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이슈 화제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28) 대한제국의 역사를 왜곡하다 - 조현래

林 山 2020. 10. 11. 21:52

때아닌 무궁화(無窮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徽章)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강효백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조현래(필명)는 강효백의 주장에 대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강효백만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56년 당시 일간지에 화훼연구가 조동화와 식물학자 이민재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도 사회 일각에서 애국가와 국화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애국가는 작곡자가 친일파이고, 가사도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국화도 무궁화가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조현래-강효백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林 山>

 

<사진1> 무궁화(경기도 안산)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28) 대한제국의 역사를 왜곡하다

 

 

[두 얼굴의 무궁화] 일제와 윤치호 등 종일매국노들의 책동과 위협에 의해 문무관의 복식(服飾)에 처음으로 무궁화가 수식(繡飾)된 것은 1900년 칙령 제14호가 반포된 이후이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1906(광무 10년) 무궁화꽃 대부분을 오얏꽃으로 환원했다. 오얏꽃의 죄는 대한제국의 황실화라는 죄였다. 일제와 종일매국노의 하이에나 떼들에 맞서 끝까지 싸운 지독하게 고독하였던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황실화였기 때문이다.(p.65) 

 

 

《fact check(1) :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14호가 반포된 것이 윤치호 등의 친일파의 책동과 위협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14호 및 제15호로 문관대례복의 복식문양에 무궁화가 채택된 것은 윤치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윤치호(昊, 1865~1945)는 구한말 개화파로 1898년 독립협회 회장과 1903년 천안 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0년대 이후 친일활동으로 인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윤치호가 가담한 독립협회(1896~1898)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러시아 공사에 피난 간 고종의 환궁를 통해 대한제국 수립에 영향을 미쳤고, 그 이후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반대등 국권회복 운동을 벌였으며,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의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등 대한제국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가 1900년 당시 문관대례복의 복식문양 채택을 일제와 윤치호의 활동으로 보고 있는 것은 윤치호가 가담하여 활동한 독립협회의 활동도 친일행위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 역시 역사 왜곡이다.

​-백배 양보하여 『두 얼굴의 무궁화』의 독립협회에 대한 이해가 맞다고 가정하더라도, 무궁화의 문양 채택이 일제와 윤치호의 책동과 위협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주장은 완전히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1900년 칙령 제14호와 제15호가 반포될 당시 대한제국은 1899년 이래 친러파 내각에 장악된 시기여서 윤치호 및 독립협회의 활동과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 대한제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요

 

  -1894~1895 : 청일전쟁(일본의 승리)

  -1895 :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1896 : 아관파천(고종황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

  -1896 : 독립협회 창립(이상재, 남궁억, 이승만, 서재필 등 활동 및 이후 윤치호 가담)

  -1897 : 고종황제 환궁 및 대한제국 성립(독립협회 중심의 개혁파와 일부 수구파 연합)

  -1897 : 절영도 러시아 조차 문제 발생(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

  -1898년 3~11월 만민공동회 개최

  -1898년 12월 : 고종황제의 만민공동회 해산 명령

  -1899 8 : 수구파 내각에 의한 전제군주제에 따른 대한국국제 발표

  -1900년 4월 : 칙령 제14호 및 제15호에 의한 문관대례복 무궁화 문양 삽입

  -1904~1905 : 러일전쟁 발발(일본의 승리)

  -1904 : 일본이 주도하여 강제적인 한일의정서 체결

  -1905 : 일본이 주도하여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 박탈

  -1906년 2월 : 문관 복장을 오얏꽃으로 변경

  -1907년 7월 : 고종황제 강제 퇴위

  -1910 : 경술국치로 강제병합

 

▶독립협회가 추진하여 건립한 독립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 독립협회가 주관이 되어 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이 이루어지고,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에 완공한 독립문 이맛돌에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1900 4 17일에 반포된 칙령 제14호와 제15호에서 문관대례복에 무궁화 문양이 삽입된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의 결과라기보다는 槿花鄕(근화향)  槿域(근역)으로 인식되어 온 역사 즉, 무궁화를 국토의 상징으로 이해했던 역사가 반영된 것이었다.

<사진2> 독립문의 이맛돌 모습

《fact check(2): 무궁화가 국가문양으로 사용된 것이 대한제국 칙령 제14호가 최초라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무궁화가 국가의 문양으로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00년에 반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14호와 제15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 말기인 1892년에 이미 은으로 만든 5냥 주화의 문양에 무궁화를  채택한 바 있었다.

-은화의 뒷면 중앙을 오얏꽃으로 배치하고, 왼쪽을 무궁화 가지와 오른쪽을 오얏꽃 가지로 하여 문양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1900년에 최초로 국가의 문양으로 무궁화를 도입하였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여파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1885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 미국 등에 유학하고 1895년에 귀국하였으므로 1892년에는 국내에 있지도 않아 은화 주조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사진3> 1892년 주조된  5냥 은화 뒷면 좌측에 무궁화 가지가 새겨진 모습

무궁화가 국가의 문양으로 사용된 이유는?

-은화에서 오얏꽃과 더불어 무궁화 문양을 함께 사용한 것은, ​표면적으로 국화와 오동나무의 문양을 함께 사용하는 일본에 대응하고, 실질적으로 槿花鄕(근화향)  槿域(근역)으로 인식되어 온 역사가 반영된 것이었다[이러한 취지로 목수현, 한국 근대 전환기 국가 시각 상징물, 2008. 2(서울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논문), 196면 참조].

-1900 4 17일에 반포된 칙령 제14호와 제15호에서 문관대례복에 무궁화 문양을 삽입한 것은 이러한 역사를 거쳐 이루어졌던 것이다.

《fact check(3)》 : 1906년 오얏꽃에 대한 복귀가 고종의 의지였다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을 통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완전한 박탈하였다.

-1906년은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국권을 사실상 박탈한 상황이었으므로 고종의 개인적 노력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 있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무궁화는 문관복장의 문양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1906. 2. 27에 복장에 관한 칙령을 개정하여 문관대례복의 문양이 전면적으로 오얏꽃으로 바꼈다가 1906. 12. 12. 개정으로 상의 후면 등에 무궁화 문양은 다시 사용되었다[이에 대해서는 목수현, 한국 근대 전환기 국가 시각 상징물, 2008. 2(서울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논문), 135면 참조].

-무궁화 문양의 계속된 사용은 일제가 국권을 장악했지만 무궁화에 대한 당시 조선인의 애착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fact check(4)》 : 오얏꽃이 대한제국의 황실화에 불과했다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얏꽃은 대한제국의 황실화이기도 했지만 국가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오얏꽃 문양은 1885년 을유주석시주화, 1892년 5냥 은화,  1899년 훈장조례 및 독립문의 이맛돌의 문양과 같이 국가 전반에 사용되던 국가문양(國文)이었다.

-1910. 8. 29.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강제로 일본에 병합된 이후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었지만 오얏꽃은 왕실의 꽃으로 계속 사용되었고 살아 남았다.

-나라가 망함에 따라 국가를 상징하는 국가문양에서 이왕가의 문장이 되었고, 이왕가는 그러한 존속을 스스로 택하였다.

 

▶대한제국이 강제병합됨에 따라 무궁화는 국토의 상징에서 나라꽃으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1910. 8. 29. 경술국치로 제국주의 일본에 국권을 상실했다.​ 

-​이러한 현실은 독립운동가와 민중으로 하여금 태극기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또한 이러한 현실은 독립운동가와 민중으로 하여금 무궁화를 근역(槿域)과 근화향(槿花鄕) 등 국토를 상징하던 의미에서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묵수현, 망국과 국가 표상의 의미변화 : 태극기, 오얏꽃, 무궁화를 중심으로, 한국문화 53(2011) 참조].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일제강점기 동안 무궁화를 민족과 국권회복의 상징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결론》 : 의도적 왜곡과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무지가 낳은 참사

 

▶역사에 대한 의도적 왜곡!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는 무궁화가1900년 문관대례복의 복식문양으로 채택된 과정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역사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궁화의 국가문양의 채택 과정에 대해 일제와 윤치호 운운하는 것은 무궁화를 일제의 꽃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무지가 낳은 참사!

 

-무궁화라는 꽃이 우리의 역사에서 관계 맺어온 구체적 역사를 식물학과 그 역사에 정통하지 못한 일반인으로서는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한말의 역사에서 1900년과 1906년이 갖는 상황의 변화와 의미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알지 못할 수가 없으며, 1900년에 일제와 친일파(?)가 행위가 1906년에 개선(?)된다는 것을 정상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적당한 무지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자 하는 편견은 이러한 의도적 역사 왜곡에 가담하게 한다. 

-『두 얼굴의 무궁화』을 추천하는 자의 무지과 인식이 그러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