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무궁화(無窮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徽章)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강효백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조현래(필명)는 강효백의 주장에 대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강효백만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56년 당시 일간지에 화훼연구가 조동화와 식물학자 이민재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도 사회 일각에서 애국가와 국화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애국가는 작곡자가 친일파이고, 가사도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국화도 무궁화가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조현래-강효백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林 山>
■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30) 槿花鄕(무궁화나라)에 대한 왜곡
[두 얼굴의 무궁화] 최치원이 당나라 소종(昭宗)에게 보냈다는 '사불허북국거상표' 가운데 신라를 '근화지향'이라고 자칭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고려 때 표사(表詞)에서는 고려가 스스로를 '근화향'이라 하였다고 씌어 있으나, 최남선은 고려의 글에서도 '근화향'을 쓴 예를 보지 못하였다고 반박하였다. 필자도 『고려사』, 『고려사절요』,『제왕운기』를 비롯한 고려 사료들을 심층분석하였으나 '근화향'은 전혀 없음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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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 check(1)》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란?
▶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란?
-통일신라는 당시 발흥하고 있었던 발해와 외교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사신이 앉는 위치에 관하여 신라의 외교적 지위를 인정해 준 당나라 소종(昭宗)에게 감사의 표문을 지어 보내게 된다.
-표문의 저자는 통일신라의 대문호 최치원(857~?)이었으며 그가 표문을 보낸 때는 서기 897년이었다.
-「謝不許北國居上表」(사불허북국거상표)는 “발해(北國)가 신라(新羅) 위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음을 사은하는 표문”이라는 뜻이며, 이 표문에서 槿花鄕(근화향)은 신라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槿花鄕(근화향)이 나타내는 해당 원문은 아래와 같다.
원문 : 向非皇帝陛下英襟獨斷 神筆橫批 則必槿花鄕廉讓自沈 楛矢國毒痡愈盛
번역 : 지난번에 황제 폐하께서 홀로 영단을 내리시어 신필(神筆)로 죽 그어 비답하지 않으셨더라면 필시 근화향(槿花鄕)의 염치와 겸양은 스스로 가라앉고, 호시국(楛矢國)의 독기와 심술은 더욱 성해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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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고운문집(孤雲文集) 』, 1926년 간행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가 최초 기록된 곳은?
-최치원의 『고운문집(孤雲文集)』은 그 후손들이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간행한 것이다.
-최치원은 당대에 직접 저술한 문헌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헌강왕 11년(885년)에 귀국하여 그 이듬해인 정강왕 1년(886년)에 당나라 시절의 표문을 비롯하여 작품을 간추려 정강왕에게 바친 개인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이다. 그 중 20권이 여러 경로로 재인쇄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사불허북국거상표」가 작성된 때는 897년이고 개인문집 『계원필경』은 886년에 저술된 것이므로 이 문헌에는 「사불허북국거상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사불허북국거상표」는 어느 문헌에 최초 기록되었을까?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가 실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최해((崔瀣, 1287~1340)는 고려 후기 문인으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다가 고려에 귀국하여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최해는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원나라 선비들이 우리나라 시문을 보기를 원하였으나 시문선집이 없어 부응하지 못하여 수치를 느끼다가 귀국 후 통일신라 최치원으로부터 고려 충렬왕에 이르는 동안의 명가(名家)의 시와 표문 등을 모은 책을 저술을 하였는데, 이것이 1338년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동인지문(東人之文)』이다.
-『동인지문(東人之文)』(1338)에는 별다른 설명없이 최치원이 저술한「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의 원문이 그대로 전제되어 있다.
-최해의 『동인지문(東人之文)』은 전해 내려오는 문헌에서 시와 표문을 뽑아 기록한 것이므로 그 이전에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를 기록한 별도의 문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현재 분명한 것은 최치원의「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의 원문이 게재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존하는 문헌은 고려후기 최해가 저술한『동인지문(東人之文)』(1338)이라는 것이다.
▶이수광의『지봉유설(芝峰類說)』의 槿花鄕(근화황)에 대한 기록은?
원문 : 山海經曰 海東有君子國 衣冠帶劍好讓不爭 有堇花草朝生夕死 又古今記曰 君子之國地方千里 多木槿花 按唐玄宗謂新羅號爲君子之國 且高麗時表詞 稱本國爲槿花鄕 蓋以此也
번역 : 산해경에서 말하기를 "해동에 군자의 나라가 있으니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으며 근화초(堇花草)가 있으니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다"하였다. 또 고금기(古今記)에는 말하기를 "군자의 나라로서 지역은 천리이며 목근화(무궁화)가 많다"고 하였다. 고증하여 보니 당나라의 현종이 "신라를 군자지국이라고 부른다"고 한 말과 또 고려 때 표사에 우리나라를 일컬어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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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峰類說)』중 제2권(卷二) '諸國部'(제국부), 1614년 간행
-이수광( 李睟光 , 1563~1628)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대제학, 이조참판 및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 활동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에는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호는 芝峰(지봉)이다.
-『지봉유설(芝峰類說)』(1614)은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이수광이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신에서 얻은 견문을 토대로 1614년에 간행한 백과사전류 문헌에 속한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제2권(卷二)에는 여러 나라(諸國)을 소개하는 곳이 있으며, 그 중 우리나라(本國)을 소개하는 부분에 "且高麗時表詞 稱本國爲槿花鄕"(또 고려 때 표사에 우리나라를 일컬어 근화향이라고 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fact check(2)》 『지봉유설(芝峰類說)』의 기록이 오류?
-『지봉유설(芝峰類說)』제2권 제국부의 우리나라(本國) 편에 나오는 "且高麗時表詞 稱本國爲槿花鄕"(또 고려 때 표사에 우리나라를 일컬어 근화향이라고 했다)는 구절이 오류인가? 맞다. 이 구절에서 '高麗'(고려)는 오류가 맞다!
-현재의 시각에서 살피자면, 표문(表文) 또는 표사(表詞)에서 '槿花鄕'(근화향)을 언급한 것은 최치원의「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897)이며, 이 표문이 적혀진 때는 통일신라 시기인 897년이라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 문헌이 쓰여지던 시대에는 현재와 같은 정보의 데이터베이스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정보는 개인이 일일이 문헌을 찾아 그 문헌 전체를 수차례 읽고 제대로 해석해야만 오류없이 기록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어려움으로 인해 옛 문헌에는『지봉유설(芝峰類說)』에 기록된 오류와 비슷한 것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기도 한다.
-게다가 앞서 살핀 것처럼 최치원의「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가 기록된 문헌이 고려때 저술된『동인지문(東人之文)』(1338)이었고,『동인지문(東人之文)』의「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의 해당 문헌에는 저자로 최치원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지도 않았으므로『지봉유설(芝峰類說)』의 오기가 이해될 법도 하다.
-굳이 최남선(1890~1957)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현재 확인되는 정보를 근거로『지봉유설(芝峰類說)』의 "且高麗時表詞 稱本國爲槿花鄕"(또 고려 때 표사에 우리나라를 일컬어 근화향이라고 했다)라는 구절을 "且新羅時表詞 稱本國爲槿花鄕"(또 신라 때 표사에 우리나라를 일컬어 근화향이라고 했다)라고 바꾸어 읽으면『지봉유설(芝峰類說)』의 구절은 그대로 사실로서 이해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 '高麗'(고려)가 아니라 '新羅'(신라)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고려사』,『고려사절요』,『제왕운기』를 언급할 필요가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 문헌 어디에 외교전에 사용된 표문을 기록한 것이 있던가?
-고려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충렬왕 때까지의 시와 표문을 모아 놓은『동인지문(東人之文)』(1338)을 찾아 읽으면 최치원의「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와 동일한 원문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으며 『동인지문(東人之文)』의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의 누리집에 그대로 공개되어 있고, 槿花鄕(근화향)으로 검색하여 쉽게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참고(1)》『두 얼굴의 무궁화』는「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나오는 표현이 '槿花之鄕'(근화지향)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동인지문(東人之文)』(1338)의 기록에 따르면『지봉유설(芝峰類說)(1614)』에 기록된 것처럼 '槿花鄕'(근화향)이라 기록되어 있다. '槿花之鄕'(근화지향)과 '槿花鄕'(근화향)은 같은 뜻이고 표현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두 얼굴의 무궁화』는 끊없이 이런 작은 문제를 침소봉대하여 논리조작과 왜곡에 사용하므로 그 차이를 밝혀 둔다.
《참고(2)》1765년에 저술된 역사서인 안정복의『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발해와의 외교전과 관련하여 기록된 槿花鄕(근화향)이 통일신라의 표문에 기록된 것임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fact check(3)》 우리나라를 槿花鄕(근화향=무궁화나라)으로 인식한 문헌이 최치원의「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으로 지칭한 우리의 옛 문헌들이 다수 있다.
-우리나라를 무궁화나라(槿花鄕, 槿花之鄕, 槿花世界)로 인식한 옛 문헌 중 일제강점기 이전의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국사편찬위원회 및 한국고전종합 DB에서 확인되는 문헌만을 뽑아보면 아래 표와 같다.
-시와 표문을 기록한 시문집,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개인의 생각을 정리한 개인문집, 그리고 외국와 외교문서를 집대성하고 있는 외교문집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다양하다.
- 『동인지문(東人之文)』(1388) : 槿花鄕(최해) -『동문선(東文選)』(1478): 槿花鄕(서거정 등) - 『지봉유설(芝峯類說)』(1614) : 槿花鄕(이수광) - 『의암집(毅菴集)』(1915) : 槿花世界(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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槿花鄕(근화향) 및 그 유사 표현들이 나타나는 문헌들
《참고(3)》구한말의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의암집((毅菴集)』은 저술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그 저술시기를 1915년으로 하되 위 문헌에 포함하였다. 유인석은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을 벌였으며 을미사변으로 일본이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거병하고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후일 서간도에 이주하면서까지 일본에 대한 무쟁항쟁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유인석조차 우리나라를 무궁화나라(槿花世界)로 불렀기에 종일 매국노라고 할 것인가?
▶19세기『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명칭에 槿花鄕(근화향)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 ~ 1856)이 1850년대 중반경 저술한『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槿花鄕(근화향)이 있음을 명확하게 기록하였다.
원문 : 我東 擯而遠之 則曰九夷曰六部 禮而近之 則曰君子國 禮義邦 小中華 統而言之 則曰朝鮮 三韓 海東 左海 大東 靑丘 鰈域 震檀 槿花鄕
번역 : 우리나라를 배척하여 멀리할 경우에는 구이(九夷)니 육부(六部)니 하고, 예우(禮遇)하여 가까이할 경우에는 군자국(君子國)이니 예의방(禮義邦)이니 소중화(小中華)니 하며, 통틀어 말할 경우에는 조선(朝鮮)ㆍ삼한(三韓)ㆍ해동(海東)ㆍ좌해(左海)ㆍ대동(大東)ㆍ청구(靑丘)ㆍ접역(鰈域)ㆍ진단(震檀)ㆍ근화향(槿花鄕)이라 한다. |
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1850년대 저술
《결론》 역사왜곡이 낳은 참담한 현실
▶최치원의「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의 槿花鄕(근화향)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897)는 최치원이 지었으나 왕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중국(唐)에 보낸 공식문서이다.
-여러 신하의 교차 확인이 이루어졌고 왕의 검토와 허락이 당연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무궁화를 한반도에 자생하는 고유종의 근거로 삼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한반도에 머물렀던 왕과 다른 신하들이 槿花(근화=무궁화)를 당시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무궁화가 한반도에 도입되어 정착되고 있었음을 추론케 한다.
▶조선 후기의 槿花鄕(근화향)은?
- 최치원에서 시작된 槿花鄕(근화향)과 그 유사한 표현은 조선 후기인 18세기와 19세기 이르러면 그 출현 빈도도 높아지고 내용도 보완되어 충실해지며, 역사서뿐만아니라 국가의 대외문서에서도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그 배경에는 종이 제조나 인쇄술의 발달이 낳은 기술적 성과물도 영향이 있을 것이지만,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라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으로 인해 온 나라가 참절되는 고통 속에서 이민족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만의 독자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 것도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 민족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9세기 최치원에서 출발한 무궁화라는 식물에 투영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槿花鄕(근화향)이라는 명칭이 활용되고 높은 빈도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역사의 왜곡 그리고 참담한 현실
-『두 얼굴의 무궁화』는 옛 문헌을 기록한 데이타베이스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내용(정확히는 쉽게 검색하여 확인된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무궁화에 대한 기록은 우리의 것에는 없고 일본의 것으로 왜곡해 버린다.
-그가 우리 문헌에 없다고 할 때 언급되는 우리의 옛 문헌에 대한 엄격한 잣대(正史?)를 결코 일본 문헌을 검토할 때에는 결코 유지하지 않는다.
-그의 책 어디에도 일본의『고사기(古事記, こじき)』(782)나『일본서기(日本書紀, にほんしょき)』(720)에 유사한 표현이나 내용이 존재하는지 대입하거나 확인하지 않으며, 그냥 일본 인터넷 어디에서 그 누군가 한 말이라도 사실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최해, 조선의 서거정, 이수광, 이규경, 안정복, 유인석 등 우리의 옛 문헌을 저술한 선조들은 모두 종일 매국노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 민족과 공동체를 배신하고 일제에 굴종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일컫어 친일 또는 종일이라고 할 것인가?
-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말로는 반일하며 애국한다지만, 일본 인터넷 사이트에서 '姜孝伯'(강효백)과 'ムクゲ'(무궁화)로 검색을 해보라. 우익적 성향의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소개된 기사들을 퍼나르며 비꼬고 조롱하며 혐한(嫌韓)의 소재로 널리 이용하고 있는 현실이 보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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