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는 광주시민군을 학살하고 군부독재정권을 세운 전두환의 쿠데타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때 전두환 군사반란군을 진압하려는 장군이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3개월간의 계엄군 활동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지 얼마 안되어 일어났다.
▲ 천리행군중 공주시 복대동 어느 산기슭에서
1981년 4월초 왼쪽부터 최중국 대위, 필자, 최강룡 중위
ⓒ2002 임종헌
가을로 접어들던 어느날 토요일 외출을 나갔다가 월요일 새벽에 복귀하니 부대안이 발칵 뒤집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지대원인 의무하사관이 탈영을 했다고 동료지대장 정인엽 중위가 전한다. 곧 나는 대대장의 호출을 받았다. 대대장실로 가니 대대장은 내 부하가 전에도 한 번 탈영한 전과가 있다면서 이번에 잡히면 남한산성(군에서는 국군교도소가 남한산성이라는 은어로 통한다)으로 보내겠다고 기세가 등등하다. 그러면서 부하가 탈영한 전과가 있기 때문에 내게는 지휘책임을 묻지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도의적인 책임감으로 괴로와해야만 했다.
토요일 내가 외출을 하기 전이다. 부하가 찾아와서는 애인이 면회를 왔으니 외박을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박순번이 아닌지라 주번사령인 인사참모에게 특별외박을 건의하였더니 안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누차 건의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부하에게 면회실에서 면회라도 하라고 이르고 나는 외출을 나갔다. 그도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였다.
그날 밤 부하는 담을 넘어 탈영을 했다. 그는 계엄군으로 대전에 파견을 나갔을 때 당시 여고 3학년 여학생과 눈이 맞았던 모양이다. 사랑하는 애인이 면회를 왔지만 외박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자 마지막 수단으로 탈영을 선택했던 것이다. 내가 주번사령이라면 특별외박이라도 시켜주었을 텐데.....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에게 애인이 찾아왔는데도 만나서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으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
헌병대의 체포노력에도 부하는 한동안 잡히지 않았다. 유격전을 전문으로 하는 공수특전단요원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나는 차라리 그가 잡히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탈영전과가 있기에 잡히기만하면 중형을 선고받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달 정도 도피생활을 하던 부하가 삼촌의 권유로 자수를 해서 헌병대로 넘겨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탈영을 한 뒤 애인과 함께 계룡산에서 텐트를 치고 숨어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두 달간의 도피생활로 돈이 떨어지자 할 수 없이 그는 삼촌에게 연락을 하여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의 연락을 받은 삼촌은 도리어 그를 설득하여 헌병대에 자수를 시켰다.
부하는 군사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국군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국군교도소는 규율도 엄하고 고생이 심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는 단지 여자를 사랑한 죄 때문에 중형을 선고받고 국군교도소의 죄수가 되고 말았다. 나는 나대로 직속상관으로서 부하의 애로사항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한 일이 있고나서 몇 달 뒤 나는 복무기한을 마치고 제대를 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하를 교도소에 놔둔 채.
그 뒤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아무리 기막힌 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게 마련이다. 살다보면 가끔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부하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는지.
200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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