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임씨(林氏) 후기(後期) 분적표(分籍表)

林 山 2021. 4. 7. 22:09

1. 양양관(襄陽貫), 경주관(慶州貫), 밀양관(密陽貫), 안의관(安義貫)

 

1). 춘(春, 西河公, 醴泉林氏中始祖) - 충세(忠世), 경세(敬世), 정세(整世)

 

2). 충세(忠世) - 익(益) - 천봉(天鳳), 우천(祐天), 원길(元吉). 천봉(天鳳) - 소(沼), 연(演), 즐(騭). 소(沼) - 윤덕(允德) - 수(秀) - 승조(承祖) - 곤(崐) - 계정(繼貞, 주1) : 경주관(慶州貫). 즐(騭) - 계중(繼仲) - 자번(自蕃, 주2) : 양양관(襄陽貫)

 

3). 경세(敬世) - 숙(淑) - 난수(蘭秀) - 흥(興) - 맹인(孟仁) - 수철(水鐵) - 곤(鵾) - 승종(承宗), 계종(繼宗) : 밀양관(密陽貫), 대량(大梁, 주3) : 안의관(安義貫)

 

2. 안동관(安東貫), 임하관(臨河貫), 임피관(臨陂貫), 전주관(全州貫), 옥야관(沃野貫), 임천관(林川貫), 보성관(寶城貫)

 

1). 세미(世味, 兆陽君, 兆陽林氏中始祖) - 정(目+貞), 식(湜), 총(葱). 식(湜) - 인무(仁茂), 인성(仁成), 현무(賢茂), 인개(仁槩). 인무(仁茂) - 천봉(天鳳), 난봉(鸞鳳), 실(氵+實). 

 

2). 인무(仁茂) - 천봉(天鳳) - 택(澤), 근(勤). 택(澤) - 성거(成巨) - 표(表, 주4) : 군사공파(郡事公派)근(勤) - 성(惺) - 사순(士栒, 주5) : 임천관(林川貫)

 

3). 인무(仁茂) - 난봉(鸞鳳) - 할(劼) - 각(恪, 주6) : 임피관(臨陂貫) - 사수(士壽) : 주부공파(主簿公派), 사부(士富) : 생원공파(生員公派), 사강(士綱) - 옥산(玉山) : 참의공파(參議公派), 사덕(士德) : 부사공파(府使公派), 사복(士福) : 군수공파(郡守公派), 사명(士命) : 현감공파(縣監公派).

 

4). 인무(仁茂) - 실(氵+實) - 하우(夏佑) - 복산(覆山) - 옥수(玉壽) - 완(莞) : 전주관(全州貫, 주7), 돈(䔻) : 옥야관(沃野貫, 주8), 연(䔳) : 보성관(寶城貫)

 

5). 인성(仁成) - 천붕(天鵬) - 경(勁) - 용수(龍壽) : 안동관(安東貫, 주9)

 

6). 현무(賢茂) - 남미(南美) - 발(發) - 인서(仁恕) - 한손(漢孫) : 별시공파(別侍公派)

 

7). 총(葱) - 처곤(處坤) - 효검(效儉) - 거재(巨材) - 승무(承茂) - 매(枚) - 계번(季蕃) : 임하관(臨河貫, 주10)

 

주1). 임계정(林繼貞)은 고려(高麗) 때 평찰품사(評察品事)를 지낸 임몽주(林夢周, 시호 충선공)의 17세손이다. 경주임씨(慶州林氏) 일세조(一世組)다. 관조(貫組)인 계정(繼貞)은 1505년(연산군 11)에 생원(生員) 곤(崐)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인종조(仁宗朝)에 성균관(成均館)의 진사(進士)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냈으므로 후손들이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인물을 보면 조선(朝鮮) 때 희지(熙之)가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봉사(奉事)에 이르렀다.

 

주2). 임자번(林自蕃)은 조선 세조(世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경상(慶尙),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내고 추충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에 책록되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라 양양군(襄陽君)에 봉해졌다.

 

주3). 임대량(林大樑)은 전서공(典書公) 임난수(林蘭秀)의 6세손이다. 안의임씨(安義林氏)의 시조(始祖)다.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안의(安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안의임씨(安義林氏)는 부안 임씨(扶安林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이다.  

 

안의(安義)는 경상남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1415년(태종 15)에 고려 이래의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을 병합하여 안음현(安陰縣)으로 하였다가 영조 때 안의현으로 개칭한 것을 시원(始原)으로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1914년 군(郡)을 폐지하고 함양군(咸陽郡)과 거창군(居昌郡)에 갈라 편입하여 현재는 함양군(咸陽郡) 안의면(安義面)으로 남아 있다.

 

주4). 임표(林表)에 대해서는 일려진 것이 거의 없다.

 

주5). 임사순(林士栒)은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는데, 그의 묘가 임천(林川)에 있었으나 그뒤 실전(失傳)되었다. 임천(林川)은 충남 부여군(扶餘郡)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이다. 임천임씨(林川林氏)는 임몽주(林夢周)를 시조로 삼는 평택임씨(平澤林氏)에서 분파된 성씨다. 시조의 사적(事蹟)이나 본관의 유래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임천임씨를 평택임씨 진사공파(進士公派)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주6). 임각(林恪)은 호조참판을 지냈다. 임사수(林士壽)는 단종 복위운동 중 많은 사람이 다치자 완주에 내려와 고향을 지켰다. 임사부(林士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임옥산(林玉山)은 장수현감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호는 국헌이다. 임옥산은 조선 성종 때 대궐에 있어 달라는 임금의 청을 버리고 향리인 장수로 내려와 현감을 하였다. 산서면에 있던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속칭 비행기 고개를 넘어 어머니의 문병을 다녔는데 야밤에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기의 볼기를 칼로 떼어 어머님께 드렸더니 그 살과 피를 먹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임사덕(林士德)은 호조참판 종2품을 지냈다. 1444년(세종 26)에 문과 방목인 원종좌익공신의 녹권에 올랐다. 통정대부 정3품 당상관을 거쳐 종성부사를 지냈고, 1494년(성종 25) 오늘날 김제시 만경읍에 정착했다. 임사복(林士福)은 문과에 급제하여 서천군수를 지냈다. 1469년(예종 1) 지금의 전북 김제시 봉남면 종덕리에 정착했다. 임사명(林士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주7). 전주관(全州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시조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1693년(숙종 1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임여순(林汝恂)이 중조(中祖)라 하였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임여순의 본관이 옥야(沃野, 전라북도 익산)로 되어 있다.

 

또 다른 전주임씨(全州林氏)로는 조양임씨(兆陽林氏) 임세미(林世味)의 손자 임실실(林氵+實)을 파조(派祖)로 하는 전주임씨가 있다. 계해보(癸亥譜)에 따르면 임실은 진사(進士)가 된 뒤 함경도 홍원군(洪原郡) 신익면(新翼面)에 입향하여 전주임씨의 파조(派祖)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계통은 전주백(全州伯) 임덕운(林德雲)을 중시조로 하는 임영봉(林迎奉)의 후손이다. 그가 평안도 구성(龜城)에 퇴거를 함으로써 파(派)를 이루어왔다고 '병자보(丙子譜)' 서문에 쓰여 있다.

 

전주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17명, 생원·진사 9명을 배출하였다.

 

주8). 옥야임씨(沃野林氏)는 임윤손(林允遜)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옥야(沃野)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옥야(沃野)는 전라북도 전주(全州) 서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는 백제(百濟)의 소력지현(所力支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옥야(沃野)로 개명하였고 고려 초에는 전주(全州)에 속하였으며, 1551년(명종 1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내속(來屬)시켰다. 지금은 익산군(益山郡)에 속해 있다.

 

주9). 안동임씨(安東林氏)는 중조 임인성(林仁成)이 조양임씨(兆陽林氏) 1세조 임세미(林世味)의 둘째 아들인 식(湜)의 둘째 아들로 고려조 인물이라고만 알려졌다. 1985년도에 실시한 인구 센서스에 전체 인구가 4천3백75명으로 조사된 상당한 규모의 성씨임에도 문헌이 없어 분관의 유래와 중조의 구체적인 사적 및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후손으로는 임천붕(林天鵬), 임경(林勁), 임용수(林龍壽) 등이 있다.

 

주10). 임하임씨(臨河林氏) 중조 임총(林蔥)은 임세미(林世味)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말에 중정대부(中正大夫) 전객령(典客令)에 이르렀다. 임하(臨河)는 안동의 속현인데 임하 관적 유래는 미상이다. 그의 6대손 임계번(林季蕃)은 사마시에 합격했는데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부모봉양에 편리하도록 연원찰방(連原察訪)에 특채되고, 은산과 아산의 현감을 역임했다.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웠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임하임씨의 시조가 전객령(典客令) 임총(林蔥)이고 후손 승무(承茂)는 현감을 지냈다고 평택임씨분적표(平澤林氏分籍表)와는 달리 소개되어 있다. 문중인구는 2000년 현재 463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