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나주임씨(羅州林氏) 분파표(分派表)

林 山 2021. 4. 16. 23:00

1. 임비(林庇, 高麗大將軍, 주1) - 영발(永拔, 直長同正) - 양간(良幹, 精勇將軍 贈奉翊大夫吏部尙書) - 박(朴, 奉翊大夫 行護軍) - 영문(永文, 保勝中郞將) - 돈세(敦世, 保勝別將) - 수(秀, 別將 贈奉翊大夫版圖判書) - 선(宣, 奉翊大夫 行護軍) - 탁(卓, 奉順大夫, 주2) - 봉(鳳)

 

1). 봉(鳳) - 시소(始巢, 保勝散員, 鄭圃隱 문하), 유소(有巢, 都正公)

2). 시소(始巢, 保勝散員) - 석주(碩柱, 贈軍器寺正, 將仕郞) - 귀연(貴椽) - 평(枰, 주3) - 붕(鵬, 주4) - 익(益, 長水公) : 장수공파(長水公派)

3). 유소(有巢, 都正公) - 상재(尙梓), 상기(尙杞), 상지(尙智) : 도정공파(都正公派)

4). 석주(碩柱, 贈軍器寺正, 將仕郞) - 귀량(貴樑, 進士) - 부(阜)

5). 평(枰) - 학(鶴) - 시언(時彦) : 경북(慶北) 칠곡(漆谷)

6). 붕(鵬) - 복(復, 正字公, 주5) - 서(㥠) - 연(堜), 담(墰) : 정자공파(正字公派)

7). 붕(鵬) - 진(晋, 節度公, 주6) - 제(悌, 주7), 선(愃), 순(恂), 환(懽), 탁(㤞) : 절도공파(節度公派)

8). 붕(鵬) - 몽(蒙)

 

주1). 임비(林庇)의 본관은 나주(羅州)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본래 임비에게 회진(會津)을 본관으로 내렸으나 회진이 나주에 속했으므로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이런 연유로 나주임씨(羅州林氏)는 임비를 시조로 하지 않고 원조로 삼고 있다.

 

원종(元宗) 때 장군으로서 세자 왕심(王諶, 훗날의 충렬왕)이 몽고에 입조할 때 호위하였다. 1269년(원종 10) 고려로 귀국할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새 국왕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세자를 모시고 몽고의 연경(燕京, 현 北京 일대)에 머물렀다. 당시 세자를 호종하였던 공로를 인정받아 1282년(충렬왕 8)에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영통사(靈通寺)의 중 홍탄(洪坦)이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장군 임비가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한 유경(柳璥), 상장군(上將軍) 한희유(韓希愈), 장군 양공적(梁公勣) 등과 함께 음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순마소(巡馬所)에서 국문을 받았다. 이후 홍탄의 무고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명을 받아 남경사록(南京司錄) 이익방(李益邦)과 남경부사(南京副使) 최자수(崔資壽)를 붙잡아 문초하였다. 당시 조인규(趙仁規)가 휘하의 군졸 개삼(介三)을 시켜 남경의 백성 8명을 유인하여 달호(獺戶)로 삼았는데, 이후 세금 납부를 피하려는 백성들이 달호가 되어 제국대장공주의 궁에 수달가죽을 바쳤고, 조인규는 그의 반을 차지하였다. 남경사록 이익방이 이를 문제 삼아 개삼을 가두자 조인규가 공주에게 호소하였고, 임비가 국문을 담당하였다. 임비는 모든 사실을 파악하여 공주에게 보고하고, 달호가 되었던 백성들을 원래대로 돌아가게 하였다. 1289년(충렬왕 15) 충청도지휘사(忠淸道指揮使)가 되어 원나라 개주(盖州)로 정해진 군량을 기한 내에 수송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철직되었다.

 

주2). 임탁(林卓)은 고려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두문동이란 지명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칠십이현이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데서 유래되었다.  그 이름이 후세에 절의(節義)의 표상으로 숭앙되었다. 조선 정조는 1783년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拜享)하게 하였다. ‘두문동 72현’이란 고려가 망할 때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조선의 쿠데타 세력을 반대한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킨 충신열사(忠臣烈士)를 지칭하는 말이다. 

 

두문동 72현은 고천상(高天祥, 杜門洞에 숨어 살았음), 고천우(高天祐, 頭流山), 구홍(具鴻, 綾城人, 頭流山 排祿洞), 길인적(吉仁迪, 海平人, 杜門洞), 길재(吉再, 善山), 김약시(金若時, 光山人, 金光里), 김위(金瑋, 頭流山), 김육비(金六庇, 古石山), 김자수(金自粹, 秋嶺), 김주(金澍, 中國), 김준(金俊, 頭流山 排祿洞), 김충한(金冲漢, 頭流山), 남을진(南乙珍, 宜寧人, 沙川->紺岳山), 맹호성(孟好性, 杜門洞), 민보(閔普, 杜門洞), 민안부(閔安富, 頭流山), 박녕(朴寧), 박문수(朴門壽, 頭流山 排祿洞), 박심(朴諶), 박의중(朴宜中, 密陽人, 조선조 檢校參贊議政府事), 박침(朴忱, 頭流山 排祿洞), 박태시(朴太始, 고향으로 돌아감), 반모(潘某, 失名, 고향으로 돌아감), 배상지(裴尙志, 頭流山 排祿洞), 변귀수(邊貴壽, 頭流山 排祿洞), 변숙(邊肅), 서보(徐輔, 積岩), 서견(徐甄, 利川人, 衿川), 서중보(徐仲輔, 頭流山), 성사제(成思齊, 杜門洞), 신덕린(申德隣, 頭流山), 신석(申釋, 杜門洞), 신안(申晏, 黃衣山), 신이(申彛, 杜門洞), 신자악(申自嶽, 신석의 동생, 寧海), 신포시(申包翅, 頭流山), 안종약(安從約, 頭流山 排祿洞), 우현보(禹玄寶, 丹陽人), 원천석(元天錫, 雉岳山), 유순(柳洵, 五鳳山), 윤육(尹陸, 頭流山 排祿洞), 이경(李瓊, 杜門洞), 이륜(李淪, 桃灘), 이맹예(李孟藝, 鰲川), 이사경(李思敬, 肅薪里), 이색(李穡, 韓山人, 이성계 일파에게 몰려 유배 생활을 하다가 죽음), 이석지(李釋之, 永川人, 龍仁), 이수생(李遂生, 栗里), 이수인(李守仁, 遠地 流配), 이숭인(李崇仁, 星州人, 정몽주가 살해된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심복에게 유배지에서 암살당함), 이양소(李陽昭, 順天人, 墓庭으로 돌아감), 이양중(李養中, 廣州人, 태종이 불렀으나 끝내 절의를 지킴), 이유(李裕, 鰲川), 이유인(李唯仁, 頭流山 排祿洞), 이행(李行, 驪興人, 醴川洞에 숨어 살다가 太宗에게 발탁되어 刑曹判書를 지냄), 임선미(林先味, 平澤人), 임척(林隲, 杜門洞), 임탁(林卓, 錦城人=羅州人, 錦城=羅州 회진에 숨어 살았음), 전귀생(田貴生, 杜門洞), 전오륜(全五倫, 瑞雲山), 전조생(田祖生, 頭流山 排祿洞), 정희(鄭熙, 遠地로 流配), 조견(趙狷, 松山), 조승숙(趙承肅, 德谷), 조안경(趙安卿), 조의생(曹義生, 昌寧人), 조홍(趙洪, 栗原山), 차원조(車元覜, 杜門洞), 채귀하(蔡貴河, 多義峴), 최문한(崔文漢, 江陵人, 忠肅王駙馬, 江陵), 최양(崔瀁, 鄭圃隱 甥姪, 中臺山), 허금(許錦, 杜門洞)이다.

 

임탁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굳게 지키고 동지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드디어 아들 임봉, 임시소(林始巢) 3대가 1392년 회진으로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어 본관을 회진으로 하였다.  그후 회진이 지금의 나주에 속하게 됨으로 문중의 결의를 거쳐 본관을 을 나주로 개칭하여 1800년에 편찬한 경신보 족보부터 본관을 나주로 사용하였다. 

 

본관지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에 자리한 대종가는 조선 개국의 해인 1392년에 임탁이 지금의 대종가 터를 잡았다. 이 가옥은 신걸산을 등에 지고 영산강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인 누저동에 자리잡고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갈마음수(목마른 말이 물을 마심)의 형국으로 난훈계복(가문이 번영하고 자손이 훌륭함)의 명당으로서 현재의 종손에 이르기까지 23대 610여년을 양자 한번 없이 종자 종손으로만 이어 내려오면서 수많은 인재와 자손을 퍼트린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기도 파주에 세워진 고려 통일대전 충신각에는 고려 10열(烈)이자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사람인 임탁(林卓)과 그의 아들 임봉(林鳳)이 함께 배향(拜享)되었다.

 

주3). 임평(林枰)은 1462년(세조 8) 회진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가묘(家廟)를 세워 추원지례(追遠之禮)를 극진히 하던 중, 무과(武科)에 올라 1502(연산군 8) 41세에 검모진만호(黔毛鎭萬戶)에 이어 1505년 전라도 병마후우(兵馬虞侯, 종3품)를 거쳐 1508년(중종 3) 47세에 귀향하여 1522년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병조참판(贈兵曹參判)이 증직되었다. 

 

주4). 임붕(林鵬, 1486년 7월 17일~1553년 6월 4일)의 자(字)는 충거(冲擧), 호(號)는 귀래정(歸來亭)이다. 성균관의 반궁(泮宮)에 거할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관학재생(館學諸生)이 임붕을 추대하여 소두(疏頭)가 되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구명 운동을 하였다. 소두란 연명으로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을 말한다.

 

1521년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옥당(翰林玉堂), 좌승지(左承旨), 오조참의(五曹參義), 동지사(冬至使), 전라충청병사(全羅忠淸兵使), 경주부윤(慶州府尹),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사후 예조참판(贈 禮曹參判)이 증직되었다.

 

주5). 임복(林復)은 고려말 봉순대부, 해남감무 등을 지내고, 두문동에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 임탁(林卓)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승지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이다.

 

1540년(중종 35) 사마시를 거쳐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551년 순회세자(順懷世子)의 탄생으로 특사령이 내려져 고향에 돌아갔다가 선조 초기에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 송당(松堂)을 짓고 은거하였다. 

 

주6). 임진(林晋, 1526~1587)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무신이다. 승지 붕의 셋째 아들,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아버지다. 명종(明宗) 1년(1546)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 부안현감, 흥덕군수, 정평부사, 회령부사, 장흥부사, 영변대도호부사, 제주목사를 역임(歷任)하였다. 선조 1년(1568) 전라도우수사 때 흑산도에 나타난 수적을 토벌(討伐)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전라좌수사, 충청병사, 경상좌병사, 함경도북병사, 평안병사를 거쳐 전라병사 재임 중 강진 병영에서 62세로 죽었다. 청렴결백하여 거처인 관사에는 장례 모실 양식조차 없을 정도였다. 선조가 청백리의 표상으로 도연명의 '도정절집(陶靖節集)' 두 권을 하사하였다.

 

주7). 임제(林悌, 1549~1587)의 자는 자순(子順)이다.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癡), 벽산(碧山), 겸재(謙齋)다. 아버지는 절도사를 지낸 임진(林晉)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1570년(선조 3) 22세 되던 겨울날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젊어서는 얽매임을 싫어하여 기녀와 술자리를 즐기며 살았다. 1571년(선조 4)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때에 잠시 동안 술을 끊고 글공부에 뜻을 두었다.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계속 학업에 정진했으며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과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 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 관서 도사(關西都事),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검(劍)과 피리를 좋아했고 술 마시고 방랑하며 여인과 친구를 사귄 짧은 삶이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을 시작했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서북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던 일과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다.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