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내 아들 정하는 어벙이

林 山 2004. 12. 8. 15:09

아침 9시가 막 되었을 때다. 고3인 정하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8시까지 학교에 나와야 하는데 정하가 아직까지 안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학교에 간다고 나갔으니까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같은 일로 벌써 몇 번째 받는 전화다. 그럴 때마다 정하에게 '제발 이런 전화는 받지 않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해도 그때뿐이다. 쇠귀에 경읽기다.

 

*젖먹이 시절의 정하. 왼쪽이 딸 선하
ⓒ2002 임종헌


정하는 충주고등학교에서 지각대장으로 통한다. 나도 충주고가 모교이고 또 전직이 교사였던지라 교직원 중에서 동창생과 선후배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정하는 지각대장'이라고 놀려댄다.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날 것도 같은데 나는 그저 담담하기만 하다.

왜? 나도 중학교 시절에 그랬으니까. 정하가 집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가끔 다리에 멍이 시퍼렇게 든 것을 본다. 다리에 멍이 든 까닭을 물어보면 "맞을 짓을 해서 맞았을 뿐이에요"라고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게 말한다. 참으로 천하태평인 녀석이다.

또 이 녀석은 잠꾸러기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담임이나 아는 선생님들이 나를 만나면 "정하는 도대체 집에서 무엇을 하길래 매일같이 잠만 자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정하는 요즈음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있어요"라고 할 뿐이다.

밤 12시가 넘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컴퓨터에 붙어앉아 새벽까지 스타크래프트게임을 하다보니 수업시간에 졸지않고 배길 수가 있겠는가. 수업시간에 졸다가 선생님으로부터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매를 맞아도 이 녀석의 스트크래프트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다.

 

* 코흘리개 시절의 정하
ⓒ2002 임종헌


정하가 아주 어렸을 때는 책이 장남감인 줄 알고 갖고 놀았다. 그러다가 한글을 깨치고부터는 자나깨나 책과 붙어 살았다. 화장실에 갈 때는 물론이고 밥을 먹을 때도 책을 끼고 살았다. 오죽했으면 제 할아버지가 "책을 너무 보면 눈을 버리니까 책을 빼앗아 버려라"고 나에게 당부까지 했을까!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자 어찌된 일인지 책을 손에서 놓더니 컴퓨터게임에 빠졌다. 이젠 자나깨나 게임에 몰두해서 잠마저 잊어버렸다. 게임에 중독된 지 벌써 6년째다. 수능시험을 눈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인 지금까지도 게임에 빠져 있다.

간혹 정하에게 게임에 너무 몰두하는 것은 시간낭비성 오락이라는 의견을 제시해도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또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어도 마찬가지다.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안다는 녀석이 게임에 몰두한다? 참 웃기는 녀석이다.

정하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때다. 시험기간이 된 것 같은데 시험공부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정하에게 "너 시험이 언제냐?"고 물었더니 글쎄 이러는 것이 아닌가!

"내일인 것도 같고…. 아니면 모레인가? 내일 학교에 가서 알아볼게요."

 

*정하의 초등학교 시절 월악산을 오르던 때의 사진. 왼쪽이 딸 선하.

덕주골 자연경관로에서 찍은 사진인데 뒤로 보이는 산이 만수봉 기슭.
ⓒ2002 임종헌


시험보는 날짜가 내일인지 모레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가 막혀서 "이놈아, 나는 그래도 최소한 일주일 전에는 시험공부를 했노라"고 했더니, 이 녀석 왈 "아빠, 시험은 평소실력으로 보는 겁니다"라고 되치는 것이 아닌가. 비록 맹랑하기는 하지만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기는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말았다. 녀석에게 한방 먹은 것이다.

정하가 충일중학교에 다닐 때다. 정하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고등학교 선택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학교로 와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을 만나자 정하의 내신성적이 좋지 않아서 충주고등학교는 어렵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 가지 수능시험성적으로는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원서는 써준다고 했다.

지금까지 정하와 같은 내신성적으로 그 학교에 원서를 쓴 학생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아빠, 걱정마세요. 저 충분히 합격할 수 있어요" 이러는 것이 아닌가. 결국 정하는 그 학교에 입학했다.

정하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다. 아내가 적포도주를 한 병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둔 적이 있다.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포도주병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범인의 윤곽이 잡힌다. 정하가 밖에서 돌아왔다.

 

*충주고등학교 교정에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정하.
ⓒ2002 임종헌


"혹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포도주 네가 마셨니?"
내가 묻자 이 녀석이 천연덕스레 말한다.
"아빠, 그 병에 무엇이 들었나 궁금해서 한모금 마셔보니 맛이 괜찮데요. 그래서 제가 다 마셔 버렸어요."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투다. 어이가 없다. 하긴 나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까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평소에 정하는 술을 마시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정하와 나 사이에는 숨기는 일이 없을 정도로 터놓고 지낸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마디 말도 없이 포도주 한 병을 저 혼자서 다 비워버리다니 조금은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한다. 내 인생은 내 것이고 아이들 인생은 아이들 것이니까. 그러니 각자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갈 일이다.

우리집 가훈은 '각자도생!'이다. 각자 자기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되 최소한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가정사가 있으면 또 가족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면 된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내가 정하에게 붙여준 별명은 '어벙이'다. 어벙하기는 하지만 정하는 나름대로의 줏대를 가지고 살아간다. 정하는 천성이 느긋하다 못해 언제나 천하태평이다. 또 정하는 마음이 착하고 여리다. 고집은 센 편이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아량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벙한 정하가 좋다. 제 엄마가 잠자리에 들 때면 어김없이 이부자리를 깔아주는 정하가 나는 좋다. 이제는 나보다 키가 크고 거웃이 거뭇거뭇한 어벙이를 아직도 꼭 껴안아주고 볼을 비벼주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그럴 때면 이 녀석은 "아빠, 이제 저 다 컸어요"하면서 능청을 떤다.

코를 질질 흘리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200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