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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27) 리큐를 날조하다 - 조현래

林 山 2020. 10. 3. 19:59

무궁화는 한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조현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서 이 주장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박정희 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조현래는 주장한다.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林 山>

 

두 얼굴의 무궁화』가 말하기를

[인용1]

리큐가 할복하기 전날 밤이다.

여자가 손을 내밀기에 붓과 화지를 건넸다. 무궁화 꽃을 바라 본 다음, 붓을 놀렸다. 꽃은 물을 흡수해 생기를 조금 되찾았다.

"무궁화는 하루뿐이나 스스로 영화를 이룬다(槿花一日自爲榮)"

"백거이로구나."

리큐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도 아는 시였다. 언젠가 마당에 무궁화가 피었다. 그는 붓과 종이를 받아 여자가 쓴 옆에 한줄 덧붙였다.

"어찌 세상에 연연하고 죽음을 근심하랴"(何須戀世常憂死)

이는 야마모도 겐이치(山本兼一)의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利休にたずねよ), 2008」의 마지막 부분이다.

[인용1] 『두 얼굴의 무궁화』, p.129

[인용2]

일본 다도茶道를 완성하고 원칙을 세운 센리큐(千利休, 1520~1591), 센소우탄(千宗旦, 1578~1658) 부자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무궁화다. 센리큐는 무궁화에서도 특히 흰 꽃잎 바탕에 붉은 꽃심의 무궁화를 사랑했다.……(중략)……센리큐는 무릎이 닿을 정도로 협소한 다실에서 무궁화 한 가지를 마주한 채 차를 나누기를 즐겨했다.*미주84)

*미주84) https://densukedesunen.blog.fc2.com/blog-entry-202.html

[인용2] 『두 얼굴의 무궁화』, p.129~p.130

[인용3]

그런데 무로마치 시대의 무궁화 마니아 고호조지 관백을 능가하는 아츠치 모모야마(安士桃山, 1568~1600) 시대의 무궁화 마니아는 바로 1585년 관백에 오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이다.

[인용3] 『두 얼굴의 무궁화』, p.130

[인용4]

히데요시는 언젠가 센리큐의 저택에 아름다운 무궁화가 많이 있다고 해서 아침 일찍 일부러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원에 무궁화는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다실에 들어가니 장식단에 단 한 송이 무궁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 한 송이를 인상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정원에 핀 꽃을 리큐가 전부 꺾어버린 것이었다.

[인용4] 『두 얼굴의 무궁화』, p.130

[인용5]

일본인은 무궁화가 한 번에 만개하지 않고 순차적으로 피고 지는 걸 반복하는 걸 한결 같이 피어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무궁화를 정절과 절개의 상징이며 사무라이 정신과 일본의 얼로 받들고 있다.*미주85)

*미주85) https://rekishizuki.com/archives/345

[인용5] 『두 얼굴의 무궁화』, p.130

『利休にたずねよ』(리큐에게 물어라)는?

센리큐?

 

千利休像( 長谷川等伯画、春屋宗園賛)

센리큐(千利休, 1522~1591)는 일본 전국시대 말기의 상인이자 다인(茶人)으로 호사스러운 차문화를 배격하고 간소하고 조용함을 추구하는 와비차(草庵の茶)의 완성자로 알려져 있으며 다성(茶聖)으로 불리운다. 당시 지배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 ~ 1598)의 측근이었고 여러 다이묘(大名)에도 영향력을 가졌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에 불화가 생겨 결국 할복으로 내몰렸다. 할복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리큐에게 물어라

 

『利休にたずねよ』의 文春文庫(2018)판 표지

『利休にたずねよ』(리큐에게 물어라)는 일본의 소설가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 1956~2014)가 저술한 다인 센리큐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2008년에 초판이 출판되었으며 야마모토 겐이치는『利休にたずねよ』를 저술한 공로로 일본에서 저명한 제140회 나오키상(直木賞)을 수상하였고, 동 소설은 2013년에 영화화되었다.

줄거리

 

영화  『利休にたずねよ』무궁화를 사랑한 납치된 조선의 여인(Clara Lee)

利休にたずねよ』(리큐에게 물어라)는 역사소설(歷史小說)의 일종으로 기본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되 공백인 사실에 대해서는 허구로 채운 픽션(fiction)이다. 소설은 센리큐와 당대에 교류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그가 추구했던 간소한 자연미의 다도(茶道)와 욕망에 일그러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의 충돌을 묘사하면서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다룬다.

소설의 주된 모티프(motif)는 센리큐가 추구한 다도(茶道),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그러진 욕망, 그리고 센리큐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다. 소설은 센리큐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동인(動因)을 당파 싸움의 과정에서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게 된 왕가 출신의 무궁화를 좋아한 조선의 여인과 19세의 나이에 나눈 사랑에서 찾는다.

소설은 첫 장은 그의 나이가 70세가 된 1591년 2월 28일 아침에 교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城) 주라쿠테이에서 일어난 센리큐가 할복하는 장면이다.

蒔田が, 床の間を見た.

軸も花もなく, 白木の薄板に, 綠釉の香合が置いてある.

その前に, すつと伸びた枝が一本. 供えるように橫たえてある.

木槿(もくげ)の枝である. 今年は閏(うるう)一月があったので, 二月だが, もう若葉が芽吹いている.

あの女は, その花を見て, 無窮花(ムグンフア)だと敎えた.

「なぜ, 花のない枝を……」

「木槿は高麗で, たいそう好まれるとか. 花は冥士にてき咲ましょう」

蒔田は首をかしげたが, それ以上たずねなかった.

「その香合は, 唐のものでござろうか」

「高麗にてそうろう」

○ 번역

(할복을 집행하러 온 도요토미의 가신)마이타가 장식단을 보았다.

족자도 없고 꽃도 없이 얇은 원목 널판에 녹유 향합이 놓여 있었다.

그 앞에 곧게 뻗은 나무가지가 하나, 바쳐진 양 누워 있었다.

무궁화 가지였다. 올해는 윤1월이 있었으므로 2월인데도 벌써 싹이 움텄다.

여자는 그 꽃을 보고 조선말로 '무궁화'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어찌 꽃 없는 가지를……"

"조선에서 무궁화를 대단히 좋아한답니다. 꽃은 저승에서 피겠지요."

마이타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 향합은 중국에서 온 것입니까?"

"조선입니다."

山本兼一, 『利休にたずねよ』, 文春文庫(2018), p.25 중에서

무궁화를 사랑한 조선의 여인, 그리고 조선의 향합이 소설의 앞부분에 소재로 제시되고, 시간을 차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이 거꾸로 된 소설은 중간 중간에 무궁화, 향합 그리고 조선의 여인을 언듯언듯 비추어 간다. 그리고 드디어 19세의 리큐까지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고, 노예로 팔려온 비운의 조선 여인과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조선의 여인과 그 여인이 사랑한 무궁화와 향합에 이르러 소설은 클라이막스(climax)를 이룬다.

 

왜곡과 조작으로 은폐한 진실들

[인용1]의 Fact는?

조선의 여인이 사랑한 무궁화

영화 '利休にたずねよ'의 한 장면, 도망치는 리큐와 조선 여인, 주연 여배우는 한국계 영국인 Clara Lee

"리큐가 할복하기 전날 밤이다." 그리고 "리큐에게 물어라(利休にたずねよ), 2008」의 마지막 부분이다."가 날조의 키워드(key word)이다. 『두 얼굴의 무궁화』에 기술된 [인용1]의 문구는 리큐가 할복하기 전 날의 대화가 아니다. "리큐에게 물어라(利休にたずねよ), 2008」의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도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센리큐가 할복한 이후의 장면을 위한 마지막 장이 하나 더 있다.

『두 얼굴의 무궁화』에 기술된 [인용1]의 문구는, 19세의 리큐가 노예상에게 팔리게 된 조선 여인을 사모하여 조선어와 조선음식을 배우고 여자에게 "俱渡高麗"(함께 조선으로 건너갈 것이다)의 의사를 전달하고 함께 도망을 치다 실패하여 소금 창고지기의 오두막에서 무궁화를 매개로 하여 나누는 대화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쫓기다 막바지에 이르러 서로 죽음을 앞두고 리큐는 조선의 여인에게 회지(懷紙)에 글을 써서 필담으로 "難易歸國 汝欲生乎 欲死乎"(고국으로 돌아가기는 어렵겠다. 살기를 바라는가? 죽기를 바라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조선의 여인은 다시 대답한다. "槿花一日"(무궁화는 하루뿐).

"무궁화는 하루뿐이나 스스로 영화를 이룬다(槿花一日自爲榮)"라는 말은 일본인 리큐의 것이 아니다. 야마모도 겐이치가 소설에서 언급한 저 말은 죽음을 앞둔 조선 여인의 마음을 중국 시인 백거이의 시를 빌어 표현한 것이다.

야마모도 겐이치(山本兼一)의 『利休にたずねよ』는 국내에도 번역되었다. 권영주 옮김, 야마모도 겐이치 장편소설, 『리큐에게 물어라』, 문학동네(2010), p.456에 기술된 내용이다. 일본어 원문으로 山本兼一,『利休にたずねよ』, 文春文庫(2018), p.438에 나오는 대화이다. 일본어로 된 책이니 찾아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인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뻔한 내용을 왜곡과 조작으로 뒤범벅을 만들어 놓았다.

[인용2]의 fact는?

[센리큐가 무궁화를 좋아했다고?]

먼저 千宗旦(1578~1658)은 센리큐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이다.

『利休にたずねよ』(2008)에서 무궁화는 여러번 등장하지만 모두 조선 여인과의 만남을 향해 가는 소재로 설정된 것이다. 소설 전체에서 단 한번도 센리큐 다실(茶室)의 꽂꽂이(茶花)로 장식되지는 않았다.

흔히 일본에서 센리큐가 좋아한 다화(茶花)로 알려진 속칭 '利休七選花'(리큐칠선화)는 (i) 함박꽃나무( オオヤマレンゲ, 大山蓮華), (ii) 분단나무(オオカメノキ=ムシカリ, 大亀の木), (iii) 쪽동백나무(ハクウンボク, 白雲木), (iv) 일본노각나무(ナツツバキ, 夏椿), (v) 흰동백나무(シロワビスケ, 白侘助), (vi) 산딸나무(ヤマボウシ,山法師), (vii) 쌍화목(ベニマンサク, 丸葉の木)이다. 여기 어디에도 무궁화는 없다.

『두 얼굴의 무궁화 』, p.130은 센리큐가 "무릎이 닿을 정도로 협소한 다실에서 무궁화 한 가지를 마주한 채 차를 나누기를 즐겨했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 『두 얼굴의 무궁화 』, p.398에서 *미주84)를 들고 있다. 그곳에 소개된 인터넷 주소를 따라 들어가 보았더니, 『利休にたずねよ』(2008)라는 책을 보고 작곡한 '槿の花: 千利休の愛した女'(무궁화 꽃: 센리큐가 사랑한 여인)이라는 연주곡을 링크해 놓은 것이 전부이다. 결국 근거는 없고 『두 얼굴의 무궁화』저자가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다.

 

[*미주 84)] : https://densukedesunen.blog.fc2.com/blog-entry-202.html

[인용3]의 fact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궁화 매니아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라현 요시노(吉野)에서 개최한 1594년 벚꽃놀이를 그린 병풍 '豊公吉野花見図屏風', 일본 '細見美術館' 소장

『利休にたずねよ』(2008)의 어디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궁화 매니아는 커녕 무궁화를 좋아했다는 흔적도 없다. 일본의 포털사이트에서 '豊臣秀吉の花(はな)'(풍신수길의 꽃)를 검색해도, 『두 얼굴의 무궁화』저자의 상용 표현처럼, 무궁화는 단 한 그루도 보이지 않으며 온통 벚꽃나무 천지이다.

잘 알려진 바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은 '오동나무'로 현재 일본의 행정부 다수가 문양으로 삼고 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이후 1594년에 나라현 요시노(吉野) 지역에서 벚꽃을 식재하고 대대적인 벚꽃놀이를 개최하였으며(이러한 연유로 일본왕벚나무의 일본명은 쇼메이'요시노'자쿠라이다), 1598년에는 쿄토의 다이고사(醍醐寺)의 제당을 재건하면서 다이고노하노미(醍醐の花見)라고 불리우는 대규모 벚꽃놀이를 개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설한 오오사카성(大阪城)은 지금도 벚꽃이 성을 감싸고 있으며 매년 3월이면 다이고노하노미(醍醐の花見)를 재현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궁화 매니아가 되었을까? 사실이 아니라 무궁화가 일본꽃이어야만 하는『두 얼굴의 무궁화』저자의 상상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있을까?

[인용4]의 fact는?

센리큐 정원의 무궁화?

いつだったか, 利休屋敷に舶載(はくさい)の朝顔がたくさん咲いているというので, 早朝, 秀吉がわざわざ出かけたことがあった. ところが, 庭には見あたらない. 小座敷に入ると, 朝顔がただ一輪, 床(とこ)に飾ってあった. その一輪を印象的に見せるため, 庭に咲いた花は, 利休がぜんぶ摘み取ってしまったのだ.

○ 번역

언젠가 리큐의 저택에 외국에서 들여온 나팔꽃이 많이 피었다고 해서 히데요시는 아침 일찍 일부러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원에 나팔꽃은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다실에 들어가니 장식단에 단 한 송이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 한 송이를 인상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정원에 핀 꽃을 리큐가 전부 꺾어버린 것이었다.

山本兼一, 『利休にたずねよ』, 文春文庫(2018), p.217 중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리큐의 정원에 보러갔다는 꽃은 '朝顔'(アサガオ)으로 '나팔꽃'을 일컫는 것이다. 일본의 옛말 'あさがほ'(아사가호)가 '무궁화'를 뜻한다는 옛 견해(현재는 '도라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가 있기는 하지만, 나팔꽃은 16세기 말에 이미 당시 중국에서 전래되어 원예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利休にたずねよ』(2008)에서는 무궁화에 대해 '木槿'(もくげ)라는 별도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히데요시와 일화에 등장하는 '朝顔'(조안)은 무궁화가 아닌 ' 나팔꽃'이다.

利休にたずねよ』(2008)에서 16세기 말에 '외국에서 들여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게 무궁화라면 무궁화의 일본 전래시기가 16세기가 되는 황당한 결과가 된다. 이 말 저 말 마음대로 왜곡하고 조작하다 보니 앞뒤가 제대로 맞지 않게 된 것이다.

[인용5]의 fact는?

무궁화가 사무라이 정신과 일본의 얼?

야마모토 겐이치의 소설 利休にたずねよ』(2008)에 따르자면, 무궁화는 19세의 센리큐가 사랑한 조선의 여인을 나타내는 꽃이고 조선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그 책의 첫장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조선말로 '無窮花'(무궁화)이고, 꽃은 아침에 피어 저녁에 지지만 순차적으로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한결같고 끊임없이 피어 나는 꽃이라는 뜻이며, 그래서 정절과 절개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웬 사무라이 정신과 일본의 얼이란 말인가?

『두 얼굴의 무궁화』는 p. 398에서 *미주85)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제시된 인터넷 사이트의 링크를 따라 가면, '歴史好きのつぶやき'(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의 중얼거림)이라는 제목하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리큐를 할복하게 할 이유를 추정한 글을 소개하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무궁화가 사무라이 정신과 일본의 얼이라는 언급은 없다. 이 역시 결국 근거는 없고『두 얼굴의 무궁화』저자가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미주 85)] :https://rekishizuki.com/archives/345

결론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가 소설 『利休にたずねよ』(2008)에서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無窮花'(무궁화)는 센리큐가 사랑했던 여인를 상징하고 조선의 꽃인 무궁화였다. 그리고 순간 피어서 지지만 끊임없이 스스로 영화를 이루는 꽃이었다. 그런데 무궁화를 앞뒤에 없는 말을 붙이고 근거도 없이 상상만으로 주장을 하고 인용출처를 왜곡해서 어느 순간에 사무라이의 정신과 일본의 얼을 상징하는 꽃으로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재주가 기묘하다. 노벨 조작상(the Nobel Manipulation Prize)이 만들어진다면 누가 수상할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말 못하는 식물에 근거 없는 이데올로기를 덧씌워 조작하고자 하는 그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