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예술 영화 오딧세이

[EIDF 2021] 울림의 소리 - 영혼의 소리를 담은 북

林 山 2021. 8. 24. 17:54

2021 EIDF(EBS 국제 다큐영화제)가 개막하는 날인 8월 24일 EBS에서 상영한 작품은 이정준(Lee Jeongjun) 감독의 '울림의 탄생(The Birth of Resonance)'이다. 이 다큐 영화는 2020년에 제작됐고, 러닝 타임은 96분이다. 

 

이정준 감독

이정준 감독은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만난 북에 지난 60년의 인생을 건 법고(法鼓)장인 임선빈(任善彬)과 10여 년 동안 그의 옆을 지키면서 북 제작을 배우는 아들 동국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감독이 임선빈 부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임선빈이 단순히 북만 만드는 악기장이었다면 다큐 영화의 소재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임선빈은 1949년 충북 청주에서 3남 6녀 중 막내로, 선천성 소아마비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11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은 것은 당시 판자촌이었던 서부이촌동에서 넝마주이를 할 때였다. 한쪽 다리를 저는 그에게는 넝마주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구걸을 제대로 못할 때는 주먹과 발길질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오른쪽 귀를 먹은 것도 그때 심하게 맞은 탓이었다. 

 

넝마주이 패거리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임선빈은 무작정 호남행 기차를 타고 도망치듯 서울을 떠났다. 순천에서 내린 그는 밥을 얻어먹으려고 장터를 돌아다니다가 덕양 우시장에 소가죽을 구하러 온 북장인 황용옥을 만났다. 국밥 한 그릇을 얻어먹은 그는 먹여 주고 재워 준다는 말에 황용옥을 따라 대구로 갔다. 대구에는 황용옥의 북공방이 있었다. 

 

임선빈은 스승 황용옥에게 가죽 다루는 법부터 가죽 부위를 구별하는 법, 소리를 잡는 법 등을 배웠다. 그는 17살이 되던 해 스승과 함께 처음 법고를 만들었다. 보은 법주사에 들어가는 법고였다. 법고를 만들기 전 스승은 그를 목욕탕으로 데려가 목욕재계시켰다. 법고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는 아침 저녁으로 목욕재계하고 매일 속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이때 스승으로부터 법고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자만심과 욕심을 버리고 법고를 대하면 반드시 좋은 소리가 난다는 가르침이었다.

 

북장인 임선빈(좌)과 그의 아들 임동국(우)

그런데, 이때 스승 황용옥이 세상을 떠났다. 임선빈의 나이 18살 때였다.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출가를 결심했다. 출가를 대구 파계사를 찾은 그는 사찰 지붕 네 귀퉁이의 용머리와 단청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빠졌다. 문득 북에다가 용머리와 단청을 넣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소문 끝에 단청장 최성웅을 찾아가 안료 배합과 단청 문양 넣는 것을 배웠다.  

 

1975년에는 스승의 친구인 판소리북 장인 박일오에게 털가죽을 벗기는 과정을 전수받았다. 1976년에는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인 김종문 공방에서 북 제작 공정을 연마했다. 1980년에는 서울공예사에서 단청 및 문양 기법을 터득했다. 1982년 대구 영진공예사에 이어 1985년에는 대전 민속공예사에서 대형 북 제작의 경험을 쌓았다.  

 

기쁨도 잠시 성했던 왼쪽 귀마저 청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보청기를 꼈지만 들리는 소리는 예전과 달랐다. 북은 예민한 악기여서 재료나 환경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그가 청력을 잃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완성된 북을 두드려보고 소리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북소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청력을 잃고 한동안 방황을 하던 임선빈은 어느 날 스승이 생전에 들려준 '소리는 꼭 귀로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울림으로도 알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소리를 몸과 마음으로 들으라는 가르침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손으로 직접 파동을 통해 소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북 한쪽을 치면 파동이 생겨서 반대편 가죽을 진동시킨다. 가죽에 손바닥을 대고 있으면 그 떨림이 전해진다. 임선빈은 마침내 그 떨림이 가슴까지 타고 올라와 몸으로 소리를 읽는 법을 터득했다.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법고를 만들 때마다 보청기를 뺐다. 드디어 소리를 듣지 않아도 북의 울림이나 전해지는 파동으로 북소리를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북공방에서 임선빈 부자

1988년 임선빈은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 사용된 대북을 제작하면서 북장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어 그는 1997년 당시 국내 최대라는 평을 들은 '안양 시민의 북', 1998년에는 전국체전을 위한 '제주 시민의 북'도 제작하였다. 청와대 춘추관에 있는 대북, 통일전망대 대북, 대전 엑스포 대북도 그가 만든 작품이었다. 1999년 그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그는 공방을 겸한 집에서 대북이나 용고(龍鼓), 좌고(座鼓), 사물놀이북 등을 만드는 한편 제자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쳤다. 

 

임선빈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매월 120만원을 지원받는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 1년에 두 번 북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 지만 정작 지원은 많이 부족하다. 전시가 끝난 뒤 북을 둘 곳이 없어서 해체해 버려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애써서 만든 북을 다시 뜯어서 해체해 버리는 도로아미타불(徒勞阿彌陀彿)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대북은 작업 시간만 6개월~3년이 걸리는데, 그 크기 때문에 보관 장소를 찾는 것도 어렵다. 누군가 원하면 무상으로 북을 제공할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북장인은 북 전시관이나 박물관이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아들 동국이 북 제조의 대를 잇기 위해 조교에 합격한 것은 장인의 한 가지 큰 고민거리가 해결된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북을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임선빈에게는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다. 바로 영혼의 소리를 담은 북을 만들겠다는 염원이다. 그는 죽기 전에 한 해를 보낼 때 치는 제야(除夜)의 종처럼 새해를 맞으면서 치는 영신(迎新)의 북을 죽기 전에 꼭 만들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가 만든 북이 대대손손 전해져 에밀레종처럼 국보급 유물이 되는 게 소원이다. 

 

임선빈은 아들과 함께 필생의 대북 제작을 시작한다. 북과 함께 걸어온 임선빈 장인의 인생 역정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021. 8. 24.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