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슬라브 흐리스토프(Tonislav Hristov)는 불가리아 출신의 다큐 감독이다. 그의 '더 매직 라이프 오브 V(The Magic Life of V)'는 핀란드와 덴마크, 불가리아를 배경으로 라이브 롤플레잉(live role-playing)으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토니슬라브 흐리스토프(Tonislav Hristov)
롤플레잉은 J.L.모레노가 1920년대 초에 만들어낸 말이다.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 心理劇)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롤플레잉은 주로 노이로제와 정신병 치료에 이용되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의 학대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주인공 소녀는 지적 장애(intellectual disability)가 있는 오빠를 독립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오빠를 라이브 롤플레잉을 통해서 다양한 역할과 정체성의 세계로 이끌던 그녀는 자신의 트라우마도 서서히 치유해 간다. 그녀는 마침내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던 과거와 마주할 용기를 갖게 된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자,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집을 떠났다. 오빠는 정신지체장애인이다. 가족은 해체됐다. 소녀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무인도처럼 홀로 남았다. 이런 환경에서 소녀의 홀로서기와 행복찾기는 지난하기만 하다.
월드 인포 마법적 재능 라이브 롤플레잉이다. 소녀의 캐릭터는 V다. V는 초등학생 수다쟁이다. V는 누구든 만난 순간 친구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항상 행복하고 학교에서도 착한 학생이다. 항상 남을 도와주고 협동심도 많다.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도 아주 성실하다.
V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500km 떨어진 곳에 있는 초하 캐슬(Czocha Castle)에서 대규모 라이브 롤플레잉 대회가 열렸다. V도 참석했다. V는 악령과 영혼의 소환, 빙의에 대해 실제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게임마스터(GM)를 찾았다.
참가자들은 돌아가면서 고민을 말한다. V의 차례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길 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감정이 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없애고 싶다고 호소한다. 라이브 롤플레잉에 참가한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원을 그리며 돈다. 한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다. 돌면서 '루모스(Lumos)'를 외친다. 루모스는 빛을 만들어주는 마법의 주문이다.
참가자들은 '루모스! 루모스!'를 계속 외치고, GM은 '힘을 느껴요! 불속으로 흘러 들어가요!' 하고 최면을 건다. 시간이 흐르고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쯤 GM은 이제 자신이 안고 있는 짐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롤플레잉이 끝나자 V는 무언가 후련해진 느낌이다.
핀란드 얌샤 V의 엄마네 집이다. V는 엄마에게 산책을 가자고 한다. 두 사람은 하얀 눈이 덮힌 끝없이 넓은 들판으로 산책을 나간다. 엄마가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은 뭐니?' 하고 묻는다.
V는 회상한다. 어느 주말에 엄마는 없고 아빠와 오빠만 집에 있을 때였다. 아빠는 술을 몇 잔 마시고 욕실에서 면도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자기 목을 살짝 베고는 목을 잡은 채 남매에게 와서는 그르렁거리며 죽는 척을 하면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런 이상한 놀이를 했다. 이게 아이들하고 할 놀이인가? 하지만 V에게는 그나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V와 오빠 빌
V의 오빠는 빌이다. V보다 두 살 많다. 빌은 태어날 때는 정상이었다. 1살 때 고열로 인한 뇌손상을 입었다. 어렸을 땐 사이좋게 잘 놀았다. V의 사춘기가 지났을 때 동네 아이들이 빌이 장애라며 V를 놀리기 시작했다. 이후 빌과 말싸움을 자주 하게 됐다. 빌에게 못된 짓도 했다. 오빠에 대한 분노가 강렬했다.
이제는 V가 오빠를 케어해 주는 입장이다. 빌이 아빠한테 갔을 때 뭘 했느내고 묻자 술을 마셨다고 한다. V가 빌에게 성을 바꾼 사실을 알려 준다. 아빠의 성을 쓰기 싫어서 외할머니의 성을 따랐다. 아빠를 못 본 지 10년도 넘었는데, 아빠의 성을 쓰는 것이 이상해서 200유로를 주고 바꿨다.
V와 빌은 함께 라이브 롤플레잉 게임에 자주 참가한다. 빌이 독립적으로 사회 생활을 해나가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다. 이젠 V가 누나 같다.
상담사(GM)가 V에게 묻는다. 어린 시절 무서웠던 기억이 있어요? 아버지가 자제력을 잃어서 더는 믿을 수 없었던 기억은? V는 대답한다. 어린 시절 내내 거의 그런 감정을 느꼈어요. 술만 마시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어요. 술이 취하면 허리띠로 오빠를 때렸어요. 엄마를 때리기도 했고요. 처음엔 죽는 게 무서웠지만 나중엔 너무너무 죽고 싶었어요.
엄마와 남매가 한자리에 모였다. V는 엄마에게 묻는다. 왜 이혼했어요? 엄마가 말한다. 아버지의 날 저녁이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빌에게 폭력을 가했다. 내가 그를 발로 차면서 빌을 못 때리게 했지.
불가리아 보스넥(Bosnek) 라이브 롤플레잉 게임 장소다. V도 참가했다. 달밤에 모의총을 가지고 하는 사냥 게임이다. 여성 파트너가 묻는다. 네 인생에 있어서 이루고 싶은 건 뭐야? 네 인생 최고의 사건이 될 만한 건 뭐야? V는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다. 1년 전부터 거짓말을 안 하기로 했다. 이번엔 V가 파트너에게 묻는다. 네가 한 가장 큰 거짓말은 뭐야? 파트너는 말한다. 커밍아웃을 안 한 거야. 동성애자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지. 나 자신을 숨기고 살면 인생을 진정으로 살 수 없어. 이중적인 생활을 해야 하거나.....
엄마는 오빠 빌이 상태가 악화돼서 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오빠는 독립해서 살아갈 생활 능력이 없어 엄마에겐 엄청난 부담이기 때문이다. 빌이 아빠를 만나러 가면 술을 마시게 한다.
V는 15년만에 아빠를 만나러 간다. 아빠를 만나는 게 두렵다. 상담사는 역할극 캐릭터 중에서 아빠가 되는 법도 모르는 아빠를 만나러 지혜와 인내와 힘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찾으라고 한다.
마침내 V는 15년만에 아빠를 만났다. 포옹 같은 건 없었다. 마치 남남처럼 어색한 분위기만 흐른다.
V: 요즘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어요. 15년 동안 일어난 다양한 일들이요.
아빠: 나도 그랬다. 난 형편없는 아빠야. 아니, 아빠도 아니지.
V: 그렇게 느끼세요?
아빠: 그래.
V: 어린 시절이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건 맞아요. 전부 다 맞아요.
아빠: 맞아. 하긴 그렇다 해도 지금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건강은 괜찮니?
V: 네. 오빠보다 괜찮아요. 오빠가 여기 왔을 때 아빠랑 술 같이 마셨다고 하던데요.
아빠: 주로 걔가 마셨지.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어.
V: 아예 안 마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으세요? 왜 술을 드세요?
아빠: 인생이 따분하니까.
V: 아빠를 단순히 술주정뱅이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싶어요.
아빠: 맨날 똑같은 인생이.....
V: 그걸론 부족했어요?
아빠: 적어도 그땐 부족하다고 느꼈지.
그걸로 부녀간의 만남은 끝이었다. 15년만에 만난 부녀는 평행선을 달리는 열차처럼 대화도 겉돌았다. V는 어쩌면 아빠를 잊어버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V와 동성애자 파트너
아빠의 집을 나온 V는 눈덮힌 숲속에서 월드 인포 마법적 재능 라이브 롤플레잉에서 입었던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숲을 향해서 외친다. 루모스! 루모스! 루모스! 루모스!
절망 끝에 외치는 신 루모스..... 외로움에 사무친 끝에 부르는 신 루모스..... 루모스가 V 앞에 나타나면 좋겠다. V의 소원을 들어주면 좋겠다.
V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와 다시 라이브 롤플레잉 게임을 한다. 밝게 빛나는 전구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갓이 씌워져 있다. V는 갓을 돌리면서 오빠에게도 돌리라고 권한다.
V의 마술 같은 삶이다. 전등의 밝은 빛은 루모스의 상징이던가? 짠하게 다가오는 다큐다.
2019.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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