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10년 동안 길러온 수염을 자르다

林 山 2004. 11. 18. 13:18

아침 일찍 젊은 엄마가 감기에 걸린 다섯 살배기 꼬마애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나를 보더니만 자꾸 꽁무니를 뺀다. 아마 내 빡빡머리와 길게 자란 수염을 보고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간신히 달래고 얼러서 감기를 치료하는 혈자리에 피부침을 붙여 주고 보험약 하루치를 처방했다.

꼬마로 인해 나는 10 여년 동안 길러왔던 수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 수염으로 인해 단 한 사람이라도 불편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 수염을 밀어버리자.' 며칠 뒤 이발소에서 머리는 스포츠형으로 깎고 수염을 미련없이 밀어버렸다. 이발을 마치고 이발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왠지 낯이 설다. 이발소 주인도 내가 10년은 젊어 보인단다. 10 여년을 길러왔던 수염이라 조금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새로운 모습도 괜찮아 보인다.

이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도 깜짝 놀란다. 아내는 마치 연하남하고 사는 기분이 든단다. 아내는 곧장 시골집으로 전화를 걸어 어머니께 내가 수염을 밀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춤이라도 추고 싶다면서 반가와 한다. 어머니는 수염을 기른 채 사회민주화 운동이니 교육민주화 운동이니 하면서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던 나의 모습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셨던 터였다. 모난 돌이 정을 맞기 마련이라, 어머니는 내 수염으로 인해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리라.

한의원에서도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한의원에 출근을 했더니 사무장이나 간호사도 내가 누군지 몰라보는 것이다! 잠시후 사태를 알아차린 직원들이 그제서야 알은 체를 한다. 환자분들 중에서는 원장이 새로 바뀌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수염이 사라진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 우리 원장님이 10년은 젊어지셨네요."
"저렇게 잘 생긴 얼굴을 수염 때문에 못 알아 보았구랴."
"새장가 가도 되겠수."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게다. 하지만 사람은 칭찬에 약한 법, 그런 말들이 듣기 싫지만은 않다. 내가 머리를 밀고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나이 40이 넘어 한의대에 들어갔을 때부터다. 늦은 나이에 한의학을 공부하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머리를 밀고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염을 기르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스님이나 도인이라는 오해를 받은 적도 많다. 아내도 종종 마치 파계한 스님과 살림을 차린 듯 한 착각에 빠진 적이 있다고 한다. 본디 나는 그대로인데 단지 머리를 밀고 수염을 기른 것이 사람을 이토록 다르게 보이게 하다니!

머리를 밀거나 수염을 길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위사람들로부터 자주 오해와 편견의 시선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비웃음이나 비아냥의 대상이 된 적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해와 편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경직된 사회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요즘의 우리 사회를 보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다수자들의 횡포는 가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다. 이래서는 온정이 넘치는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성숙한 사회란 곧 사회적 소수자들을 따뜻하게 감싸안아 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닐까?

수염을 깎는 것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수염을 기른 탓으로 나는 사회적 소수자가 되었었다. 그래서 지금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사회적 '왕따'였기 때문이다.

수염을 밀고나니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내 나이 50 살,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본다. 하지만 나는 내 정신적 나이가 29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칠 때까지 영원한 29세로 살아갈 것이다. 청춘은 아름다운 것!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200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