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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19]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Women of the Gulag)

林 山 2019. 8. 25. 18:05

러시아의 마리안나 야로프스카야(Marianna Yarovskaya) 감독의 다큐 영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Women of the Gulag, 2018)'은 스탈린 체제 동안 소비에트 연방(소련) 인구를 황폐화시킨 탄압과 공포의 잔혹한 기관 굴라크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 여성들의 비극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다큐는 1930년대 스탈린의 억압 아래 살아남은 여성들의 유일하고 솔직한 인터뷰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다큐 영화를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리안나 야로프스카야(Marianna Yarovskaya) 감독


굴라크(ГУЛаг, gulag)는 소련에서 노동수용소를 담당하던 정부기관이다.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제도는 1919년 4월 15일자 소비에트 법령에 따라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는 행정과 조직에 변화가 있어났고 1930년대 비밀경찰인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의 통제 아래 굴라크가 설립되었다. OGPU는 1934년 해체되어 그 기능이 내각부설 국가보안위원회(KGB)로 넘어갔다. 굴라크에 수용된 사람들은 집산화 과정에서 체포된 농민들 외에 반체제 지식인, 반역 혐의가 있는 소수민족단체 구성원, 소련 공산당 내에서 세력을 잃은 사람, 외국 정부와 음모를 꾸민 혐의가 있는 여행자, 태업 혐의자, 일반 범죄자 등 여러 부류였다. 굴라크는 주로 소련의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데 이용되었다.


굴라크의 참상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이 1973년에 쓴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ipelago)'를 통해서 서방에 알려졌다. 소설에서 솔제니친은 흩어진 수용소들을 군도에 비유하고 있다.굴라크에는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내지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악의 수용소 집합체는 북극해 연안의 콜야마, 노릴스크, 보르쿠타에 있는 것이었다.


수감자들은 대부분 수감 기간 동안 내내 기아, 의류 부족, 과잉수용, 단열처리가 형편없는 집들, 열악한 위생과 열악한 의료 서비스에 노출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가혹한 육체적 노동을 강요받았다. 굴라크는 죄수들의 강제 노동을 이용한 광산 채굴과 벌목, 공장 가동으로 소련 경제 유지에 큰 도움이 됐다.


다큐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사람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체포를 한 러시아와 체포를 당한 러시아 두 개의 러시아가 서로를 마주볼 것이다'라는 문구가 자막으로 뜨면서 시작된다.


카메라 앵글은 '공산당의 날' 퍼레이드를 비춘다. 이들은 공산당 치하에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굴라크 가해자들일 수도 있다. 그 후손들일 수도 있다.


카메라 앵글은 다시 지금은 폐허가 된 추코츠키 수용소 유적으로 옮겨간다. 추코츠키 반도는 베링 해협을 사이에 두고 미국 알래스카 주와 마주보고 있다. 추코츠키 수용소 유적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붕이 날아간 건물, 무너진 벽, 녹슨 철조망.....


카메라는 다시 모스크바 루비안카 광장을 비춘다. '이름 돌려주기' 행사가 열린 광장에는 촛불을 든 러시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름 돌려주기'는 굴라크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사다. 연단에 오른 사람들은 글라크에서 처형된 사람의 이름과 나이, 처형된 연도와 날짜를 부른다.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국가폭력으로 자행된 학살 희생자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다.


표트르 메시코프(39세) 정비공 1938년 4월 5일 처형, 디미트리 레베데프(66세) 1937년 11월 27일 처형, 세르게이 레베데프 대령(35세) 1937년 6월 17일 총살형..... 가족 중에 두 명이 총살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 그의 증조할머니는 '조국을 배반한 자들의 아내들 수용소'에 수감됐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강제노동수용소들이 소련 전역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감독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무렵엔 수백만 명이 굴라크를 거쳐갔고, 수백만 명이 사망했으며, 현재는 극소수만이 생존해 있다고 알려 준다.


솔제니친은 '1928년~1953년 동안 약 4,000만 명에서 5,000만 명이 수용소 군도에서 장기복역을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대부분 1936~1953년 동안 600만~1,500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수용자들 중 약 10%가 매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베라 헤케르


베라 헤케르(Vera Hecker, 92)는 1941년~1946년까지 감옥 및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1946년~1954년까지는 망명 생활을 했다. 크세니아 추하레바(Ksenia Chukhareva, 96)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특별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아딜 압바스-오글리(Adile Abbas-Ogly, 92)는 1939년 감옥 및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엘레나 포스니크(Elena Posnik)는 1945년~1954년까지 감옥 및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4년~1957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페클라 안드레예바(Fekla Andreeva, 86)는 1931년~1942년까지 특별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나데즈다 레비츠카야(Nadezhda Levitskaya, 87)는 1951년~1955까지 감옥과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는 스탈린 묘소가 있다. 스탈린 묘소에 꽃을 갖다 바치는 시민들은 '스탈린이 잔인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굉장히 공정한 분이었죠. 우리가 어떤 나라를 세우고 어떤 전쟁을 이겼는지 보세요. 생각만 해도 눈물 나죠.'라고 말한다.


하지만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엘레나 포스니크는 '아주 가학적인 시스템이었어요. 횃불을 든 수용소 경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다들 야만인이었죠. 그들이 우리를 끌고 나오면 개들이 우리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죠. 뒤에 남은 사람들은 수용소 정문에 기대어 서 있었어요. 영화의 한 장면으로 쓰기에는 좋겠죠.'라고 증언한다.


굴라크 시스템은 시대별로 연달아 이용됐다. 처음에는 재산을 몰수당한 소작농들이 수용소로 보내졌고, 1930년대에는 스탈린이 시행한 숙청의 피해자들, 1940년대에는 나치 동조자들과 러시아 전쟁포로들, 그리고 새 점령지의 사람들이 보내졌다.


굴라크 생존자 베라 헤케르의 아버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0대였던 1905년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공부했다. 6년만에 논문을 완성하고 미국에서 강의를 하며 러시아로 돌아갈 날을 고대했다. 아버지는 돌아와 사회주의 건설에 힘쓸 생각이었다. 베라 헤케르는 5자매였다. 베라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길에 태어난 막내였다. 아버지는 끔찍한 체포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없었다. 스탈린이 모르게 자행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체포하는 건 러시아의 진정한 적이고 스탈린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버지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바로 그날 밤 아버지는 체포됐다. 미처 다 쓰지 못한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남긴 채..... 4월 5일에는 어머니가 체포됐다. 아버지는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 아버지가 혐의를 부인하자 그들은 '괜찮아. 내일이면 다 인정할 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어 '그리고 만약 인정하지 않으면 이미 네 아내는 체포된 상태고 네 자식들까지 체포할 거야.'라고 협박했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혐의를 전부 인정했다. 하지만 그달 26일에 처형됐다.


우랄산맥의 카멘스크우랄스키에 사는 굴라크 생존자 페클라 안드레예바의 증언이다. 그야말로 대학살이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학살..... 1930년대 강제노동으로 설립된 알루미늄 처리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을 건설한 사람 12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안드레예바의 아버지였다. 가족은 공식적으로 체포된 사람들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식적으로 아버지를 버리라고..... 그리고 그분들을 민중의 적으로 비난하라는 거였다. 그래서 싫다고 했다. 경찰은 우리를 못 본 척 해줬다. 우린 문 밑으로 기어들어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방 하나에 60명이 갇혀 있었는데 사람들이 큰딸이 왔다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창가로 다가왔다. 그때 안드레예바는 고작 11살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네가 가장이다. 동생들을 가르쳐라. 교육받은 사람들을 짓밟기는 훨씬 어려우니까. 공부 열심히 하고 어머니 할아버지를 잘 모셔라. 네가 내 대신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안드레예바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랐다. 아버지 일행을 화물열차에 태운 후 문을 잠그자 여자들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 넋이 나가서 돌아다녔다. 산발머리를 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자녀들을 끌어안고 '이제 아버지가 없어.'라고 절망적으로 말했다.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나데즈다 레비츠카야는 아버지 그리고리 안드레예비치 레비츠키에 대해 증언한다. 아버지는 1941년 6월 28일에 체포되어 1942년 8월 20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는 식물연구원 연구소 책임자였다. 어머니는 엄격한 노동수용소에서 25년을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2년 동안 노예처럼 일하고 1953년 3월 1일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스탈린 사망 전날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알게 된 건 레비츠카야가 수용소에서 석방되고 난 후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이렇게 썼다, 자신도 체포 당시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저요? 죄가 뭐죠?'....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엘레나 포스니크


흑해 연안의 도시 수후미에 사는 굴라크 생존자 아딜 압바스-오글리의 증언이다. 한 집에 한 명씩은 사라지곤 했다. 전쟁터에 나가서 죽든지 억압기에 끌려가서 죽든지. 억압기는 정말 대단했다. 말을 어떻게 자르는지 아는가? 그런 식으로 좋은 사람들을 다 죽였다. 아딜은 스탈린을 두 번 봤다. 그가 아브하지아에 사냥을 하러 왔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달려가서 '스탈린이 왔어요, 스탈린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어른들은 공포에 질려서 숨었다. 주변에 개들이 있었고 스탈린은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희한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딜은 15살에 스탈린의 친구이자 아브하지아의 당 지도자인 네스토르 라코바의 집안으로 시집갔다. 1937년 이미 마을에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라코바가 민중의 적이라고. 그의 친구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다가 아딜의 가족들이 소환돼서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카챠 숙모도 끌려가 심문을 받으면서 엄청나게 맞았다. 검사는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전화 벨이 울리자 검사는 등을 돌린 채 받았다. 그 방바닥에는 틈새가 있었는데 숙모는 뽑힌 머리카락과 부러진 이를 그 틈새에 숨겼다. 언젠가 누군가 인권유린 현장의 증거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서..... 이빨과 머리털은 썩지 않으니까. 숙모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베라 헤케르의 증언이다. 피셔디스카우! 어머니와 아버지의 혐의를 제기하는 건 쉬웠다. 부모는 해외에서 살았으니까. 베라는 19세 소녀였다. 어머니에 대한 거짓말을 꾸며내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베라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놈들은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날 베라가 파티를 열고 피아노를 치면서 파시스트 찬가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 베라는 그날 베토벤 소나타와 바흐의 곡들을 연주했을 뿐이었다. 다른 곡은 연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전 10시 집에 찾아왔다. 자매 둘은 모스크바에 있었고, 베라와 다른 자매 둘은 집에 있었다. 자매 셋은 한꺼번에 잡혀갔다. 놈들은 세 자매를 차에 태웠다. 저쪽에서 이웃이 한 명 다가왔다. 페챠라는 청년이었다. 그가 세 자매를 배웅했는데, 베라는 그에게 '안녕, 10년 후에 봐요'라고 말했다. 그런 소릴 하면서 웃었다.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엘레나 포스니크의 증언이다. 사람 두명이 찾아왔는데 뭐 하러 온 건지는 몰랐다. 그들은 '춤을 춰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불량배인 줄로만 알았다. 그들은 비밀경찰이라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머리핀과 반지는 빼라고 했다. 귀걸이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못 본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수감됐다. 재판은 엉성하고 굉장히 짧았다. 7월 16일에 체포됐는데 9월에 벌써 유죄판결을 받았다.신문 세 번 받고 끝이었다. 당시는 어려서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러시아가 점령당했을 때 게릴라 활동을 하지 않고 적 밑에서 부역한 혐의를 받았다. 거기 할머니 셋이 있었다. 화장을 진하게 한 할머니가 엘레나의 변호사였다. 15분도 안돼서 재판은 끝났다. 10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치장으로 돌아가자 감방 사람들이 몇 년형이냐고 물었다. 10년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25년형을 받았다. 여러 교도소를 전전했다. 수후미 NKVD(비밀경찰), 트빌리시 NKVD, 바쿠 NKVD 등등.....여러 지역을 떠돌다가 로스토프와 하우키우시즈란으로 갔다. 심문관이 소환하더니 '이 많은 혐의들을 봐. 넌 반역자고 스파이야. 또 무슨 짓을 했을지 알게 뭐람'이라고 말했다.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나데즈다 레비츠카야의 증언이다. 감옥에서 처음 몸수색을 할 때 수치스러운 일이 시작됐다. 그들은 수감자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여자들은 산부인과용 의자에 앉으라고 강요했다. 일반 의사들과는 검사하는 방법이 달랐다. 훨씬 거칠고 무례하고 수치스럽게 굴었다.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엘레나 포스니크의 증언이다. 엘레나는 1945년 6월 25일에 체포됐다. 서류에는 7월로 돼 있었다. 그들은 엘레나를 수감소에 데려가서 독방에 가뒀다. 거기서 2년 반 동안 수감돼 있었다. 쥐 한 마리가 오곤 해서 먹을 걸 주곤 했다. 음식이 올 때마다 쥐가 나타나서 앉았다. 쥐의 털이 반쯤 태워져 있었다. 누가 태웠을까? 실화다. 10시에 불을 끈다. 페도토프라는 자는 9시 45분에 엘레나를 불러들인다. 앉으라고 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나간다. 엘레나는 독일군과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엘레나는 그때까지 처녀였다. 그는 엘레나가 독일군과 잠자리를 한다고 했다. 엘레나가 부인하자 산부인과 의사를 부른다고 위협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일어서라고 했고 엘레나는 수면부족으로 일어서다가 쓰러지곤 했다. 그 과정이 밤새도록 계속됐다. 유죄 판결을 받은 후 그들은 어머니가 있던 감방에 엘레나를 밀어넣었다. 며칠 동안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전부 다른 데로 갔다. 남은 두 사람만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정말 일어난 일이었다.


엘레나가 먼저 다른 것으로 보내졌고, 어머니는 감방에 남았다. 눈부시게 밝은 전구가 천장에 달려 있었고,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손이 닿지 않았다. 벽에는 아무것도 없고 바닥에는 건초가 깔려 있었다. 사흘간 거기 있으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 그 방은 사형 집행을 받게 될 사형수들이 머무는 방이었다. 경비가 문을 열고 엘레나를 보고는 가여웠는지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사흘간 빵 한 조각에 물 한 잔밖에 못 먹었다.


엘레나는 독일어를 제법 잘하고 우크라이나어는 그럭저럭 한다.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한다. 라트비아어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또 감옥에 가겠다 싶었다. 통역을 했다는 이유로 이미 수감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라트비아어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랄 지역 마르튜시 굴라크 인력이 건설한 곳에 '1917-1959년에 소련 정부가 저지른 불법적인 대탄압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라!'고 새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러시아 정교회 행사에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크세니아 추하레바도 참석했다.


굴라크 수용소 생존자 크세니아 추하레바의 증언이다. 크세니아는 1931년 5월 19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끌려왔다. 열차 한 칸 가득히 전부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추방당하기 전엔 가축을 키우는 농부들이었다. 동틀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종일 일했다. 크세니아는 당시 15살이었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막 세상을 떠났고 남자 형제는 5명이었다. 그들은 크세니아 집안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추방자들이 끌려왔을 때 마르튜시는 숲이었다. 겨울이 오자 땅을 파서 몸을 피할 곳을 마련했다. 벽은 나뭇가지에 진흙을 발라 만들었고 바닥은 그냥 땅이었다. 입구는 뗏장에 진흙을 발라서 막았다. 한 구덩이당 서너 가족이 함께 쓰게 되어 있었다. 그런 구덩이는 총 200개가 있었다. 물이나 장작도없었다. 경비들은 수용자들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일을 시켰다.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경비병이 와서 때렸다. 맞아서 죽는 사람도 있었다. 시체를 끌고 가기도 했다. 이곳은 수용자들의 뼈로 지어진 거나 다름없다.


베라 헤케르의 증언이다. 죄수들에게 가장 힘든 시간은 이송되는 동안이다. 죄수를 이송하는 과정을 에타프라고 부른다. 열차 차량 중 '송아지 차'라는 게 있다. 차량에 타면 나무 벤치에 앉아야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부는 바닥에 앉아야 했다. 차량 한가운데는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용변을 보는 용도였다. 더없이 끔찍한 환경이었다. 노파들은 죽어가고 있었고, 여자 하나가 출산을 했는데 아이는 죽어 있었다. 식사는 하루에 한번만 제공됐다. 그렇게 23일을 여행해서 프룬제에 도착했다. 거기엔 거대한 감옥이 있었다. 감방마다 판자로 만든 2층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귀리죽이 나왔는데 참 맛있게 먹었다. 약한 사람들은 그 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엘레나 포스니크를 인터뷰하는 마리안나 야로프스카야 감독


페름-36 박물관은 유일하게 보존된 굴라크 노동수용소다. 아딜 압바스-오글리의 증언이다. 경비를 비롯해서 죄수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더러운 것, 몇 번이나 결혼했어?'라면서 윽박지르곤 했다.


나데즈다 레비츠카야의 증언이다. 나데즈다는 벌목 수용소로 보내졌다. 여성 벌목 수용소는 이미 법으로 금지된 상태라서 존재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나데즈다가 수용소에 도착하자 동지들이 '여긴 리조트야. 네가 편히 쉴 수 있는 요양원이야'라고 말했다. 당시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처벌용 방으로 끌려가곤 했다. 얼어붙을 만큼 추운 독방이었다.


페클라 안드레예바의 증언이다. 제일 힘들었던 게 벌목이었다. 따뜻한 옷도 신발도 없이 배를 곯는 젊은이들이 숲으로 벌목을 하러 가야만 했다. 종종 맨발로 동상이 걸린 채 돌아오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은 죽어도 못 잊을 것이다. 굵은 나무를 굴리던 기억이 난다. 너무 굵어서 네 명이 달라붙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60년이 지났지만 그 광경은 잊지 못할 거다.


베라 헤케르의 증언이다. 작업 시간이 끝나면 어깨에 고리를 걸고 한 명당 통나무 하나를 등에 지고 끈다. 통나무를 가져오지 않으면 저녁을 주지 않는다. 10월인가 11월인가 끔찍하게 춥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었다. 머리를 민 한 소년이 벌벌 떨면서 다가왔다. 속옷 대신 누더기를 걸치고 거의 벌거벗은 상태였다. 다 찌그러진 그릇 하나를 들고서. 베라도 삭발 상태였다. 소년은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서 빵이나 음식물을 나눠주곤 했다. 소년은 창고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직원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소년은 몸을 떨면서 멀어져 갔다. 그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소년은 아마 옷을 전부 벗어서 팔았을 것이다. 빵 한 조각을 위해서.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갔지만 죄수들은 일을 했다. 그들은 죄수들을 새벽 5시에 깨웠다. 수용소는 늪지대 안에 있어서 우기가 시작되면 거기까지 가기가 아주 힘들었다. 신발은 젖고 다리는 빨갛게 부었다. 텐트에서 자다가 밤에 잠에서 깨면 개구리들이 죄수들의 입 안에서 몸을 데우곤 했다. 입을 벌리고 잘 때 개구리들이 입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콜리마 지역 부투기차그 광산 수용소에서 수천 명이 굶주림과 방사능 중독으로 사망했다. 엘레나 포스니크의 증언이다. 부투기차그에서는 주석석을 캤다. 실은 우라늄 광석이었다. 이곳에는 150m 높이의 산이 두 개 있다. 남자 수용소 자리에는 진짜 우라늄이 있었다. 죄수들은 산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사방에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날씨는 몹시 추웠다. 바위에 물을 뿌리면 바로 얼어붙었다. 그들이 나무로 만든 사각형 질통을 줬다. 배낭처럼 메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걸 메고 올라가면 광석을 담아주었다. 그러면 산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 내려왔다. 거기선 아무것도 안자랐다. 바위뿐이었다. 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더 있으면 죽을 것 같았다. 처음 광산을 열었을 땐 사람을 처형조차 하지 않았다. 경비들이 사람을 산 아래로 떨어뜨려서 죽게 놔뒀다.


베라 헤케르의 증언이다. 1938년에 800명의 여성이 수용소 건설에 투입됐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전부 하나씩 만들어야 했다. 투옥된 남편들을 둔 여성들이 모든 노동을 도맡아 하는 거대한 규모의 국립 농장이었다. 당시 몸이 너무 아팠다. 너무 약해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어느 날 집 뒤로 갔더니 알리사 언니가 있었다. 알리사는 아름답고 베라는 너무 추한 몰골이었다, 알리사에게 달려가 둘이 붙잡고 많이 울었다. 베라의 언니 알리사는 수용소 생활 중에 또는 그 후에 수용소 생활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 중에는 수레에 가득 실린 시체더미도 있다.


부활과 성스러운 새 순교자들의 성당 벽에는 '순교자 한 명 한 명을 기리고 그들의 죽음을 생각하자.', '사랑하는 이들이 홀로 쓸쓸하게 죽어간 걸 생각하자.'는 글귀가 걸려 있다.


모스크바에서 20km 거리인 부토보에서는 1937년~1938년까지 1만 명 이상이 총살당했다. 사람들을 처형할 때 그들은 매일같이 기준과 할당량에 따라서 처형 명단을 작성했다. 매일 사형 집행인이 서명을 하고 갔다. 자기가 맡은 일을 제대로 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다. 그들에겐 그냥 일이었다. 가장 많았던 날은 500명 넘게 처형됐다. 상상이나 되는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카라간다에서 살았다. 그리고 탄광에서 일했다. 친척들을 재결합시키는 법이 있었다. 수용소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지만 사는 구역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도망치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살겠다고 매달 서명해야 했다. 그러니까 추방이었다. 그걸 영구 추방이라고 불렀다.


1953년 스탈린이 죽었다. 스탈린이 죽고 굴라크 시스템은 서서히 쇠퇴했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스탈린 시대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스탈린 시대에 혜택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수용소 출신들 중에는 알루미늄 숟가락을 늘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수용소에서 썼던 것과 비슷한 그릇을 쓰는 게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엘레나 포스니크의 증언이다. 부투기차그에서는 어느 집이나 우라늄 가루가 있었다. 죄수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집에서 살았다. 당시엔 약해진 것 빼고는 아무 문제도 못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20분 일하면 30분은 누워 있어야 한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건강하다고 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쓰러지곤 했다.


솔제니친 재단. 선반 두 개에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있다. 솔제니친 전집도 있다. 한 사람은 솔제니친의 조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솔제니친을 선양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한 사람은 죽은 동포를 찾는 일에 헌신했다. 지금까지 총 412명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시신이 매장되지 않은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즉 위령묘다. 위령묘는 고대 로마 병사들이 먼 타지에서 죽었을 때 만들었던 거라고 한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서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 아마도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살아남은 걸 것이다.


한번은 고해성사 때 신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아버지를 고문하고 죽인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느냐? 신부는 탄압한 당사자들만 용서할 수 있다고 했다. 나를 심문한 사람을 우연히 노브고로트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타인을 대신해서 누군가를 용서할 순 없다. 추방된 사람들은 이제 다 죽고 몇 명 안 남았다.


2017년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의 38%가 세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스탈린을 꼽았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푸시킨이 34%로 공동 2위에 올랐다.


역사의 아이러니~!


2019.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