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할머니와 이승에서의 이별을 준비하며

林 山 2004. 12. 9. 15:33

며칠 전 시골집에 다니러 갔더니 부모님은 외출하시고 할머니만 집에 계셨다. 나를 보자마자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신다. 내가 할머니를 뵐 때마다 제일 먼저 받는 질문이다. 이젠 나도 나이 50이 다 되어가는데도 할머니는 아직도 내가 밥을 굶고 다니는 어린애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오늘따라 할머니의 허리가 더욱 굽어보인다. 말소리에도 힘이 없다. 걸으실 때는 한쪽 발이 땅에 질질 끌린다. 이젠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대로 걸으실 수조차 없다. 하긴 내후년이면 90세를 바라보는 연세인지라 할머니의 육신은 노쇠할 대로 노쇠해진 상태다.

 

▲ 75세 때의 할머니 모습(1988년 5월).

뒤에서 왼쪽은 아들 정하,오른쪽은 딸 선하 

영천 3사관학교에서 학사장교로 입대한 세째 동생 면회 때
ⓒ2002 임종헌

 

할머니와 이승에서의 이별이 그리 머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이승에서의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면서 눈물이 핑 돈다.

할머니는 어린 두 남매를 둔 채 할아버지를 여의고 청상이 되셨다. 할아버지의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아서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조차 모른다. 할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청상으로 어린 두 남매를 키우자니 오죽이나 힘드셨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먹고 살 길을 찾아서 고향인 경북 예천을 떠나 지금의 충주 산척으로 이주하셨다.

그후 아버지는 성장을 해서 어머니와 결혼하여 장남인 나를 비롯, 5남 1녀를 낳았다. 형제들 가운데서도 할머니는 유독 장손자인 나를 귀여워해주셨다. 할머니는 "이 다음에 죽으면 우리 장손주가 내 제삿밥을 차려 주겠지"하고 늘 말씀하셨다.

먹을 것이 생기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부모님이나 형제들 몰래 내 손에 꼭 쥐어주시곤 하였다. 어쩌다가 돈이 생겨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러한 정성이 내 아들 정하에게로 옮겨갔지만….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할머니는 이제껏 문맹으로 살아오셨다.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숫자 계산도 하실 줄 모른다. 그래서 온갖 충격적인 사건이나 사고가 매일같이 일어나는 번잡한 세상을 까맣게 잊고 사신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게 사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행복지수로 본다면 대학에 15년이나 적을 두고 있는 나보다 할머니가 훨씬 더 높을 것이다.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그것도 모자라 다시 6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는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저 한심하다는 생각뿐이다. 학교라고 하는 곳은 밥벌이하는 데나 도움이 될 뿐,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젠 나도 가방끈을 그만 키우려고 생각하고 있다.

할머니가 갑자기 쇠약해지시기 시작한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할머니는 아내를 조용히 한쪽으로 부르시더니 백만원을 쥐어주시고는, "얘야, 내가 죽거든 내 수의를 마련하는 데 쓰거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장손주 며느리에게 수의를 부탁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이제 이승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시는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또 내 가슴 한구석에서 찡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흔 고비를 바라보시는 할머니! 젊어서 청상이 되어 아버지와 고모 남매만을 바라보고 살아오신 할머니! 또 장손자인 나에게로, 증손자인 정하에게로 내리사랑을 주신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시는 모습은 나를 너무나도 안타깝게 한다.

이제 이승에서의 인연도 멀지 않았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할머니에서 아버지로, 아버지로부터 나에게로, 또 나에게서 정하로 이어진 윤회의 한 고리인 나! 그런 할머니와 이승에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연법'을 어찌할 수 없음에 나는 눈물짓는다.

그러나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느니...

 

200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