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임씨(林氏) 상계(上系) 및 초중기(初中期) 분적표(分籍表)

林 山 2021. 4. 7. 00:03

각국(各國)의 족보(族譜) 기록(記錄)을 종합하고 역사상(歷史上)에 나오는 조상(祖上)들을 중심으로 연대(年代)에 맞추어 계통(系統)을 열거하였다. 

 

1. 830~850년 팔급(八及, 翰林學士公). 학사공(學士公, 始祖)은 중국 당(唐)나라에서 팽성(彭城, 平澤의 옛이름) 용주방(龍珠坊)으로 이주(移住)하시다. 

 

2. 900년 양저(良貯, 太師公). 태사공에 구자설(九子說)이 있다. 918년 고려(高麗) 건국(建國).

 

3. 935~950년 무(碔, 平城伯). 935년에 신라(新羅) 멸망.

 

4. 950~1000년 희(禧, 平澤伯). 희(曦, 常山伯, 주1) : 상산관(常山貫)

 

5. 1000년 면(冕)

 

6. 1050년 득우(得雨)

 

7. 1050~1100년 몽주(夢周, 忠宣公). 충선공은 구자설(九子說)이 있음.

 

8. 1100년 견미(見美)? 기미(箕美, 檜城君) : 회성관(檜城貫)계미(季美)?

 

9. 1100~1150년 새(塞). 개(槩, 平章事, 주2) : 옥구관(沃溝貫), 언(彦). 

 

10. 1150~1200년 만옥(萬玉). 개(, 平章事- 유겸(有謙), 유문(有文)언(彦) - 간(幹), 중간(仲幹)

 

11. 1200년 희윤(喜胤). 유문(有文) - 완(完, 益山伯, 주3) : 익산관(益山貫)중간(仲幹) - 종비(宗庇), 민비(民庇), 광비(光庇). 종비(宗庇) - 우(祐, 蔚陵君, 주4) : 울진관(蔚珍貫)광비(光庇) - 춘(椿, 西河公, 주5) : 예천관(醴泉貫)

 

12. 1250년 세춘(世春, 典客令, 주6) : 평택관(平澤貫) 전객령파(典客令派), 속(續), 세은(世殷), 연(衍, 莊烈公), 숙(淑, 保安伯), 일(溢). 연(衍, 莊烈公, 주7) - 진천관(鎭川貫)숙(淑, 保安伯, 주8) : 부안관(扶安貫)

 

13. 1300년 세춘(世春, 典客令) - 재(梓), 보(椺), 정(楨). 세은(世殷) - 분(蕡, 長興君, 주9) : 장흥관(長興貫)

 

14. 1350년 재(梓) - 태순(台順), 태길(台吉). 보(椺) - 윤생(允生), 정(楨) - 언수(彦修, 忠貞公, 주10) : 평택관(平澤貫) 충정공파(忠貞公派). 충정공에 팔자설(八子說)이 있음. 1392년 이씨조선(李氏朝鮮) 건국.

 

15. 1400년 태순(台順) - 정(整). 윤생(允生) - 무(茂)언수(彦修, 忠貞公) -성미(成味), 견미(堅味), 제미(齊味), 세미(世味, 兆陽君, 주11) : 조양관(兆陽貫)성근(成槿, 주12) : 은진관(恩津貫). 명엽(命曄). 난수(蘭秀, 典書公). 중연(仲沇, 주13) : 순창관(淳昌貫) - 선미(先味) : 두문재관(杜門齊貫)  

 

16. 무(茂) - 수겸(守謙)성미(成味) - 상양(尙陽), 길양(吉陽)제미(齊味) - 맹양(孟陽). 만(蔓, 判書工, 주14) : 선산관(善山貫). 수신(守身). 

 

주1). 林曦(임희)의 초명(初名)은 수미(秀美), 자(字)는 일화(日華)이다. 신라말(新羅末)에 충북 진천군 일대를 지배하던 호족(豪族)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다. 고려 건국 직후인 918년(태조 1) 6월 신유(辛酉)에 고려전군(高麗全軍)을 통사(統師)하는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었다. 922년 태조 4년 12월 제1왕자(王子)인 무(武)를 태자(太子)로 책봉(冊封)하고 임희(林曦)의 딸을 태자비(太子妃)로 삼았다. 그가 곧 후일 2대 혜종((惠宗)의 왕비가 된 의화왕후(義化王后)다. 의화왕후는 1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公主)를 낳았는데, 곧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혜공주(貞惠公主)이다. 경화궁부인은 또 4대 광종(光宗)의 왕비가 되었다. 943년 임희의 관직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삼한벽상삼중대광령삼사흥화부원군상산백( 三韓壁上三重大匡領三司興化府院君常山伯)에 봉해졌다.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충숙공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여주심씨(驪州沈氏)이고, 묘(墓)는 여주(驪州) 방동축좌(方冬丑坐)에 있다.

 

주2). 임개(林槩)는 옥구임씨(沃溝林氏)의 시조(始祖)다. 고려(高麗) 때 청렴결백한 관리(官吏)로 이름이 높았던 문경공(文敬公)이다. 고려 문종(文宗) 때 내시(內侍)로서 창고 관리를 정직하게 하였고, 1085년(선종 2) 공부상서(工部尙書) 때 이자인(李資仁)과 함께 송(宋) 나라에 가서 송제(宋帝)의 등극을 축하하고 돌아와 1087년(선종 4)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서북로 병마사(西北路兵馬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형부상서(刑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냈다. 이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형부사(判刑部事)로 치사(致仕)했다. 임개의 후손들은 임개를 시조로 옥구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주3). 임완(林完)은 1114년(고려 예종 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고, 인종(仁宗)이 수창궁(壽昌宮) 옆에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자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고문이 되어 국자사업(國子司業),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으며, 뒤어 익산백(益山伯)에 봉해졌다.

 

주4). 임우(林祐)는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라 중부상서(中部尙書)를 지냈고,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울릉군(蔚陵君)에 봉해졌다. 

 

주5). 임춘(林椿)은 가전체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 인종 때의 문인이다.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가 없다. 그의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로 예천임씨(醴泉林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고려 건국공신의 자손으로 아버지 광비(光庇)와 큰아버지 종비(宗庇)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지내는 등 정치적 기반과 경제적 여유를 지니고 있어 음보(蔭補)로도 벼슬길에 나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육갑(六甲)을 외우고 백가서(百家書)를 읽는 등 재능이 있어 큰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 청년기에 벌써 문명을 날리는 등 귀족의 자제다운 면모를 보였다. 이에 실력으로 자립하겠다는 의지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운이 없었는지 번번이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나이 20세를 전후한 1170년(의종 24)에 무인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고, 문신들에 대한 1차 대살륙 때 일가가 화를 당하여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조차 빼앗겨 버리고 간신히 피신하여 개성 근처에서 숨어 지내면서 출사(出仕)의 기회를 엿보았다. 출사가 여의치 않자, 4년 후 여름 경상도 예천(醴泉)으로 내려가 지내다가 상주(尙州)로 옮겨가 7년여의 고단한 생활을 했다. 현재 전하는 그의 글 중 대부분은 이때 쓴 것들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대체로 실의와 고뇌에 찬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글이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지인(知人)들을 통해 여러 번 자천(自薦)을 시도하여 정권에 편입하려고도 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다시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 장단(長湍)에 초당을 짓고 우거하다가 요절했다. 그때의 처지를 '파한집(破閑集)'에서는 '강남으로 피지(避地)한 지 거의 10여 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어서(無托錐之地) 우연히 한 절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인로(李仁老)가 그의 문집 서문에 '청춘삼십백의영몰"(靑春三十白衣永沒)이라 하였는데, 그가 남긴 글 가운데 '나이 40에 양 귀밑털이 다 희어졌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인로와 동년배쯤이었으며, 40대 초반 무렵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김포 가련산(佳連山) 아래 남압사(南鴨寺) 동구(洞口)에 묻혔다.

 

이인로, 오세재(吳世才),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등과 함께 술을 벗하며 문학을 논하여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견되는 죽림고회(竹林高會, 海左七賢 또는 江左七賢이라고도 함)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성호사설(星湖僿說)'29권 시문문(詩文門) 임서하(林西河) 조에서는 임춘에 대해 "문집 6권을 남겼는데, 이인로(李仁老)는 서문을 짓기를, ‘의왕(毅王)의 말년에 온 집안이 화를 입을 때 홀몸으로 겨우 벗어나 강(江)의 남쪽으로 가서 피신했다가, 여러 해 뒤에 서울로 돌아와서 항상 삼분(三奔)의 치욕을 씻으려고 생각하더니, 마침내 일명(一名)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의 시문은 해동(海東)에서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세상을 주름잡은 자는 이 한 사람일 뿐이었다.’ 하였다. 뒤에 그의 유집(遺集)은 드디어 민멸되고 전하지 못했더니, 근자에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 중 인담(印淡)이 꿈에 한 도사(道士)를 만났는데, 그 도사가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를 파면 기보(奇寶)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므로, 꿈을 깨고 나서 그 말과 같이 하였더니, 바로 동탑(銅塔)이 나오고 그 탑 속에 구리로 만든 항아리가 있고 항아리 속에는 '서하집(西河集)'이 있었다. 그리고 탑에 글자가 새겨 있는데, 바로 중 담인(淡印)의 소장이었다 한다. 소장자는 담인이요, 발굴자는 인담이니 어찌 그리 신기한가! ..... 불감(佛龕, 불상을 모셔 두는 방이나 집)에 비장되어 거의 반천 년 만에 다시 나왔으니, 이는 우연한 것이 아닌 듯하다. 이것이 바로 이치의 궁구하지 못할 점이기도 하다.”라고 평했다.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권하(卷下)에는 “서하(西河) 기지(耆之)가 생활에 싫증이 나서 성산군(星山郡)에 가서 묵을 때 군수가 그의 이름을 익히 들어오던 터이라, 기생 하나를 보내어 천침(薦枕, 잠자리를 모심)케 했는데 그만 밤이 되자 도망가 버렸다. 기지가 원망스러워 시를 지어 이르기를, ‘누대에 올랐을 때는 퉁소를 부는 짝이 되지 못했고('列仙傳'에 蕭史가 퉁소를 잘 불어 秦穆公이 딸 弄玉을 주었다고 함), 달로 도망가니 속절없이 약을 훔친 선녀가 되었도다('淮南子'에 羿가 西王母에게서 불사약인 天桃를 얻어 두었는데, 그의 아내 姮娥가 훔쳐가지고 月宮으로 도망갔다 함). 장관(長官)의 엄한 호령도 겁내지 않고, 부질없이 나쁜 인연이라 행객(行客)에게 성내도다.’하였다. 그의 고사를 사용하는 솜씨가 더욱 정교하여 고인(古人)이 말한 ‘금실로써 수를 놓았다(蹙金結繡, '麗人行'에 나오는 말)’고 할 만한 것으로 조금도 (고사를 사용한) 흔적이 없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주6). 임세춘(林世春)은 평택임씨(平澤林氏)의 중시조이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거쳐 전객령(典客令) 겸 연희궁(衍喜宮) 부사(副使),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전객령은 국빈의 영접과 대신들의 공궤(供饋, 음식물 제공)를 담당하는 관청인 전객시(典客寺)의 고위 관원이다. 전객시는 고려 태조 4년(921)에 태봉(泰封)의 제도를 본뜬 예빈성(禮賓省)의 후신이다. 이 관청은 성종 (成宗) 14년(995)에 객성(客省)으로 바꼈으며, 뒤에 다시 예빈성으로 환원됐다. 전객시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충렬왕 24년(1298)에 충선왕(忠宣王)이 선위를 받아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할 때이다. 충선왕은 예빈성을 전객시(典客寺)로 명칭을 고치고 수장인 판사(判事)를 없애고 대신 경(卿) 2인을 증원하였다. 하지만 충렬왕이 곧 다시 복위하여 예빈시로 이름을 바꿨다. 1308년 다시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전객시로 이름을 바꾸고 영사(領事) 2인을 두어 겸관(兼官)으로 삼고 경(卿)을 영(令)으로 고쳐 정3품을 임명하도록 했다. 이같은 관제 개혁의 역사를 살펴볼 때 임세춘이 전객령을 맡았던 시기는 충선왕 복위 기간(1308~1313)으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이 관청의 명칭은 전객시와 예빈시를 넘나들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 예빈시가 되어 조선조로 이어졌다.

 

임세춘의 배위는 공감시랑(工監侍郞) 청주경씨(淸州慶氏) 수(綏)의 딸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인 재(梓)는 충정왕(忠定王) 때 예의판서(禮儀判書)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증손인 정(整)은 조선조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평양부윤(平壤府尹)에 올랐다. 성종(成宗)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조선 인조(仁祖) 때의 명장 임경업(林慶業)은 임세춘의 12세손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 쌍용동 (雙龍洞,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항동동)에 계좌(癸坐)로 모셨으나 실전(失傳)하여 충주시 단월동 숭모사(崇慕祠)에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양력 4월 1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07년 10월 경기도 파주시 소재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주7). 임연(林衍, ?∼1270)의 본관은 진주(鎭州). 초명은 승주(承柱)이다. 선대(先代)는 고려 초 진주의 호족인 임희(林曦), 임명필(林明弼) 등이다. 아버지는 진주의 향리(鄕吏)이고, 어머니도 진주 주리(州吏)의 딸이다. 배위는 원주이씨(原州李氏)이다.

 

1236년(고종 23) 대장군(大將軍) 송언상(宋彦祥)의 사병으로 활동하다가, 1240년대에 고향인 진주로 돌아왔다. 1254년(고종 41) 고향에서 주민들을 모아 몽고의 군대를 격퇴한 공으로 대정(隊正)의 직을 받았다. 1257년(고종 44) 최씨 무신정권의 실력자였던 김준(金俊)의 후원으로 최의(崔竩)로부터 낭장(郎將)직을 받았다.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에 김준과 함께 참여하여 최의를 제거하고,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을 책봉받았으며, 그의 고향인 진주는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되었다. 1261년(원종 3)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고, 이때 도령낭장(都令郎將)에서 무반의 최고위직인 상장군(上將軍, 정3품)으로 승진하였다. 1260년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로 승진하였으며, 당시 집권자인 김준과 갈등을 보이다가, 1268년(원종 9) 12월에 무진정변(戊辰政變)을 일으켜 김준을 제거하였다. 이 정변의 공으로 아들인 임유무(林惟茂)와 함께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해졌고, 그의 고향은 창의현에서 지의영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되었다. 또, 부인의 고향인 원주도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269년(원종 10)년 6월에 국왕의 측근이자 환관(宦官)인 김경(金璥), 최은(崔摁) 등을 죽인 다음 삼별초(三別抄)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동원하여 원종(元宗)을 폐위시키고, 왕의 동생인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공으로 임연은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고 실질적인 집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원종의 폐위 소식을 들은 원(元)나라가 총사령관 멩케투(蒙哥篤)와 추밀원 부사 김방경(金方慶) 등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였고, 카치(黑的)를 사신으로 보내 임연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였다. 이에 그해 11월 임연은 신왕(新王)인 창을 폐하고 원종을 복위시키고, 12월에 무신정권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였다. 1270년(원종 11) 정월에 원에 갔던 원종이 몽고 군대의 호위를 받고 세자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자 임연은 몽고에 대한 항쟁을 결의하고 2월에 야별초(夜別抄)를 전국에 보내 백성들을 강화도에 불러들이고 군비를 증강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임연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등창이 나서 죽었다. 이에 순안후(順安侯) 종(琮)은 임연에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증직하고 장렬(莊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8). 임숙(林淑)은 고려 문신으로서 순성보절좌리공신(純誠輔絶佐理功臣)에 책록되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 보안백(保安伯)에 봉햐졌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다. 

 

고려사에는 충숙왕 10년(1323년) 계해 정월에 제주만호(濟州萬戶)로 박순인이 부임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당시 제주만호 임숙이 자의로 임지를 이탈하여 행성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어 재임명되었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박순인을 만호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1331년 충숙왕이 왕위를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가 있다가 1333년 다시 돌아와 왕으로 재위하려 할 때 부자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났다. 이때 충혜왕을 옹립하려는 적이 공주전에 들어간 것을 충숙왕의 군사가 쫒아 들어가 쏘아 죽이고 그 시체를 순군소의 남쪽 다리 아래로 옮겨 놓고 공주는 만호 임숙의 집으로 옮겼다. 이런 공적으로 충숙왕 재위시 순성좌리공신으로 수사공상주국 보안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배위는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유씨이며, 정헌공 복화의 딸이다. 묘소는 송도 고운사 법당 동편 원외 남향에 있다. 묘소 아래 신도비가 있다.

 

주9). 임분(林蕡)의 시호는 충정공(忠靖), 호(號)는 만취정(晩翠亭)이며 장흥임씨(長興林氏) 득관조(得貫祖)이다. 충선공(忠宣公) 몽주(夢周)로부터 누대후(屢代後) 장흥관(長興貫) 일세(一世)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 장택군(長澤君) 임세은(林世殷)의 아들이다. 

 

임분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출생하여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20세를 전후하여 문과에 올라 전한문하평장사(典翰門下平章事)를 지내고 23세때 충의배문하시중(忠義拜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니 관직을 버리고 송도(松都) 흥국사(興國寺)에 은둔(隱遁)하여 논도경방(論道經方)하다가 1397년 전라남도(全羅南道) 장흥군(長興郡) 억부산(億夫(佛)山) 도림촌(桃林村)에 세거하였다. 조선 세종 1432년에 정경(正卿)을 증(贈)하고, 장흥군(長興君)에 봉(封)하니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이다.

 

임분은 개성(開城) 남문 밖 야자교(也字橋)위에 탄허비(誕墟碑)를 세워 충신 임공지비(忠臣林公之碑)라 새겼다. 서원(書院)은 흥국사(興國寺) 터에 세우고 액(額)을 사(賜)하였으며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도림촌에 쌍봉(雙封)하였다.

 

임분은 어려서 자품(姿稟)이 온인(溫仁)하고 의모(儀貌)가 준의(峻疑)하며 문사(文辭)에 능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송도 흥국사에서 은둔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호남(湖南)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길 때 한강을 건너면서 '西山之薇兮伯夷採之東海(南海)之水兮仲連蹈之'라 읊으며 탄식했다. 풀이하면'고려는 망하였고 이씨왕조가 세워지매 백이(伯夷), 숙제(叔齋)와 같은 지기로 의(義)를 지키고 오직 새 왕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초근목피(草根木皮) 생활을 할 것이며,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바다 보이는 곳에서 중련(仲連)과 같은 은사로 세상의 도를 지키고 은인(隱人)으로 여생을 지내리로다'라는 뜻이었다. 억부산 아래 도림촌에서 정자 두어 칸을 짓고 소나무와 잦나무를 심었다. 송백(松柏)을 심은 것은 세한후조(歲寒後凋)의 뜻을  취한 것이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임처사(林處士)라 하였다.

 

임분이 호남으로 은거지(隱居地)를 옮긴 동기는 첫째. 선조들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공민왕(恭愍王) 말기 무진사화(戊辰士禍) 때 최영(崔塋), 이성계(李成桂)의 정적들에 의해 조부(祖父) 임맹양(林孟陽), 증조부(曾祖父) 개성판윤(開城判尹) 임제미(林齊味), 종증조부)從曾祖父) 문하시중(門下侍中) 영삼사사(領三司事)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임견미(林堅味) 등 친인척들이 1388년(우왕 14년) 1월 11일 살해(殺害)를 당했다. 

 

둘째. 임분은 고려조에서 등과(登科)하였고 관직에 있으면서 녹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회 풍조로 보아 두 왕조(王朝)를 받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이씨왕조는 고려유신(高麗儒臣)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가문(家門)에 위압을 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문을 지키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거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명(明)나라와의 관계가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정한 북쪽보다는 남쪽을 택하였을 것이다.

 

넷째. 종증조부 조양군(兆陽君) 임세미는 대학자로 말년에 보성군(寶城郡) 조성면(鳥城面)에 내려와 세거(世居)하였다. 그러므로 친척이 있는 가까운 장흥(長興)으로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10). 임언수(林彦修)의 호는 주헌(柱軒),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태위(太尉), 찬성사(贊成事),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중국 송(宋)나라 공제(恭帝) 덕우(德祐) 연간에 태어나 고려 말에 훈공으로 입신출세한 당대의 명신이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연간에 향년 90세로 사망하였고, 아들 8형제를 두었다고 전하는데 당세에 모두 현신(賢臣)이었으며 임씨(林氏)의 대소 본관이 여기서 많이 분적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주11). 임세미(林世味)는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언수(彦脩)의 네째 아들로 조양임씨(兆陽林氏)의 시조이다. 임세미는 고려말(高麗末)에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대광찬성좌복야(大匡贊成左僕射)를 지내고 조양군(兆陽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평택임씨(平澤林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조양(兆陽)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양(兆陽)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보성(寶城) 동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동로현(冬老縣)이었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이 조양(兆陽)으로 고쳐 분령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高麗)에서는 보성(寶城)에 속하였으며, 1395년(태조 4) 고흥(高興)에 편입되었고 1441년(세종 23)에 다시 보성(寶城)으로 환속시켰다.

 

주12). 임성근(林成槿)은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청랑(朝請郞),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역임했다. 은진임씨(恩津林氏)의 일세조(一世祖)이다. 그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은진(恩津)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은진(恩津)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논산군(論山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덕은(德恩), 시진(市津) 두 현의 합명이다. 덕은현(德恩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덕근군(德近郡)을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덕은(德恩)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덕은(德恩)으로 개칭하였다. 시진현(市津縣)은 본래 백제(百濟)의 가지 내현(加知奈縣, 일명 加乙乃, 薪浦)인데 경덕왕이 시진으로 고치고 덕은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덕은과 시진을 모두 공주(公州)에 편입시켰으며, 1307년(태조 6)에 덕은, 시진을 합쳐 덕은(德恩)을 다시 설치하였다. 세종(世宗) 때 은진(恩津)으로 고쳤고 인조(仁祖) 때는 이성(尼城), 연산(連山)과 합하여 현(縣)이 되었다가 1656년(효종 7)에 분리하였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논산군(論山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논산군(論山郡) 은진면(恩津面)으로 남아있다.

 

시조 임성근(林成槿)의 아들 정(挺)이 봉선대부(奉善大夫)로 낙안군사(樂安郡事)를 역임하였고, 손자 식(湜)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증손 천년(千年)이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광주목사(光州牧使)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한 훈(薰)과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을 지낸 훈의 동생 운(芸)이 이름났다.

 

주13). 임중연(林仲沇)은 고려 충숙왕 때 우상시, 밀직부사, 첨의찬성사를 역임했다.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충숙왕을 잘 보필한 공로로 순창군(淳昌君)에 봉해졌다. 그는 왕을 대신하여 동정성(東征省)을 다스렸다. 그래서 후손들이 평택임씨에서 분관하여 순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묘소는 순창군 순창읍 장덕리에 있다.

 

임중연의 아들 임선미(林先味)는 태학사로서 퇴폐한 예법과 세속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순절한다. 조선을 부정하고, 목숨까지 내던진 선조 때문에 순창임씨 후손들은 간신히 명맥을 잇고 살아왔다. 순창에 사는 후손들도 크게 출세한 사람이 없고, 그저 순창 관아의 아전을 지내면서 살아왔다.

 

전북 순창의 호계마을에는 임선미를 기리는 사당 호계사(虎溪祠)가 있었다. 형상이 날개를 펴고 있는 매와 같아 응동(鷹洞)이라 불리었던 이 마을에는 임선미의 후손들이 30가구쯤 된다. 

 

임선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첫째 임용배(林用培)와 셋째 임용계(林用桂)는 순창으로 내려가고, 둘째 임용달(林用達)은 개성에 남았다. 두 아들이 순창으로 내려간 것은 할아버지 임중연이 순창군에 봉군(封君)된 인연 때문이다. 임선미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임중연을 파시조로 삼아 독자적으로 순창임씨를 표방했다. 그러나 조선 건국에 반대한 임선미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에  원시조에 맞춰 평택 본관을 쓰면서 살아야 했다. 최근까지도 대다수가 평택임씨로 하고 있다. 순창임씨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임선미의 후손도 순창, 화순, 홍성에 사는 1000여 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14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2000년에 937명이다.

 

주14). 선산관의 시조 임양저(林良貯)는 경순왕의 손주사위이며 벼슬이 중랑장에 이르렀으나 고려에 귀순함이 부당함을 극간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얻어 선산에 유배되었다. 이후 선산에 은거하여 뿌리를 내리니 후손들이 선산을 관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중시조 임만(林蔓)이 전남 영암에 입향하면서 세거지로 삼아, 전남 서남부의 명문으로 오랫동안 자리하여 왔다.

 

중시조이자 1세조인 임만은 고려 공민왕 19년에 태어나 조선 태조때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이후 그의 아들 임진(林珍)과 손자 임간(林幹)에 이어 증손자 임득무 (林得茂)가 관직에 올라 현달하면서 가문의 반석이 다져졌다.

 

그리고 임득무의 두 아들 임종(林宗)과 임수(林秀)로부터 가문이 크게 번창하게 되는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일선부원군(一善府院君)에 봉해진 임우형(林遇亨)의 다섯 아들이다. 그중 특히 석촌공 임억령(林億齡)은 학덕을 겸비한 당대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였으며,숭선부원군 임백령(林百齡)은 정난위사 일등공신에 오른 대정치가였다. 또한 임구령(林九齡)은 정난위사 이등공신에 오르고 형조정랑, 광주목사 등을 지냈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영암으로 내려가 진남제의 둑을 쌓는 간척사업 등으로 제민에 힘써 유명하다.

 

또한 '삼극(三克) 즉 임극협(林克協), 임극성(林克性), 임극걸(林克傑)은 임진왜란 때 권율과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세우는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전남 일대의 명문으로 명성을 떨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