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케이블 TV에서 오랜만에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연출한 '요진보(用心棒)'를 방영했다. 반가운 마음에 채널을 고정하고 끝까지 시청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라쇼몬(羅生門, 1950)', '이키루(生きる, 1952)',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 '구모노스조(蜘蛛巢城, 1957)', '도데스 가덴(1970)', '카게무샤(影武者, 1980)', '란(乱, 1985)' 등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해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화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요진보' 포스터
'라쇼몬'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사자상,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라쇼몬'의 수상 이후 비로소 일본 영화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키루'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전이 가져온 절망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던 일본인들의 정신적 상황과 삶을 뛰어나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았다.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은 '이키루'에 대해 '내가 본 일본 영화 중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다. 풍부한 도덕적, 지적, 심미적인 세계에 압도당했다.'고 극찬한 바 있다.
'7인의 사무라이'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일본의 어느 농촌을 배경으로 주군(主君)을 잃은 7인의 사무라이가 마을을 약탈하는 산적떼와 맞서서 싸운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존 포드(John Ford) 감독의 서부영화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 1946)'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헐리우드 서부극 '황야의 결투'를 완전히 일본의 사무라이극으로 바꿔 놓았다. '7인의 사무라이'는 이후 존 스터지스(John Sturges) 감독의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 1960)' 등 여러 편의 헐리우드 서부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영화는 재미도 있고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7인의 사무라이'는 오손 웰스(Orson Welles) 감독의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 장 르누아르(Jean Renoir) 감독의 '게임의 규칙((The Rules Of The Game, 1939)'과 함께 세계 3대 걸작으로 꼽힌다.
'요진보'의 한 장면
用心棒(요진보)는 원래 일본에서 자물쇠가 없던 시절 문에 괴어 문단속을 하던 빗장, 호신용으로 준비해 둔 막대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문단속 곧 신변의 보호를 위한 요진보는 세월이 흐르면서 경호원과 비슷한 뜻의 일본 속어가 되었다. 용역깡패나 개인적인 용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요진보에는 주군을 위해 긍지를 가지고 전장을 누비며 용맹을 떨쳐야 할 사무라이(侍)가 돈에 팔려 시정잡배들의 신변 보호나 하고 다닌다는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요진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무법집단 세이베이 패와 우시토라 패의 대립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어느 마을에 한 떠돌이 사무라이가 나타난다. 바람과 먼지가 소용돌이치는 마을 한가운데로 사무라이가 홀로 등장하는 첫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명장면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사무라이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눈여겨본 무법집단 두목 세이베이와 우시토라는 서로 그를 고용하여 상대편을 쓸어버리려고 한다. 그 와중에 사무라이는 우시토라 패에게 잡혀 있던 여인을 구출해서 가족의 품에 안겨주지만, 정작 그는 우시토라 부하들에게 잡혀 죽도록 두들겨 맞는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두 집단을 없애버리는 데 성공하고, 그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술집 노인장을 구한 뒤 다시 방랑길에 나선다는 이야기다.
'요진보'는 우연히 마을을 찾은 영웅이 마을의 갈등을 해결하고 홀연히 떠나는 이야기 구조나 한 마을로 한정된 공간 설정 등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vens) 감독의 '셰인((Shane, 1953)'이나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n) 감독의 '하이눈(High Noon, 1952)' 같은 서부극을 일본의 시대극으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감독의 마카로니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A Fistfull of Dollars, 1964)', 월터 힐(Walter Hill) 감독, 부르스 윌리스(Bruce Willis) 주연의 영화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 1996)'으로 재탄생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일본의 요진보를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를 등장시켜 훨씬 더 멋진 미국 서부의 사나이로 바꿔 놓았다. 하지만 '라스트 맨 스탠딩'은 흑백의 원작보다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요진보'의 한 장면
'요진보' 엔딩 장면도 인상적이다. 마을이 황폐화되도록 손 놓고 있던 포졸 한스케가 소동 내내 숨어 있다가 마지막에 슬쩍 나온다. 이때 주인공 사무라이가 한스케에게 '가서 목매 죽어!'라고 한 말이 걸작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경찰이 무법집단의 불법 행위들을 방관하고 묵인해주는 등 직무유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무라이는 술집 노인장의 포승줄을 칼로 끊어서 풀어준다. 시체를 넣는 미국 관과 일본 관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황야의 무법자'를 본 사람들은 이야기 구조나 장면들이 어딘가 서로 많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카게무샤'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일본 영화 역사상 최고의 제작비가 들어간 '카게무샤'는 전국시대 영웅인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대역을 맡은 도둑의 이야기로 허상과 실제, 사회 시스템과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탐구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후기 걸작이다.
1961년에 나온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흑백 영화 '요짐보'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1960년대에 이런 걸작 영화를 만들었다니 놀랍다.
2019.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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