다이진은 항공기 조종사, 특히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들의 열렬한 숭앙을 받았다. 1944년 제작된 일본 해군의 선전 영화 '뇌격대 출동(雷撃隊出動)'에서도 조종사들이 출격하면서 하치만 대보살의 깃발을 휘날리는 장면이 있다. 1992년에는 신불분리령 당시 화재로 소실된 교토 도지(東寺) 경내의 진슈 하치만 구(鎮守八幡宮)가 재건되었으며, 진언종(眞言宗) 창시자 구카이(空海)가 새겼다는 승형 하치만 대보살상이 본존으로 모셔졌다. 


우사 진구 입구의 기념비


우사 진구 입구에는 비석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가운데 비석에는 '甫尙翁顕彰碑'라고 새겨져 있다. 오른쪽 비석의 '福田久兵衛之碑'에서 '효에(兵衛)'는 옛날 효에후(兵衛府)에 속하여 궁문을 지키고, 왕의 행차 경비, 시중의 순검(巡檢) 등을 맡았던 무관이다.


도리이(鳥居)


도리이(鳥居)


도리이(鳥居)를 지나면 바로 우사 진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도리이를 통과하는 순간 인간의 영역인 속계(俗界)에서 신의 영역인 신계(神界)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사 진구의 도리이가 백제를 향하고 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백제와 일본의 연관성이 그만큼 깊다는 말이겠다. 


도리이는 일반적으로 수직으로 세운 두 개의 원통형 기둥 위에 두 개의 직사각형 가로대가 얹혀 있다. 맨 위 가로대는 기둥의 양쪽 끝에 얹혀 있고, 두 번째 가로대는 그보다 약간 아래쪽에 걸쳐져 있다. 맨 위 가로대 위에는 지붕 형태의 구조물이 있다. 기둥과 가로대에는 붉은색으로 칠을 해서 진쟈가 신성한 곳임을 나타낸다. 


도리이는 일본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함께 전래된 인도의 아치형 관문인 도라나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 또, 중국의 패루(牌楼)나 우리나라의 홍살문(紅箭門)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쿠로오 진쟈(黑男神社)


도리이(鳥居)


쿠로오 진쟈(黑男神社)를 지나면 또 하나의 도리이가 나타난다. 일본은 전반적으로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사 진구의 숲에도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와카미야 진쟈(若宮神社)


도리이(鳥居)


와카미야 진쟈(若宮神社)를 지나면 도리이가 또 나타난다. 하치만 진쟈를 와카미야 진쟈라고도 부른다. 이 도리이를 지나서 올라가면 우사 진구 조구(上宮)에 이르게 된다. 무엇인가 점점 더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사 진구 조구(上宮) 서대문(西大門)


우사 진구 조구의 마지막 관문인 서대문(西大門)이다. 우사 진구 서대문의 형태는 우리나라 솟을삼문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중문은 신령이 출입하는 문이므로 방문객은 좌우측 문을 이용해서 드나들어야 한다. 서대문의 지붕은 편백나무 껍질로 이은 히와다부키(檜皮葺)로 되어 있다. 


우사 진구 조구 측면


일왕 하사패


우사 진구 안내판


우사 진구 조구 측면에는 하치만 다이진에게 제사를 지낼 때, 헤이세이(平成) 27년 5월 28일, 10월 3일과 5일, 29년 3월 18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제물을 하사했다는 팻말과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헤이세이 27년은 2015년, 29년은 2017년에 해당한다. 이처럼 우사 진구는 일왕이 직접 제물을 하사할 정도로 일본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하치만 진쟈이다.   


우사 진구 조구


남향으로 앉아 있는 우사 진구 혼덴(本殿)은 1861년 재건된 건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우사 진구의 진쟈 건축 양식을 하치만즈쿠리(八幡造)라고 한다. 하치만즈쿠리는 박공지붕으로 된 전덴(前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고덴(後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2사(社)가 지붕 홈통 부분으로 연결된 지붕 형태를 갖고 있다. 지붕에는 반곡(反曲)이 있으며, 건물의 측면은 박공 부분이 앞뒤로 나란한 형태로 되어 있다. 편백나무 껍질을 켜켜이 쌓아서 이은 히와다부키 지붕은 불교 건축의 영향으로 건물 천장에 X자로 교차하는 나무인 지기(千木)와 마룻대 위에 가로로 놓은 장식 나무인 가쓰오기(堅魚木)가 없고, 기둥 위에다가 수평재만을 얹어서 도리를 지탱하는 후나히지키(舟肘木)를 사용하고 있다. 


724년 오구라야마(小椋山)에 우사 진구를 세웠을 때는 샤덴(社殿)이 1사였으나 지금은 3사가 나란히 서 있다. 제2전(殿)은 덴페이(天平) 1년(729), 제3전은 고닌(弘仁) 11년(820)에 창건되었다. 현재의 샤덴 건물은 안세이(安政) 분큐(文久) 연간(1854~1863)에 개축된 것이다. 좌우전(左右殿)에는 고하이(向拜) 공간이 있으며, 중전(中殿)에는 고하이 공간이 없다. 


하치만 다이진(八幡大神)를 모시는 이치노고텐(一之御殿)


하치만 다이진(八幡大神)을 안치한 이치노고텐(一之御殿)은 니노고텐(二之御殿)의 향좌측(向左)에 자리잡고 있다. 이치노고텐 앞에는 참배를 할 때 손뼉을 네 번 치라는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일본 사람들도 잘 몰라서 손뼉을 두 번만 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진쟈에서 참배할 때는 손뼉을 두 번 치는 것과 달리 진구에서는 손뼉을 네 번 친다. 참배 순서는 먼저 주황색 직사각형 통에 돈을 던지고, 합장 반배(合掌半拜)를 두 번 한 다음 손뼉을 친다. 


히메노 오미카미(比売大神)를 모시는 니노고텐(二之御殿)


히메노 오미카미(比売神)를 모시는 니노고텐(二之御殿)은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일본 창세신화에 따르면 아마테라스(天照)와 스사노오(素戔嗚)가 서로 맹세할 때, 스사노오가 지닌 검 도쓰카노쓰루기(十擧劍)를 아마테라스가 씹어 내뱉은 자리에서 태어난 다기쓰히메노 미코토(多岐津姫命), 이치키시마히메노 미코토(市杵嶋姫命), 다기리히메노 미코토(多紀理姫命) 등 무나가타 세 여신(宗像三女神)이 지쿠시(筑紫)의 우사 시마(宇佐嶋), 오모토 산(御許山)에 강림했다. 원래 무나카타 씨(宗像氏) 등 아마비토(海人) 집단이 섬기는 신이었던 무나카타 세 여신은 진구 코고의 삼한정벌(三韓征伐) 때 고대의 호족인 무나카타 씨(胸形氏)가 협력한 것을 계기로 야마토세이켄(大和政権)의 신으로 포섭되었다는 설이 있다. 


무나가타 세 여신은 또 하치만 다이진이 현신하기 전의 옛 신인 지주신(地主神)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히메노 오미카미는 하치만 진의 부인(또는 백모, 어머니) 신으로서의 다마요리히메노 미코토(玉依姫命)나 오진 데노의 코고로서의 나카쓰히메노 미코토(仲津姫命)라는 설이 있다. 최근 히메노 오미카미를 히미코(卑弥呼) 또는 아마테라스로 보는 설, 시라야마히메 진(白山比咩神)으로 보는 설도 있다.


진구 코고(神功皇后)를 모시는 산노고텐(三之御殿) 


진구 코고(神功皇后)를 모시는 산노고텐(三之御殿)은 니노고텐의 향우측(向右)에 자리잡고 있다. 진구 코고의 이름은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 미코토(気長足姫尊, 息長足姬尊), 오시타라노 미코토(大帯比売命)로 전한다. 아버지는 가이카 덴노(開化天皇, BC 158~98)의 현손 오키나가노 스쿠네노 미코(息長宿禰王), 어머니는 신라(新羅) 왕자 아메노 히보코(天日槍, ?~?)의 후손 가즈라키노 다카누카히메(葛城高顙媛)이며, 주아이 덴노의 부인이자 오진 덴노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진구 코고는 201년에서 269년까지 섭정을 하였다고 전하는데, 백제왕력을 기준으로 하면 321년~389년에 해당한다. '고지키(古史記)'나 '니혼쇼키(日本書記)'에서 오진 덴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덴노가 될 운명을 타고 난 '태중(胎中)의 덴노'라 불렸고, 코고에 대한 신앙이 모자신앙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본다. 


진구 코고는 무나카타 씨의 도움으로 삼한을 정벌했다는 설이 있는데, 신라정복설 나아가 삼한정벌설은 과연 진실일까? '니혼쇼키'에 진구 코고가 신라에 군대를 보내 항복시켰으며, 신라가 항복한 뒤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도 이어서 일본에 복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 같은 사서에는 전혀 그런 기록이 없다. 


진구 코고의 신라정복설은 에도 시대 이래 '고지키', '니혼쇼키' 등 일본 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이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주의 이론가들은 신라정복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바탕으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날조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의 유일한 근거인 '니혼쇼키'는 이미 심한 윤색과 왜곡이 가해진 역사서임이 판명된 바 있다. 


일본이 고대 통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645년 다이카노카이신(大化改新)을 거쳐 8세기 초 율령이 제정된 야마토세이켄 때였다. 그 수세기 전에 한반도로 대규모 병력을 보내서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고학적 유물을 보더라도 한반도에서 일본식 유물이 거의 발굴되지 않는 반면, 일본에서는 삼한과 삼국시대 유물이 다량 발굴되고 있다. 이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한국인들이 일본열도를 지배했거나 일본인들에게 한반도의 선진문화를 전파했다는 증거다. 


산노고텐(좌)과 기도전(祈禱殿, 중), 모우시도노(申殿, 우)


산노고텐 동쪽 곁에는 기도전(祈禱殿), 맞은편에는 모우시도노(申殿)가 있다. 기도전 바로 앞에는 아름드리 가미키(神木)가 서 있다. 기도전 입구 처마와 가미키에는 흰 종이를 끼운 시메나와(注連縄, 금줄)가 걸려 있고,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모우시도노는 신전에서 노리토(祝詞, 축문)를 올리는 곳이다.  


야코 진쟈(八子神社)


이치노고텐 서쪽 곁에는 야코 진쟈(八子神社)가 자리잡고 있다. 야코 진쟈 앞에도 시메나와를 친 아름드리 가미키가 서 있다. 시메나와에 꽂혀 있는 흰 종이를 시데(四手, 垂)라고 한다. 


고목


이치노고텐 맞은편에는 오미쿠지(御御籤, 御神籤)를 뽑는 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벼락맞은 것처럼 둥치만 남은 채 구멍이 뻥 뚫린 아름드리 고목이 서 있다. 일본인들은 절이나 진쟈에 가면 흔히 오미쿠지라는 것을 뽑는다. 먼저 통에 100엔을 넣고 흔들어 숫자가 적힌 막대기를 뽑은 다음 그 숫자에 해당하는 서랍을 연다. 서랍에서 길흉이 적힌 종이를 꺼내어 운세가 좋지 않을 경우 호전을 기원한다. 나쁜 운이 나오지 못하게 접어 나뭇가지나 지정된 장소에 매어 놓고, 좋은 운이 나오면 가지고 돌아가서 이듬해에 그 절이나 진쟈에 왔을 때 두고 간다. 요즈음은 오미쿠지의 결과와 상관없이 진쟈나 절의 지정된 장소에 매어놓는 사람들이 많다. 오미쿠지의 유효 기간은 1년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우사 진구 게구(下宮)


우사 진구 경내 서쪽 한켠에는 게구(下宮)가 있다. 게구는 왕의 후궁들을 모신 진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참배객들도 조구보다 훨씬 적은 편이다. 왠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우사 진구를 나오면서 일본의 신토는 우리나라의 불교와 많이 닮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2018.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