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나는야 단양중학교 소백산 등반대장

林 山 2004. 12. 13. 12:32


1998년 10월 10일. 이 날은 내가 전교조 활동과 교육민주화 운동으로 충주 산척중학교에서 해직된 지 거의 10년만에 정부의 특별임용조치로 복직이 된 날이다. 충북도교육청은 나를 오지로 보내느라고 단양중학교로 발령을 냈다. 도교육청의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단양중학교에 부임을 하자마자 나는 쾌재를 불렀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단양은 소백산을 비롯한 명산들로 둘러싸인 산악지대가 아닌가! 산을 좋아하는 나에게 단양은 바로 나를 위한 곳이었던 것이다. 충주에서 차로 1시간이면 통근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아예 단양에서 생활을 하기로 하였다. 단양군 교육청에서 내준 상진리 원룸식 사택에 들어가던 날 나는 매일 소백산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당시 나는 세명대학교 한의대 본과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교육청으로부터 복직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이미 교직을 떠나서 한의사로서의 새로운 인생길을 가기로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내도 어차피 교직을 떠날 것이라면 복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장남의 해직으로 마음고생이 많았을 부모님은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이참에 교직에 복귀해서 정년퇴직까지 하라고 성화였다.

가까운 친구들과 전교조 충북지부 동지들에게 이런 사정을 전하자 1년간만 복직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동안 전교조가 벌여온 복직투쟁으로 해직교사들의 복직조처를 얻어냈는데, 나홀로 복직을 하지 않는다면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면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1년간만 복직을 하기로 하고 다니던 대학에 휴학원을 제출하였다.

나는 내 인생에서 마지막 교직생활이 될지도 모를 1년간을 아이들을 위해서 진정한 의미의 참교육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10여년 전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교육자의 길을 보람차면서도 뜻깊게 마무리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나는 참으로 형편없는 선생이었다. 그래서 단양중학교에 부임했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빛을 줄 수 있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내가 부임하면서 단양중학교에는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월요일 조회시간에 삭발한 머리에 개량한복차림으로 부임인사를 하러 조회단에 오르자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의 모습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나같은 모습의 선생을 아마도 생전 처음 보았을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주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이 때 한 뼘이나 자랐던 수염은 잘랐다. 도교육청 장학사가 수염을 깎아야지만 발령장을 주겠다고 억지를 부려서 잘랐던 것이다. 그 사람도 참 어리석은 사람이지 수염이야 가만히 놔두어도 또 자라는 것이 아닌가! 수염은 물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법이어서 곧 원상복구가 되었다. 나의 이런 모습은 동료 교직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단양읍내에는 단양중학교에 스님선생님이 왔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갔다.

 ▲ 단양중학교 체육대회날 운동장에서(1999.5.21).

왼쪽부터 윤경화,김경옥 선생님,필자순.

날씨가 점차 추워지고 난로를 피우는 계절이 다가왔다. 본관 뒤에는 과학선생님들이 사용하는 교무실이 따로 있었다. 나는 매일 난로에 쌍화탕을 달여서 선생님들이 쉬는 시간에 마실 수 있도록 하였다. 교무실에는 항상 쌍화차를 달이느라 향기로운 한약냄새가 감돌았다. 한약중에서도 쌍화탕은 맛과 향이 가장 좋은 편에 속한다. 딸을 시집보낼 때 장모님이 사위에게 해주는 보약이 바로 이 쌍화탕이다.

쌍화탕을 달이기 시작하면서 많은 선생님들이 본관 교무실보다는 과학과 교무실에 들러 한방차를 들면서 대화를 나누고는 하였다. 나중에는 단양교육청에까지 소문이 나서 장학사님들도 한방차를 맛보러 왔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과학과 교무실은 언제나 정다운 대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교무실로 변모되었다. 어찌보면 별것도 아닌 것같은 쌍화탕이 교무실에 이런 변화를 몰고 왔던 것이다.

한방차를 마신 선생님들은 자발적으로 모금함에 백원짜리 동전을 하나씩 넣었다. 그렇게 모은 것이 어느덧 수만원이 쌓였다. 마침 그 때는 천주교를 중심으로 굶주린 북녘동포에게 쌀을 보내자는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서슴없이 그 돈을 북녘동포를 위한 쌀보내기 운동에 보태라고 단양천주교회 신부님에게 보냈다.

날씨가 추워지면 아이들은 곧잘 몸살감기에 걸리기 마련이다. 감기에 걸린 아이들이 조퇴를 하러 교무실로 찾아오면 나는 침으로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 또 도시락을 급하게 먹느라 체한 아이들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복통을 호소하다가도 내가 침을 놓아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굴을 펴고 돌아가고는 했다. 학생들의 조퇴율이 뚝 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어느덧 단양중학교 양호교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침을 맞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조금만 몸이 아파도 제발로 찾아와서 침을 놓아달라고 하였다.

언젠가 2학년 남학생 체육시간이었다. 한 아이가 자라목을 해가지고 침을 맞으러 왔다. 축구를 하다가 머리받기를 한다는 것이 그만 골문을 들이받아 목을 돌리지도 숙이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소양 삼초경의 중저혈에 침을 놓고 목을 돌려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목이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단양군 교육청 관내 양호교사들로부터 침술강좌를 열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단양고등학교 교무실을 빌려 양호교사를 대상으로 임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들에 대한 침구치료 강좌를 열었다. 양호교사들에게 한의학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연구하고 준비해서 침술치료 강의를 했던 기억이 난다.

 

▲ 단양중학교 수학여행 때 담임을 맡았던 2학년2반 아이들과 함께.

 속초해수욕장에서 찍은 전체사진(1999.5.25). 뒷줄 맨 왼쪽이 필자.


이듬해 새학기가 되자 나는 2학년 2반 담임을 맡았다. 또 특별활동에서는 산악부를 새로 만들어 지도교사가 되었다. 나는 틈나는대로 아이들과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수업이 끝나면 학교 바로 뒤에 있는 대성산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종례를 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코피를 흘리는 아이도 생겨났다. 그러나 횟수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의 체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성산 정상에서 소백산 비로봉을 향해 앉아 명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의 가슴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연지기가 자라나고 있었다. 아이들의 태도도 매우 의젓해졌다. 아이들의 마음자세도 매우 긍정적으로 변해갔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단양에 있는 여러 산들을 함께 오르내리다가 '선생님, 공부보다 쉬운 것이 없네요'라고 말하는 녀석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니까. 나도 아이들도 어느덧 소백산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산악부 아이들과는 소백산 야간등반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히 엄두도 못내던 아이들이 비로봉을 한 번 다녀오자 단양중학교에는 새로운 신화가 탄생했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소백산 야간등반을 시도조차 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막강 단양중학교 산악부가 해낸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학부모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자기네 아이도 한 번만 야간산행에 꼭 데려가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와 함께 소백산을 오르던 아이들이 성적도 올라가고 태도도 의젓해지는 것을 보고들은 학부모들이 자녀교육차원에서 이런 부탁을 해온 것이다.

나는 신바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소백산 골짜기와 능선들을 누비고 다녔다. 그것도 한밤중에. 나는 명실공히 단양중학교 소백산 등반대장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얻었다.

동료 교직원들과도 소백산을 비롯해서 근처에 있는 여러 산들을 오르내렸다. 단양중학교에는 그야말로 산바람이 불었다. 여름방학에는 3박4일간에 걸쳐 산악부원,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일곱명이 지리산을 종주한 적도 있다. 내가 퇴직한 후에도 끈끈한 정은 이어져, 동료였던 선생님들의 초청으로 설악산 공룡능선을 등반하기도 하였다.

시간은 흘러 1999년 9월 1일, 다니던 대학에 돌아가기 위해서 나는 퇴직을 하였다.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학부모들은 하나같이 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섭섭해하였다. 내가 담임을 맡았던 2학년 2반 자모들은 성대한 송별연까지 열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단양중학교를 떠나왔다. 단양중학교에서의 마지막 1년간의 교직생활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 후회없는 교직생활이었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을 아이들이 그리워진다.

 

2002.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