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에 역사관(松江歷史觀) 건물에 있는 찻집 킷사 키하루(喫茶きはる)를 나와 바로 앞에 있는 마쓰에 성(松江城) 텐슈가쿠(天守閣, 천수각)를 보러 가기로 했다. 마쓰에 성은 시마네 현(島根県) 마쓰에 시(松江市) 북부 토노마치(殿町)에 있다. 마쓰에 성은 '명탐정 코난(名探偵コナン)' 255화에도 자주 나왔던 곳이라서 코난 매니아들에게는 낯익은 곳일 수도 있다.
1611년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가 5년에 걸쳐 지은 마쓰에 성은 남쪽으로 흐르는 오하시가와(大橋川)를 바깥쪽 해자로 한 평산성(平山城)이다.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3~1867) 이전에 지어진 텐슈가쿠(天守閣, 천수각)가 있는 성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에는 한때 2만여 개의 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약 200여 개의 성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텐슈가쿠는 현재 일본 전국에 12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마쓰에 성 텐슈가쿠는 건축 당시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특히 그 의의가 크다.
죠잔우치 호리카와(城山內堀川)를 건너 마쓰에 성으로 통하는 키타소몬바시(北惣門橋)
마쓰에 역사관 바로 앞 호리카와(堀川)에 놓여 있는 키타소몬바시(北惣門橋)를 건너면 바로 마쓰에 성 니노마루 시타노단(二の丸下の段)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쓰에 성 북동쪽으로 통하는 키타소몬바시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호리카와는 키타소몬바시를 지나 마쓰에 성 북쪽을 흐르는 키타다가와(北田川)와 만나게 된다. 오테마에히로바(大手前廣場) 승선장에서 키타다가와까지를 죠잔우치 호리카와(城山內堀川)라고 한다. 마쓰에 성으로 통하는 다리는 키타소몬바시 외에도 북서쪽의 이나리바시(稲荷橋), 서쪽의 가메다바시(亀田橋), 남쪽의 지도리바시(千鳥橋)가 있다.
키타소몬바시(北惣門橋)에서 바라본 죠잔우치 호리카와(城山內堀川)
호리카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쓰에 성의 바깥 주변을 빙 돌아 파놓은 수로이다. 옛날 이 수로는 물자의 수송과 사람들의 왕래, 생활용수 등으로 이용됐지만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유람선 코스로 인기가 높다. 유람선을 타고 호리카와를 따라 한바퀴 돌면서 마쓰에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마쓰에 성 제1문
니노마루 시타노단은 쌀 창고가 있던 드넓은 광장이다. 니노마루 시타노단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내려오면 매점과 관광안내소가 있다. 마쓰에 성 정문이었던 오테몬(大手門) 터를 지나면 제3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 초입 오른쪽에는 일본에 귀화한 19세기의 작가이자 교육자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래프캐디어 헌(Lafcadio Hearn, 1850~1904)의 집터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래프캐디어 헌은 고이즈미 아쿠모(小泉八雲)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이곳에 살면서 일본의 문화와 문학을 서구에 소개했다. 다이코야구라(大鼓櫓) 성벽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제3문터가 나타나고, 곧 제2문터에 이른다.
매표소는 텐슈가쿠의 정문격인 제1문에 있다. 입장료는 330엔이다. 외국인 할인을 받으려면 여권을 꼭 가져가야 한다. 제1문을 지나면 혼마루(本丸)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혼마루는 성의 중핵 구역의 구루와(曲輪) 명칭이다. 이치노쿠루와(一の曲輪), 혼쿠루와(本曲輪)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부터 센고쿠 시대(戰國時代, 1467~1590)에 걸쳐 마쓰에 지역에는 스에쓰구 성(末次城)이 있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 1568~1603)인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이끄는 동군(東軍) 10만 명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서군(西軍) 8만 명이 도요토미(豊臣) 정권의 주도권을 놓고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싸운 전투, 일명 '천하를 판가름한 전투'로 일컬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 산츄로(三中老) 중 한 사람인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 호리오 다다우지(堀尾忠氏) 부자는 이즈모 국(出雲国)과 오키 국(隱岐国)의 번주(藩主)로 갓산토다 성(月山富田城, 月山城)에 입성했다. 그러나, 갓산토다 성은 중세의 산성이어서 성하 마을을 조성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와 호리오 요시하루는 산과 호수를 끼고 있는 스에쓰구 성터를 새로운 축성지로 선정하고, 1607년 스에쓰구 성이 있던 가메다 산(龜田山)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5년만인 1611년 겨울 마침내 마쓰에 성을 완성했다. 이렇게 해서 마쓰에 번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호리오 요시하루는 그해 7월 완공을 앞두고 급사하고, 1633년에는 3대 호리오 타다하루(堀尾忠晴)마저 후사가 없이 죽자 호리오(堀尾) 가문은 단절되었다. 이로써 호리오 가문의 마쓰에 통치도 끝나고 말았다.
호리오 가문이 단절되자 이를 대신해 1634년 교고쿠 다다타카(京極忠高)가 에치젠 국(越前国)의 오바마 번(小浜藩)에서 이즈모 국과 오키 국에 입봉되어 마쓰에 번주가 되었다. 이 무렵 마쓰에 성의 산노마루(三の丸)를 개축했다. 1637년 교고쿠 다다타카가 후사가 없이 죽어 교고쿠(京極) 가문도 단절되었다. 이에 1638년 시나노 국(信濃国) 마쓰모토 번(松本藩)에서 마쓰다이라 나오마사(松平直政)가 마쓰에 번주로 입성했다. 마쓰다이라 나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의 3남이다. 그러니까 마쓰다이라 나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자 겸 인질로 간 유키 히데야스에게는 에치젠(越前) 성이 주어졌다. 이후 그는 에치젠 히데야스(越前秀康)라 불렸다. 마쓰다이라 나오마사가 마쓰에 번주가 된 후 1871년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까지 에치젠 마쓰다이라(越前松平家) 가문은 10대에 걸쳐 이 지역을 통치했다. 에도 시대 마쓰에 성은 시마네 현 동부 이즈모 지방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마쓰에 번의 정청(政廳)이었다.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가 쓴 '괴담(怪談)'에 마쓰에 성 텐슈가쿠에 얽힌 민담 '산 제물이 된 딸아이'가 실려 있다. 마쓰에 성을 세우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텐슈가쿠를 세우기 위해 석벽을 쌓을 때마다 계속 무너져내리자 일꾼들은 신에게 산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일꾼들은 백중맞이 춤인 본오도리(盆踊り)를 열어서 가장 예쁘고, 춤을 잘 추는 여자아이를 산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본오도리에서 희생물로 선택된 여자아이는 일꾼들에게 끌려가 산 채로 묻혔다. 희생 제물을 바쳤기 때문인지 석벽 공사는 별 탈 없이 완성되었지만, 성주 부자는 영문도 모르게 갑자기 죽어 가문이 끊어졌다. 사람들은 이를 희생자의 저주로 여겼기 때문에 마쓰에 성의 텐슈가쿠는 방치되고 있었다. 마쓰다이라 가문이 입성하고 나서는 텐슈가쿠가 흔들리면서 소녀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후 본오도리를 추지 않았다고 한다.
남서쪽에서 바라본 텐슈가쿠
마쓰에 성은 원래 혼마루, 니노마루, 키타노마루(北の丸), 텐슈가쿠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텐슈가쿠만 남아 있다. 마쓰에 성 텐슈가쿠는 지하 1층, 지상 5층의 복합식 망루형 건물이다. 면적은 447.23㎡, 높이는 약 30m(건물 22.43m+석축 7.57m)이며, 외관상 5층이지만 내부는 6층이다. 마쓰에 성 텐슈가쿠는 면적으로는 일본 내 2위, 높이로는 3위, 역사로는 4위에 올라 있다. 군사적인 요새, 망루 기능을 했던 마쓰에 성 텐슈가쿠는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남동쪽에서 바라본 텐슈가쿠
1871년 메이지 정부가 지방의 호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폐번치현(廢藩置縣) 정책으로 마쓰에 번이 폐번되고, 1873년에는 폐성령(廢城令)이 반포되면서 마쓰에 성의 모든 건물은 철거되거나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마쓰에 성 텐슈가쿠도 1875년에 매각되어 해체될 위기에 처했으나 마쓰에의 지주와 무사 등 유지들의 노력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산인(山陰) 지방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쓰에 성 텐슈가쿠는 1950년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는 일본 100대 명성(名城) 중 64번째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2012년에는 마쓰에 신사에서 텐슈가쿠 창건 연대가 게이초(慶長, 1596~1615) 16년(1611)임을 밝히는 자료를 찾아냈다. 2015년 7월 텐슈가쿠는 마침내 일본 국보 제23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성 주변은 죠잔 공원(城山公園)으로 지정되어 있다.
메이지 정부의 폐성령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폐성령에 따라 전주부성(全州府城)은 풍남문(豊南門)만 남기고 철거되었으며, 충주읍성(忠州邑城)은 관청 건물인 청령헌(淸寧軒)과 제금당(製錦堂)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쪽에서 바라본 텐슈가쿠
마쓰에 성은 1960년 마쓰에 성의 혼마루 이치노몬(一ノ門)과 미나미다몬 일부를 복원했다. 1994년에는 산노마루와 니노마루를 연결한 지도리바시와 니노마루 하단의 키타소몬바시를 복원하였다. 2000년에는 성루인 미나미야구라(南櫓)와 성벽 40m를 복원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니노마루 나카야구라(中櫓), 다이코야구라(太鼓櫓)와 성벽 87m를 복원했다.
마츠에 성 텐슈가쿠는 자연석으로 석축을 높게 쌓아올린 다음 옻칠을 한 검고 두꺼운 판자를 덧붙인 미늘판(louver board) 벽을 만들었다. 텐슈가쿠 입구에는 방어를 위해 망루를 덧붙였다. 각층에는 사방에 감시용 창문을 내고, 3층에는 박공(牔栱)을 설치했다. 지붕의 용마루 양쪽에는 샤치호코(旧鯱)로 장식했다. 현재 지붕 위에 있는 샤치호코는 복제품이고, 원본은 텐슈가쿠 안에 전시되어 있다. 텐슈가쿠의 지붕은 물떼새가 날개를 펼친 형상이라고 해서 치도리성(千鳥城)이라고도 불린다.
텐슈가쿠 내부의 나무 계단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올라가면 1층에 이르게 된다. 폭이 약 1.6m 정도의 계단은 5층까지 네 개가 있다. 계단은 상당히 가파르고 좁다는 느낌을 준다. 텐슈가쿠 내부 건축 자재는 주로 오동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오동나무는 연하면서도 가볍고, 또 잘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습기나 화재에도 비교적 강하여 일본의 기후 환경에 아주 적합한 건축 자재이다. 일부 기둥은 쪼갠 나무 여러 개를 철물로 묶은 것이 특징이다. 이런 구조의 기둥은 통나무 기둥보다 역학적인 측면에서 효율성이 뛰어나 하중(荷重)에 강하다고 한다.
텐슈가쿠 내부의 나무 계단
각층에는 갑옷과 투구, 마구, 활, 칼, 북, 악기, 그림 등 마쓰다이라 가문에서 사용하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마쓰에 성과 텐슈가쿠의 모형, 마쓰에 초대 번주 호리오 요시하루 부부를 그린 그림도 볼 수 있다. 또, 일본 전국의 텐슈가쿠를 담은 사진도 걸려 있다.
투석구(投石口)와 총안(銃眼)
2층 벽 곳곳에는 투석구(投石口)와 총안(銃眼)이 뚫려 있다. 투석구와 총안은 텐슈가쿠에 적이 접근하면 투석 장치를 이용해서 짱돌을 날려보내거나 철포(鐵砲)-조총(鳥銃)을 발사해서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16세기에 포르투갈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철포는 하늘을 나는 새를 쏘아 맞혀서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해서 조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우물
텐슈가쿠 2층에는 뜻밖에도 깊이 24m의 우물이 있다.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텐슈가쿠 내부에 있는 우물이다. 적에 의해 텐슈가쿠가 포위됐을 때를 대비한 시설이다. 전쟁에 대비해서 판 우물이지만 정작 마쓰에 성은 한번도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 텐슈가쿠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우물 입구에는 사람이 빠지는 불상사를 대비해서 철망을 쳐놓았다. 부모와 함께 온 일본 어린이가 우물 안으로 동전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우물에 동전을 던지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는 것일까! 우물 바로 오른쪽에는 전쟁에 대비한 소금창고가 있었다.
구 샤치호코(旧鯱)
우물 바로 왼쪽에는 일본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구 샤치호코가 전시되어 있다. 높이는 2m가 넘는다. 샤치호코의 몸은 물고기이고, 머리는 호랑이, 꼬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배와 등에는 날카로운 돌기가 나와 있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보통 성의 지붕에 기와나 나무, 돌 등으로 만들어 금박을 입힌 긴샤치호코(金鯱)로 장식한다. 일본에서는 나고야 성(名古屋城)의 긴샤치호코가 가장 유명하다. 나고야 성 텐슈가쿠를 복원할 때 샤치호코 한 쌍에 88kg의 금이 사용됐다고 한다. 긴샤치호코는 나고야의 상징 중 하나다.
샤치호코는 원래 치미와 같이 지붕 양단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귀면(鬼面) 기와와 비슷하게 건물의 수호신이란 의미가 있다. 또,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물을 뿜어 불을 끈다는 믿음이 있다. 샤치호코는 화재를 막아주는 액막이이기 때문에 일본 전국의 모든 텐슈가쿠에서 볼 수 있다. 마쓰에 성 위에 달려 있는 샤치호코는 1955년에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마쓰에 성 텐슈가쿠 주요 유물에는 한글 안내판이 있어서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인들도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다.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의 갑옷과 투구
위층으로 올라가면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의 갑옷과 투구, 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장식이 화려한 것을 보면 이 갑옷의 주인이 최고의 지위에 있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은 도쿠가와 씨의 분가인 고카몬(皇嘉門)중 한 가문이다. 에치젠 가(越前家)로도 불린다. 고카몬은 에도 시대 신판 다이묘(親藩大名)의 일족(도쿠가와 장군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남계 자손을 시조로 한 번의 다이묘(大名)들이 이에 속한다. 특히 도쿠가와 씨(徳川氏)를 칭하는 고산케(御三家), 고산쿄(御三卿)의 당주는 쇼군 가문의 대가 끊겼을 때 그 뒤를 잇는 역할도 하였다. 그 외의 집안은 마쓰다이라 씨(松平氏)를 칭하였다. 이들 신판 다이묘들의 영지는 에도(江戶)나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등 요충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마쓰다이라 가문의 시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아명은 於義丸(오기마루)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시절 히데(秀)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후에 유키 씨(結城氏) 당주 유키 하루토모(結城晴朝)의 양자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도쿠가와 종가의 대가 끊겼을 때 에치젠 가는 고산케에 밀려 쇼군 경합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에치젠 가의 유명한 인물로는 후마이류(不昧流) 창시자 마쓰다이라 하루사토(松平治郷), 막말 사현후(幕末の四賢侯)로 유명한 마쓰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 등이 있다.
이즈모 마쓰에 번 제6대 번주 마쓰다이라 무네노부(松平宗衍)의 차남인 마쓰다이라 하루사토는 아버지에 이어 제7대 번주를 지낸 인물인데, 그의 호가 후마이(不昧)다. 그래서 마쓰다이라 하루사토를 마쓰다이라 후마이(松平不昧)라고도 한다. 그는 나오마사계 에치젠 마쓰다이라 종가(直政系越前松平家宗家) 제7대 당주이자 에도 시대의 대표적인 다인(茶人)이다. 후마이류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철포
마쓰다이라 가문의 갑옷과 투구 전시대 바로 앞에는 철포(조총)가 전시되어 있다. 철포는 심지(火繩)에 불을 놓고 방아쇠를 당겨 화약통에 불이 붙으면 그 충격으로 총알이 튀어 나가게 만든 화승총(火繩銃)이다.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조총을 활용한 이후 창검 위주의 전투 방식에서 조총 위주의 전투 방식으로 바꼈다. 조일전쟁(朝日戰爭, 1592~1598) 당시 조선군이 일본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바로 이 조총 때문이었다.
전시물 중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의 부채도 있다. 이 부채는 마쓰에 번 초대 번주인 마쓰다이라 나오마사가 오사카 전투(大坂の陣) 중에 받은 것이다. 오사카 전투(1614~1615)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전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 마쓰다이라 나오마사를 양자 겸 인질로 잡아두었지만 멸망을 면치 못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던 대형 북
에도 시대 마쓰에 성에서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던 대형 북도 전시되어 있다. 옛날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북이나 종을 이용해서 시간을 알렸다. 해마다 10월 마쓰에 성에서는 큰북 축제가 열린다. 전야제 때는 마쓰에 성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서 큰북 행렬을 볼 수 있다. 축제에 참여하면 직접 북을 두드려 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텐슈가쿠에는 신도(神道)의 추수신을 기리는 볏짚으로 만든 거대한 밧줄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텐슈가쿠 안 전체를 살펴보았지만 그 밧줄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텐슈가쿠 전망대 남쪽에서 바라본 마쓰에 시가지와 신지 호 풍경
텐슈가쿠 맨 꼭대기 5층은 망루다. 사방에 큰 창문이 달려 있어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 어느 쪽 창문에서도 마쓰에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남쪽 전망이 가장 좋은데, 마쓰에 시가지는 물론 그 너머로 신지 호(宍道湖)까지 바라보인다.
신지 호 동쪽 끝 소데시가우라(袖師ケ浦)에는 작은 섬 요메가시마(嫁ヶ島, 며느리 섬)가 떠 있다. 요메가시마는 지정학적으로 마쓰에 시 소데시 초(袖師町)를 지나는 국도 9호선에서 호수 안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신지 호 유일의 섬인 요메가시마의 길이는 약 110m, 폭은 약 30m이다.
요메가시마에는 불쌍한 며느리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받는 불쌍한 며느리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돌아가려고 집을 나섰다. 며느리는 지름길로 가기 위해 추위에 떨면서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건너가고 있었다. 친정에 빨리 가려고 급한 나머지 며느리는 호수의 얼음이 녹아서 얇아진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걸었다. 그때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며느리는 깊은 신지 호에 빠져 죽고 말았다. 신지 호에 사는 신은 이 광경을 보고 며느리를 불쌍히 여겼다. 신은 마쓰에 성 아래 등불이 보이는 곳에 작은 섬을 만들어 며느리의 시신과 함께 떠오르게 했다고 전해진다.
텐슈가쿠 전망대 서쪽에서 바라본 마쓰에 시가지 풍경
서쪽 마쓰에 시가지 뒤에 야산만 없다면 드넓은 신지 호가 바라보일 텐데, 조금은 아쉽다. 신지 호는 시마네 현 동북부의 마쓰에 시, 이즈모 시(出雲市)에 걸쳐 있다. 마쓰에 성 남쪽의 오하시가와(大橋川)를 통해서 시마네 현과 돗토리 현(鳥取県)의 경계에 있는 나카우미 호(中海湖)와 연결된다. 신지 호는 일본에서 7번째로 큰 호수이며, 시마네 현내에서는 나카우미 호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동서는 약 17km, 남북은 약 6km, 둘레 47km에 이른다. 나카우미 호와 함께 람사르 협약(the Ramsar Convention)에 등록되었다.
텐슈가쿠 전망대 동쪽에서 바라본 마쓰에 풍경
동쪽 전망대에서는 마쓰에 성 북쪽으로 흐르는 키타다가와(北田川)와 마쓰에 역사관이 보인다. 마쓰에 시가지 뒤편에는 라쿠잔(樂山) 공원이 있고, 그 뒤로 와쿠라산(和久羅山)과 수세(嵩山)가 솟아 있다. 날씨가 좋으면 남동쪽으로 다이센(大山, 1,710m)도 보인다고 한다.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서 다이센은 보이지 않는다.
텐슈가쿠 전망대 북쪽에서 바라본 마쓰에 풍경
마쓰에 성 북쪽은 산봉우리들이 올망졸망 솟아 있는 산악지대다. 하쿠로쿠산(白鹿山) 뒤로 토리코산(鳥子山)이 솟아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미타케산(御岳山)이 솟아 있다. 텐슈가쿠 전망대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마쓰에가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쓰에 성 텐슈가쿠 앞에서 필자
텐슈가쿠 내부를 돌아보고 밖으로 나와 지붕을 다시 한 번 바라보니 용마루 양쪽 끝에 치미(鴟尾)처럼 올린 샤치호코가 눈에 들어왔다. 불이 났을 때 물을 뿜어 불을 꺼준다는 수호신 샤치호코가 저 꼭대기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텐슈가쿠에 감히 화마가 범접하지는 못 하리라.
텐슈가쿠 남쪽에 자리잡은 마쓰에 신사
마쓰에 성 제2문터 남쪽 바로 아래에는 마쓰에 신사(松江神社)가 있다. 마쓰에 신사는 1931년 마쓰에 번 중흥의 명주(明主)로 추앙된 7대 번주 마쓰다이라 하루사토와 마쓰에 관청 개설 시조이자 마쓰에 성을 건설한 호리오 요시하루의 신령을 배사(配祀)하고 있다.
텐슈가쿠 북쪽에는 마쓰에 고고쿠 신사(松江護國神社)와 조잔 이나리 신사(城山稻荷神社)가 있다. 마쓰에 고고쿠 신사는 이즈모 국과 오키 국 출신 2만2천 명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신사는 1939년 3월 마쓰에 초혼사(招魂社)로 창건했지만 같은 해 4월 마쓰에 고고쿠 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마네 현 하마다 시(浜田市)의 하마다 고고쿠 신사(浜田護國神社)도 마쓰에 고고쿠 신사와 같은 성격의 신사다.
마쓰에 고고쿠 신사는 1945년 8월 마쓰에 소요 사건(松江騒擾事件, 마쓰에소조지켄) 주동자들이 봉기 전 집결한 곳이기도 하다. 1945년 8월 24일 시마네 현의 현청 소재지 마쓰에 시에서 일본 제국 황국의용군(皇国義勇軍) 수십 명이 무장 봉기하여 현내 주요 시설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1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의 항복에 반대하여 일어난 여러 소요 사건 중 하나다. 일본 제국 시대에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동요가 목적인 마지막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조잔 이나리 신사는 이나리(稻荷)를 모시는 신사다. 이나리는 쌀농사를 보호하는 신이자 번영의 신으로서 특히 직인(職人, journeyman)과 상인 계층이 숭배하는 신이다. 대장장이의 수호신, 기녀나 광대와 연관된 신이기도 하다. 신도 전설에 따르면 이나리는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須佐之男)의 아들 우카노미타마노카미(宇迦之御魂神)와 동일시된다. 어떤 신사에서는 식량의 여신인 우케모치노카미(保食神)와 연관되기도 한다.
이나리는 상당히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때로는 하얀 여우를 타고 있는 수염 기른 남자, 때로는 볏단을 들고 긴 머리를 멋지게 늘어뜨린 여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비심과 사악함 모두를 상징하는 여우는 때로는 이나리의 사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나리를 모시는 신사의 안팎에는 여우상이 많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나리 신사는 자주색 건물, 길게 이어진 도리이(鳥居, 기둥문), 호슈노타마(寶珠の玉, 여의주) 등이 특징이다. 일본 전역의 이나리 신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교토(京都) 근교에 있는 후시미 이나리 신사(伏見稻荷神社)이다.
마쓰에 신사 바로 남쪽에 자리잡은 코운가쿠(興雲閣)
마쓰에 신사 바로 남쪽 곁에는 엷은 하늘색 건물 코운가쿠(興雲閣)가 있다. 코운가쿠는 1936년에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별궁으로 지은 건물 중 영빈관이다. 코운가쿠는 서양식 목조 주택에 일본식 양식을 결합하여 축조한 건물이다.
오테몬(大手門)과 다이코야구라(大鼓櫓)
마쓰에 성 정문격인 오테몬(大手門) 앞 광장인 오테마에히로바(大手前廣場)로 나오면 높다란 성벽과 그 위에 세워진 다이코야구라(大鼓櫓)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다이코야구라는 말 그대로 시간을 알리기 위한 북을 수납하는 곳이다.
마쓰에 성 해자인 죠잔우치 호리카와(城山內堀川)
마쓰에 성 남쪽의 미나미야구라(南櫓)
남쪽 해자와 동쪽 해자 경계 지점에 오테키도몬(大手木戸門) 터가 있다. 키도몬(木戸門)은 2개의 기둥에 지붕과 가로대를 올린 문이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마쓰에 성 남쪽 성벽 위로 미나미야구라(南櫓)가 바라보인다.
오테키도몬(大手木戸門) 앞에 세워진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 동상
오테키도몬 터와 오테마에 주차장(大手前駐車場) 사이에는 마쓰에 성을 건설한 호리오 요시하루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장검을 빼서 치켜들고, 단검은 차고 있는 형상이다. 일본 사무라이의 장검은 적을 죽이는 용도, 단검은 밤에 잘 때 신변보호용 또는 자결용이다.
마쓰에 성 텐슈가쿠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사방에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전세버스를 타고 시마네 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타마쓰쿠리 온천(玉造温泉)에 있는 '마쓰노유(松乃湯)'로 향했다.
2018.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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