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일본 도쿄 국립극장에서 나루히토(德仁, 1960~ ) 황태자 부부를 비롯해서 일본의 최고 권력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 ) 총리, 중의원과 참의원 의장 등 약 1,1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의 최고 권위자 아키히토(明仁, 1933~ ) 일왕(日王)의 재위 3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아키히토 일왕은 오는 4월 30일 퇴임을 앞두고 있어서 사실상 마지막 재위 기념식인 셈이다. 제125대 아키히토가 퇴위하면 그 다음날인 5월 1일 나루히토 황태자가 일본의 제126대 일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재위 30주년 기념식 행사에 참석한 아키히토 일왕은 '평화를 희구하는 국민들의 강한 의지에 의해 근현대에서 처음으로 전쟁을 경험하지 않는 시대를 가졌다'고 회고하고, '성의를 갖고 타국과의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상징으로서의 덴노상(天皇像)을 모색하는 길이 끝없이 멀다'면서 '다음 시대, 그 다음 시대를 이어가며 시대의 상징상을 계속 보충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인사말에서 '늘 국민들 곁에 있어 주셨던 폐하 부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는 이어 일왕 부부를 향해 '반자이(萬世)'를 외치면서 군국주의 극우 노선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일본의 왕이 생전에 퇴위하는 것은 제119대 고카쿠(光格) 덴노(天皇) 이후 202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평화 헌법을 개정해 군대를 보유하고, 상징적인 존재인 덴노를 다시 신격화하려는 일본 정치권 내 극우보수화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해 퇴위를 결심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아키히토는 과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태평양 전쟁에 대해 책임있는 자세를 가질 것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 반면에 아베 총리는 '미래지향'을 주장하면서 일본의 우경화 나아가 신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추구했다. 아베의 신군국주의 경향은 아키히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를 반영하듯 아키히토는 아베 총리 부부를 의례적인 황궁 만찬에 단 한번도 초대하지 않았다. 일왕은 총리가 바뀌면 사적으로 신임 총리 부부를 황궁으로 불러 환영 만찬을 여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아베는 한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이는 사적으로는 절대로 군국주의 노선을 걷는 아베와 교류하지 않겠다는 아키히토의 확고한 의사표시로 보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키히토는 아베와 행동을 같이 하지만 어딘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한편 아베는 나루히토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하고자 했을 때 이를 제지함으로써 아키히토의 심기를 또다시 불편하게 만든 바 있다.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 일본 덴노가(天皇家)와 내각의 불편한 관계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막부 시대(幕府時代, 1192~1868)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67년 막부(幕府) 제15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메이지(明治) 덴노에게 정권을 반납한 대정봉환(大政奉還)과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전까지의 덴노는 사실상 이름뿐인 일본 조정의 수장이었다. 쇼군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던 막부 시대에는 한때 덴노가 대궐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그림이나 글을 팔아먹고 살이야만 했다. 고나라(後奈良) 덴노는 즉위식을 치를 돈도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戦國) 다이묘(大名)인 고호조(後北条), 오우치(大內), 이마가와(今川) 등의 가문으로부터 성금을 받아 즉위 10년만에야 즉위식을 올릴 수 있었다. 심지어 덴노가 얼마나 무시를 받았던지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는 일도 있었다. 궁녀들은 매춘을 하기까지 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 정권을 대신해서 내각이 들어섰다. 1941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은 쇼와(昭和) 덴노의 동의를 얻어 미일 전쟁(美日戰爭,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도조 히데키가 만약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다면 육군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덴노제(天皇制)를 폐지하고 일본 제국을 해체할지도 모른다고 나오자 쇼와 덴노는 어쩔 수 없이 미일 전쟁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키히토가 8살 때의 일이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이 임박해오자 미군 폭격기들은 일본 본토 상공까지 날아와 폭격하기 시작했다. 공습이 있을 때마다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는 공포에 떨면서 황궁의 지하 방공호로 피신하곤 했다. 미군 폭격기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아와 폭탄을 퍼붓자 황태자는 황궁에서 130㎞ 북동쪽에 있는 도치기 현(栃木県) 닛코 시(日光市)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일본의 패망 이듬해인 1946년부터 아키히토는 미군이 파견한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Elizabeth Vining)에게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받았다. 이때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패전 경험과 미국식 교육을 통해서 아키히토는 우익 군국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달았다. 또 군국주의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지도 깨달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946년 정월 초하루 아키히토가 가키하지메(書始め)로 쓴 글귀는 '평화국가(平和國家) 건설'이었다.
아키히토는 아버지인 히로히토(裕仁, 1901∼1989) 덴노 시대에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일으킨 전쟁과 식민지 지배는 일본의 과오라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1989년 아키히토 일왕은 즉위하면서 과거사 치유를 위한 순방을 시작했다. 1991년에는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방문했고, 그 이듬해에는 중국을 방문했다.
1995년 8월 15일 종전 50주년 기념식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戦後50周年の終戦記念日にあたって)'라는 제목의 담화문 일명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아키히토의 평화 의지에 대한 진정성에 힘을 실어 주었다. 무라야마는 과거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침략,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 반성’한다고 명확하게 밝혔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에 관해 공식적으로 사죄한 성명으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이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집권당에 관계없이 일본군 성노예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 1993)' 일명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고 있다. 이 담화는 일본 정부가 최초로 과거의 식민지 지배를 공식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무라야마 담화'는 한국어와 중국어로도 동시에 번역해서 발표했다. '사죄, 반성’을 담은 ‘무라야마 담화’는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강제 동원 피해자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자들도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으로 애매하게 표현했다. 다만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성실히 대응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아키히토는 '무라야마 담화' 발표 후 10년이 지난 2005년 6월 27일 사이판을 방문했다. 그는 사이판 섬의 '태평양 한국인 희생자 평화 추념탑'을 찾아서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다. 그해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는 전후 6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계승하는 내용의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 '고이즈미 담화'가 나온 이듬해인 2006년 아키히토는 싱가포르와 타이를 방문했다. 2009년에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공격 현장인 하와이를 방문했고, 2015년에는 팔라우를 방문했다. 아키히토는 순방국에서 일본인 병사의 위령비뿐만 아니라 상대국 병사의 위령비에도 참배했다. 앞으로는 일본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강한 결의 표명이었다.
아키히토와 달리 아베 총리는 태평양 전쟁의 공포를 겪지 않았다. 그는 일본이 미국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아베는 미국을 능가하는 부국강병만이 일본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베 총리는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전 총리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실업부 총무사 총책으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관장했다. 그 후 태평양 전쟁 발발 두 달 전 출범한 도조 히데키 내각에 상공각료로 입각하여 일본군 물자동원조달 책임자가 됐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으로 스가모(巢鴨) 구치소에 수감됐지만, 미소 냉전 체제가 되면서 미국과 일본의 유착에 의해 석방되어 1957년에는 총리까지 지냈다. 아베는 이러한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군국주의적인 경향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베는 이를 '미래지향'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다. 외조부처럼 그도 제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아키히토는 일본의 상징적 국가원수로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과거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반면에 아베 총리는 덴노를 군국주의 일본의 구심점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앞만 보고 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베의 '미래지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키히토의 퇴위 선언은 이처럼 일본을 군국주의화하려는 아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의 심각한 갈등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인 2015년에도 네 차례나 일어났다. 첫 번째 갈등은 새해 첫날 일어났다. 아베는 17명의 각료를 이끌고 황궁을 방문해 아키히토에게 신년 인사를 했다. 내각의 신년 인사는 덴노의 공식 국사 중 하나다.
아키히토는 아베 총리에게 '올해는 종전 7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습니다. 많은 분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만주사변에서 비롯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타이르듯이 신년 인사를 전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대해 반성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4일 후인 1월 5일 이세진구(伊勢神宮)를 참배한 뒤 인사말을 통해서 '올해는 전후 7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습니다. 국제정세가 크게 격변하는 상황에서 더욱 힘센 발걸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행복한 삶을 단호하게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안전보장법제를 정비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앞으로 80주년, 90주년, 그리고 100주년을 향해서 일본은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아래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더욱 공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이번 70주년에 즈음하여 세계를 향해서 선언하고 싶습니다. 양띠 해(未年)인 올해에는 미래의 ‘미(未)’라는 한자가 들어갑니다.'라면서 '미래지향'의 의지가 확고함을 표명했다. 이는 천황이 신년 인사에서 밝힌 '과거 전쟁 책임'과 '과거사 반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아키히토와 아베 총리의 두 번째 갈등은 나루히토 황태자의 한국 방문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2월 23일 55세를 맞이한 황태자는 생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나 자신은 전후 세대로서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습니다만,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는 오늘날 겸허하게 과거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전쟁을 체험한 세대부터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까지 전쟁의 비참한 체험이나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발언했다. 아버지인 아키히토의 역사관을 그대로 계승하는 내용이었다.
지난 2001년 12월 아키히토는 68세 생일의 기자회견에서 '간무(桓武) 천황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가 백제(百濟) 무령왕(武寧王)의 10대손이라고 쇼쿠니혼기(続日本紀)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낀다'고 발언한 바 있다. '쇼쿠니혼기'는 793년 간무 덴노가 펴낸 역사서다. '쇼쿠니혼기'에는 일본 제50대 간무 덴노의 어머니가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직계 후손인 화씨부인(和氏婦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덴노는 또 백제 무령왕 때부터 일본에 5경박사(五經博士)가 대대로 초빙됐으며, 무령왕의 아들 제26대 성왕(聖王)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줬다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의 이같은 발언은 일본 덴노가의 백제 왕실 후예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아키히토의 발언을 들은 내각 관료들과 기자들은 깜짝 놀랐다. 참석자 중에는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고, 놀라서 뒤로 나자빠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 덴노가에서는 백제 왕실 후예설을 공식화하고자 하지만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이를 반대한다.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화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나루히토 황태자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왕 아키히토와 마찬가지로 황태자도 조상의 나라 백제의 옛땅을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2015년 4월 12~17일까지 한국에서 '제7회 세계 물포럼'이 열렸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유엔의 물·위생자문위원회 명예총재였다. 아키히토 일왕은 전후 70주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로서 황태자의 방한을 아베 총리에게 극비리에 요청했다. 유엔의 물·위생자문위원회 명예총재로서 '제7회 세계 물포럼'에 참석한다는 명분이었다.
한국은 전쟁 희생자 위령을 위한 아키히토 일왕의 '순례여행'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나라였다. 그는 아베 정권 하에서 한일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방한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본인 대신 나루히토 황태자라도 방문하기를 바란 것이다. 나루히토의 방한은 한국 정부에서도 추진했다. 당시 박근헤 정권의 유흥수 일본 대사는 아키히토 일왕과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직접 방한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왕 부자는 즉답을 할 수 없었다. 일본 헌법 제3조에는 '덴노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황태자의 방한은 일본 정부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예상대로 아베 총리는 황태자의 방한을 거부했고, 일본 외무성도 한국 정부에 거절을 통보했다. 덴노가의 '과거사 반성'과 아베 정권의 '미래지향'이 정면 충돌한 것이었다.
세 번째 마찰은 아키히토 일왕의 팔라우 방문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군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팔라우를 점령했다. 일본은 1922년 팔라우에 남양청(南洋庁)을 설치하여 1943년까지 3만3천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1944년 9~11월까지 벌어진 일본군과 미군의 전투에서 일본군 1만1천 명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생존자는 단 34명뿐이었다. 미군은 팔라우 승전을 계기로 오키나와를 점령했고, 이듬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오래전부터 팔라우를 방문해 태평양 전쟁에서 희생된 일본군 병사들을 위령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해 왔다. 81세라는 나이를 고려할 때 아키히토는 전후 70주년인 2015년이야말로 팔라우 '위령' 방문의 적기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천황의 '과거사 반성'을 위한 팔라우 '위령' 방문에 난색을 표명했다.
아베 총리는 8월 '강력한 미래 지향'의 '아베 담화' 발표를 앞둔 시점에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의 생각과는 달리 팔라우 '위령' 순방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아베는 '팔라우에 덴노가 묵기에 합당한 숙박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위령' 순방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총리 아베의 재고 요청에 대해 아키히토 일왕은 ‘숙박시설이 없다면, 노숙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면서 팔라우 '위령' 순방을 위한 배수진을 쳤다. 일왕의 해외방문은 국사 행위였지만, 일본 헌법 제3조의 규정에 의해 아베의 승인이 없으면 팔라우 '위령' 순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왕의 배수진에 아베는 결국 팔라우 '위령' 방문을 승인했다. 팔라우 '위령' 순방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 쏟아질 국내외 비판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실현된 일왕의 팔라우 방문이었다.
팔라우 '위령' 순방을 떠나는 4월 8일 아침 일왕은 황궁으로 배웅인사를 하러 온 아베 총리에게 '올해는 전후 7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지난 전쟁에서는 태평양 각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서 이름 없는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종전 직전에는 이 지역에서 심한 전투가 발발, 여러 섬에서 일본군이 전사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약 1만 명, 미군은 약 1,700명의 전사자가 났습니다. 태평양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에서 이러한 슬픈 역사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일왕은 아베의 면전에서 '과거사 반성'을 거론하며 '미래지향'을 대놓고 비판했다. 아베는 침울한 표정으로 일왕의 '과거사 반성'을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키히토 일왕은 그토록 바라던 팔라우 '위령' 순방을 떠났다. 1박2일 간의 짧은 여행이었다. 팔라우에서 머물 호텔이 마땅치 않아 일왕 부부는 최초로 일본 자위대 순시선(巡視船) 아키츠시마(秋津洲)에서 숙박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왕은 일본군 병사와 미군 병사의 위령비를 모두 참배하고, 황궁 정원에서 자란 국화를 가져가 헌화를 했다. 국화는 바로 덴노가의 상징이었다. 이는 일본이 저지른 과거 전쟁 책임에 대한 반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팔라우 '위령' 순방을 마친 아키히토 일왕은 전용기를 타고 4월 9일 밤 9시 19분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는 나루히토 황태자와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 후미히토 친왕(文仁親王), 아베 총리 등이 마중을 나왔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일왕 부부의 56회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먼저 황태자와 친왕이 먼저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일왕 부부는 온화한 미소로 답했다. 하지만 아베가 무사 귀국에 대한 축사를 전하자 아키히토는 순간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의 네 번째 마찰은 '아베 담화' 발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아베는 한국과 중국의 반발과 항의를 감수하면서까지 '아베 담화'에 '강력한 미래 지향'을 담으려고 했다. 이때 일왕의 의중을 정확하게 읽은 일본 궁내부(宮內府)는 만약 아베가 '침략, 식민지배, 사죄, 반성’을 담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계승하지 않는다면, 이 정신을 계승한 '덴노 담화'를 별도로 발표하겠다고 나왔다. 궁내부의 위협적인 언질은 총리 관저에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아베 총리는 당초 전후 70년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에 '아베 담화'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날 일왕도 치도리가후치공원(千鳥ヶ淵公園)에서 열리는 전국전몰자 위령제에 참석하여 전후 70주년 연설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만약 같은 날 '아베 담화'와 상반된 내용의 '덴노 담화'가 발표된다면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아베의 체면도 형편없이 구겨질 위험이 컸다.
아베 총리는 일왕보다 하루 앞당겨 8월 14일 '아베 담화'를 발표하기로 했다. 선수를 치기로 한 것이다. '덴노 담화'가 '아베 담화'와 상반된 내용을 담을 수 없도록 견제하려는 속셈이었다. ‘아베 담화’가 먼저 나왔는데 상반된 내용의 ‘덴노 담화’가 나온다면 아키히토가 발표한 담화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만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궁내부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먼저 나온 '아베 담화'와 '덴노 담화'의 내용이 다르면 일본 국민은 '덴노 담화'를 지지할 것이라면서 아베를 압박했다.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도쿄 신국립경기장의 건설 예산이 당초 1300억 엔을 크게 넘어 2520억 엔이나 들어가는데도 이를 억지로 추진했기 때문에 아베 정권은 일본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게다가 7월 16일에는 일본 중의원에서 안전보장 관련 법안 이른바 '전쟁 법안' 제정을 강행하여 국내외의 거센 비난을 받고 있었다. 대북한 외교도 암초에 걸려 있었다. 이를 반영하듯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은 7월 18일 아베 정권 지지율 33%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지지율 30%를 밑돈 일본의 역대 내각은 대부분 반년 이내에 붕괴됐다. 아베 내각도 지지율이 3%만 더 빠지면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아베 총리는 정권의 위기를 대중국 외교를 통해서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9월 3일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군사 퍼레이드'를 앞두고 아베를 초대한 바 있다. 아베가 방중 이벤트를 이용하면 지지율이 회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 방중 이벤트를 통해서 9월로 예정된 참의원에서의 안보법안 강행 처리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을 덜어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아베 담화'에 '강력한 미래 지향'을 담는다면 중국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 뻔하고, 아베의 방중은 실현되지 못할 공산이 컸다. 이처럼 일왕과 중국 양측에서 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던 아베는 '전후 70년 아베 담화'의 내용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
'덴노 담화'의 문안을 입수한 아베 내각은 최종 '아베 담화'를 작성했다. '아베 담화'의 발표는 8월 14일 오후 6시로 정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작성된 '아베 담화'는 대단히 길고 복잡했다. 특히 아베가 끝까지 저항했던 '과거의 전쟁에 대한 사죄'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는 전후 세대가 현재 인구의 80%를 넘고 있습니다. 전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리 자식들과 손자, 그리고 그 뒷세대 어린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하게 하는 숙명을 떠맡겨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간접적인 표현을 썼다.
일본 언론들은 '아베 담화'에 대해 '가스미가세키(霞關) 용어의 정밀함으로 아로새긴 담화'라고 비판했다. '가스미가세키 용어'는 일본 중앙관청이 밀집한 도쿄 도 치요다 구(千代田區) 가스미가세키에서만 사용되는 '관료적인 표현'이라는 뜻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주목한 '아베 담화'는 결국 지극히 '관료적인 담화'로 끝나고 말았다. '아베 담화'는 한국, 중국 등 국제 사회로부터 '무라야마 담화'나 '고이즈미 담화'에서 후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베 담화'가 나온 다음날인 8월 15일 정오에 아키히토 일왕은 연설에서 '과거를 돌이켜보고 지난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이후 전쟁의 참화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깊은 추도의 뜻을 표하며 세계 평화와 우리나라의 발전을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의 '미래지향'과 아키히토 일왕의 '과거사 반성' 간의 마찰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아베가 방침을 바꾼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베는 급락한 지지율 때문에 잠시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아베 총리의 '미래지향' 역사관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기회가 온다면 아베로 상징되는 일본의 우익 세력은 언제든지 군국주의를 위한 '강력한 미래지향'을 다시 추진해 나갈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의 재위 30주년 기념식이 열리던 날 도쿄 긴자(銀座)에서는 '덴노제 폐지'를 요구하는 거리 집회가 열렸다. '반(反)덴노제 운동 연락회' 등 집회에 참석한 약 150명의 시민들은 '덴노제는 헤이세이(平成)에서 끝내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 행진을 벌였다.
덴노제 반대운동 단체들은 진무(神武) 덴노가 즉위한 날인 기원절(紀元節, 660년 2월 11일)과 덴노제 폐지를 주장해 왔다. 이들은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기원절을 건국기념일로 삼은 것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이래 덴노 일가의 만세일계(萬世一系)와 주변 국가 침략을 합리화하는 상징 조작이다. 일본의 우익 군국주의 세력은 진무 덴노가 전쟁을 통해서 건국했다는 진무동정설(神武東征說)을 한반도와 만주, 중국을 침략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이데올로기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일본 우익 군국주의자들은 진무동정설을 근거로 정한론(征韓論)을 수립했다. 일본은 정한론에 따라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고 식민지화했으며, 중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이어 미일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에서 덴노제 폐지론자들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본 덴노가가 백제 왕실의 후예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아키히토 일왕과 나루히토 황태자는 조상의 나라 한국 방문을 염원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을 군국주의화하려는 아베 총리에 반발해서 4월 30일 생전 퇴위를 선언했다. 덴노직 퇴위 전 아키히토 덴노의 한국 방문을 희망한다. 나루히토 황태자의 방한도 환영한다.
한일 관계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솔직한 사죄와 반성, 배상을 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라도 '과거사 반성'은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군국주의를 의미하는 '강력한 미래 지향'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서로 상생하는 '미래 지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일본인들의 대승적인 자세가 필요한 때다. 아베 총리는 아키히토 일왕과 나루히토 황태자의 한국 방문을 허용하기 바란다.
이 글은 콘도 다이스케(近藤大介) 일본 '주간현대(週刊現代)' 부편집장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다.
2019. 2. 24. 林 山
#아키히토 #나루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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