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란 간 갈등은 1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32년 경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였던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었다. 이슬람 공동체는 스스로 후계자를 정해야만 했다. 무함마드의 혈육을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시아파가 됐고, 공동체 합의를 통해 적임자를 뽑아야 한다는 이들은 수니파가 됐다.
무함마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알리)을 초대 칼리프(정치, 종교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 바크르를 추대했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오른팔이었고, 둘째 딸을 무함마드에게 시집 보내 영향력도 컸다. 결국 수니파 의견이 채택돼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가 됐다. 이후 시아파는 공동체 내의 큰 불만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갈등이 노골화한 것은 시아파의 알리가 어렵게 제4대 칼리프에 올랐다가 곧 암살되면서부터다. 그 뒤 알리의 장남 하산마저 수니파 꾐에 넘어간 그의 아내에게 독살당하고, 차남 후세인도 수니파와 치른 전투에서 숨지면서 두 종파는 원수가 됐다.
수니파 무슬림 분포 지도
현재 전 세계 16억 무슬림 중 90%가 수니파, 10%가 시아파다. 정치적 기반과 종파가 밀접하게 얽힌 이슬람 국가들은 반대 종파와 분쟁을 빚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으며, 그 중심에 사우디와 이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사우디는 수니파 무슬림이 90%, 시아파 무슬림이 10%다. 반면에 이란은 무슬림 인구 98% 가운데 시아파 무슬림이 90%, 수니파 무슬림이 8%다.
사우디와 이란이 외교 문제로 분쟁을 겪은 첫 사건은 이스라엘의 국가 인정 문제였다. 당시 중동 지역의 최대 이슈는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를 반대하며 사우디, 이집트 등 아랍국가들이 일으킨 중동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란은 1950년 이슬람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친서방 세속주의를 표방한 팔레비 왕조가 이란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문제로 사우디는 이란을 비난했고 사이가 나빠졌다. 이후 양국은 1960년 석유수출기구(OPEC)의 창립 멤버로서 경제적 교류만 유지하는 사이가 됐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로 아랍국가들과의 연대감도 약했다. 언어와 인종도 달랐다. 이란은 인도-유럽계의 아리아인으로 페르시아어를 쓴다. 이란은 대부분 페르시아인과 아제리, 쿠르드 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르시아 왕국은 바빌론-페르시아-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서양 문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4대 왕국 중 하나이다. 이러한 역사는 이란인들이 자국을 아랍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자부심의 근원이다. 아랍족인 사우디는 셈족 언어인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우디 인구의 90%가 아랍인이다.
1929년부터 사우디와 이란은 조약을 맺고 서로 친하게 지내왔다. 이란이 팔레비 왕정체제일 때만 해도 양국은 큰 분쟁 없이 지냈다. 사우디는 서양과 교류는 하면서도 종교적 보수성을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이란은 서양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슬람 특유의 색깔을 조금씩 잊게 되었다. 이런 이슬람 사회의 변질을 우려하던 이란 종교지들자들의 주도하에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시아파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끈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고 반미 이슬람 공화국으로 변신했다. 1980년 사우디와 미국의 동의를 얻은 이라크의 수니파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후세인의 주 목표는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혁명정권의 타도였다. 하지만 이라크 군은 이란 군에 격퇴당하고 말았다. 1988년에 끝난 이 전쟁은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두 나라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 전쟁으로 이란과 사우디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이란은 다른 이슬람권 왕정 국가에도 공화정 혁명이 이뤄져야 한다며 이슬람 혁명론을 전파했다. 사우디는 이란의 혁명 사상이 확산돼 국내외 반사우디 세력의 대규모 시위나 정치 봉기로 번질 것을 우려했다. 사우디 전체 인구 2,775만 명의 20% 정도는 친이란 성향의 시아파 무슬림인 데다가 사우디 서쪽의 홍해를 제외한 주변에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시아파 무장단체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사우디 간의 외교, 군사적 갈등은 최근 시리아 내전과 예멘 내전 등에서 서로 반대편을 지원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란은 시리아 시아파 지도자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반면에 사우디는 시리아 수니파 반군을 지지라고 있다.
사우디 동남부에 위치한 중동 최빈국 예멘은 현재 내전 상태다. 북서쪽에 대다수가 거주하는 시아파 후티족은 수니파 현 정권 타도를 목표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란은 후티 반군, 사우디는 기존 정권을 지원하면서 두 나라의 대리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아야툴라 알리 카메네이 이란 최고 지도자와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사우디가 이란의 부상에 민감한 것은 중동 지역 맹주의 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사우디는 이란의 시아파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중동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이란 또한 마찬가지다.
이란과 사우디 사이에 있는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정권 몰락 이후 현재 시아파 정권이 들어섰다. 또 시리아 현 정권도 시아파이다. 이란이 주축이 된 시아파 국가들이 사우디를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사우디로서는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우디-이란 양국은 2016년 1월 사우디가 시아파 종교지도자를 처형한 것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됐다. 사우디가 시아파 시위의 배후로 지목한 알니므르를 알카에다 등 테러범들과 함께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분노한 이란인들은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에 불을 질렀고, 결국 양국은 앙숙이 되었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2015년 서방과의 핵 협상 타결로 불량 국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키워가는 이란에 대한 사우디의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2019.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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