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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32) 일본 군국주의자 왜곡, 무궁화와 우리 역사 폄훼 - 조현래

林 山 2020. 10. 31. 12:45

때아닌 무궁화(無窮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徽章)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강효백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조현래(필명)는 강효백의 주장에 대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강효백만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56년 당시 일간지에 화훼연구가 조동화와 식물학자 이민재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도 사회 일각에서 애국가와 국화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애국가는 작곡자가 친일파이고, 가사도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국화도 무궁화가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조현래-강효백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林 山>

 

​<사진1> 무궁화(경기도 안산)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32) 일본군국주의자 왜곡, 무궁화와 우리 역사 폄훼

 

 

[두 얼굴의 무궁화] 야마가타 아리토모는…(중략)…메이지유신 이후 1869년 3월 야마가타는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를 만나 그로부터 군국주의, 팽창주의를 배웠다. 1870년 8월 귀국 후 병부소보(兵符小補, 국방차관보)에 임명된 야마카타는 고향의 아사히촌에 만발한 소우탄 무궁화를 본딴 16줄 욱일기를 제작하여 1874년 1월 일본제국 통합육군기로 공식 사용하게 하였다. *미주 176) (p.223)

*미주176) (p.146) 庄司潤一郞, "自衛艦旗をめぐる議論に関する一考察", 防衛省防衛硏究所, 2018, 2쪽(p.409)

 

 

 

[두 얼굴의 무궁화] 야마카타는 전임자 히로부미와 함께 청일전쟁의 승전 전리품으로 대만을 할양받음과 동시에 조선의 통치권을 획득하고 조선의 체제를 일본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갑오경장을 주도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일본식 제도와 풍습, 문화와 문물, 언어와 문자가 쓰나미처럼 한반도에 밀려 들어왔는데 무궁화도 그중 하나이다.(p.224)

 

 

《fact check(1)》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2018년 일본방위성 논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는 조슈한(藩)의 최하위 무사계급 가문 출신으로 일본 제국 육군 원수이자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최초의 총리를 역임했으며, 일찍이 일본의 근대적 군사제도와 정치 토대를 마련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1869년 2월 유럽 유학의 허가를 받아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 ·오스트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및 미국을 순유하고 1870년 8월 2일 요코하마항(横浜港)에 도착하였으며 1870년 8월 26월 일본 병부성의 병부소보(兵部小補)에 임명되어 일본 군국주의의 중추가 되는 근대식 군대를 만드는 작업을 한 것은 맞다[伊藤之雄, 『山県有朋-愚直な権力者の生涯』, 文藝春秋(2009), p.79~84 참조].

▶2018년 일본방위성 논문은?

​-일본방위성 소속 방위성연구소가 2018년 11월 13일 연구간사 쇼지 쥰이치로(庄司潤一郎)의 명의로 발표한 「자위함기를 둘러싼 논의에 관한 일고찰」(自衛艦旗をめぐる議論に関する一考察)이라는 논문(이하 "일본방위성 논문")은 2018년 10월에 있었던 '제주 국제관함식 자위대 욱일기 논란'에 대해 일본 해군의 선함에 게양하는 욱일기가 전범기가 아니라는 취지의 변명을 기술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일본 방위연구소의 누리집에 게재되어 있고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일본 방위연구소 http://www.nids.mod.go.jp/what_old/2018-10.html 참조).

<참고> '제주 국제관함식 자위대 욱일기 논란'이란 제주 서귀포시에 위치한 제주기지전대에서 2018년 10월 10일부터 5일에 걸쳐 개최된 국제 관함식에 참가하는 다국적 해군 함선 중 일본 해상자위대의 함선이 해상자위대기(海上自衛隊の旗)를 게양하는 것에 대하여 대한민국 해군 측에서 욱일기 문양은 국민 정서상 용납될 수 없으므로 일본 자위대를 포함한 외국 군함에 군기 대신 자국의 국기를 게양하도록 요청했다. 이에 일본 외무성이 반발하며 시작된 논란이다.

 《fact check(2)》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무궁화를 본떠 욱일기를 만들었다고?!-전혀 사실이 아니다.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일본방위성의 논문을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인용논문)로 사용하는 이유는?

 

-저자가 '제주 국제관함식 자위대 욱일기 논란'에 대해 일본방위성의 주장을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인용논문)로 굳이 일본 해군함의 욱일기 사용을 변명하는 일본방위성 논문을 제시하는 이유를 정상적인 한국인의 상식적 판단으로서는 알기 어렵다.

-말로는 반일을 외치지만 실질은 친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천양무궁(天壤無窮)한 의심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으며, 설마하고 고개가 갸웃거리지지만 별도로 언급이 없으니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무궁화를 본떠 욱일기를 만들었다고?

 

-일본방위성 논문에는 눈을 씻고 보고 또 보아도 심지어 PDF의 검색 기능을 사용하여 아무리 살펴 보아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무궁화(ムクゲ), 무궁화 소우탄(ムクゲ '宗旦')이라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을 없게 한다. 

 

▶일본방위성 논문에는 욱일기가 1870년 4월 17일에 최초 사용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논문을 읽어야 한다는 자체가 괴롭고 괴로운 일이지만,『두 얼굴의 무궁화』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인용하고 있으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인용한 일본방위성 논문 p.2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두 얼굴의 무궁화』가 인용한 일본방위성 논문 p.2에 따르면 욱일기는 1870년 4월 17일에 있었던 메이지유신의 주력이었던 4개 번의 군사 조련식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1869년 2월부터 1870년 8월 2일까지 유럽과 미국을 돌면서 순유하고 있었고, 그가 병무성의 병부소보(兵部小補)에 임명된 것은 1870년 8월 26일의 일이었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870년 8월이었다.

-유럽과 미국에 유학하고 있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가 어떻게 "고향의 아사히촌에 만발한 소우탄 무궁화를 본딴 16줄 욱일기를 제작"하여 1870년 4월 17일의 군사 훈련에 사용하도록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전세계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고 아직 임명되지도 않은 병부소보의 직을 수행하는 신출기묘한 ​재주라도 가졌다는 말인가?

 

 

원문 : 明治 3(1870)年 4 月 17 日、明治天皇が東京駒場野において薩長土肥など各藩の調練を天覧された際、日本の軍隊を表象し兵士の意気を顕揚するために旗が必要ということで、陸軍初の聯隊旗が用いられた。これが、16 条の光線を発する日章を描いた「旭日旗」であった。

번역 : 메이지3(1870)년 4월 17일 메이지 천황이 도쿄 코마바노에서 사초도히(薩長土肥) 등 각 번(藩)의 군사 조련을 사열하였을 때 일본 군대를 표상하고 병사의 사기를 현양하기 위해 깃발이 필요하여 육군 최초의 연대기를 사용하였다. 이것이 16조의 광선을 내는 일장을 그린「욱일기」였다.

<참고> ​ 사초도히(薩長土肥) : 일본의 막번체제(制)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1876)의 주력이 된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도사(土佐) 및 히젠(佐賀)의 4개 번(藩)을 의미한다.

 

 

 《fact check(3)》 욱일기가 무궁화를 본딴 것이라고?!-전혀 사실이 아니다.

 

▶ 일본방위성 논문의 내용은?

 

-이왕에 괴로움을 선택하였으므로, 일본방위성 논문을 더 살펴보면『두 얼굴의 무궁화』가 인용한 p.2는 욱일기 문양의 유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본방위성 논문 p.2에 따르면 '욱일기'는 태양의 모양을 본딴 것으로 옛 일본의 가문 문양으로 사용되던 '일족문'과 태양신을 숭배하던 '일륜신앙'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두 얼굴의 무궁화』가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근거자료로 인용한 논문이 욱일기가 태양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해설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무궁화 재배품종에서 욱일기가 만들어졌다는 황당한 주장이 가능할까?

 

 

원문 : この旭日の文様は、太陽を描いたものであるが、既に「日足紋」という家紋にも見られており、戦国時代から肥前の竜造寺氏、筑前の草野氏など北九州を中心に用いられていた。日足とは、太陽に放射状に光芒を添えたもので、その意味は、太陽を神とした日輪信仰に由来するものであった。また、形状は、光線の数(4 から 16 まで)や先端(尖ったもの、平たいもの、広がったもの)など、様々であった。

번역 : 이 욱일의 문양은 태양을 그린 것이지만, 이미 '일족문(日足紋)'이라고 일컫는 가문의 문양에서도 발견되는데 전국시대부터 히젠(肥前)의 류조지씨, 치쿠젠(筑前)의 구사노씨 등 기타큐슈 지역을 중심으로 이용되었다. '일족(日足)'이란 태양의 방사상에 빛발을 더한 것으로 그 의미는 태양을 신으로 한 일륜신앙(日輪信仰)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형상은 광선의 수(4에서 16까지)와 끝(날카로운 것, 납작한 것, 퍼진 것) 등 다양했다.

 

 

▶욱일기의 뜻은?

 

-'旭日旗'(きょくじつき)라는 말이 아침에 돋는 해를 상징한 깃발이라는 뜻이며,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주위에 아침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덧붙여 형상화한 일본의 군기라는 것은 널려 알려진 상식이다(두산백과 doopia의 '욱일기' 참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54341&cid=40942&categoryId=31746).

-그런데 널리 알려진 상식과 다른 그 무엇이 일본의 논문에 있는 것처럼 문헌을 인용했는데, 그 논문은 우리가 아는 상식과 동일하다.

 

《fact check(4)》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갑오경장을 주도하고 이때 무궁화가 일본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고?!-전혀 사실이 아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청일전쟁에서 한 역할은?

 

-동학농민혁명을 핑계로 하여 발발한 청일전쟁(1894~1895)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참전한 것은 맞다. 그는 1894년 8월 8일 제1군사령관의 내명을 받고 9월 8일 한반도로 향하여 그의 휘하부대가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9월 20일경부터 건강이 나빠져 11월 29일 일황은 그에게 귀국을 명하여 12월 8일에 일본으로 귀국했다[伊藤之雄, 『山県有朋-愚直な権力者の生涯』, 文藝春秋(2009), p.174 참조].

-이것이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청일전쟁 당시 행한 역할의 전부다. 그가 1894년 7월부터 시작되어 1896년 2월에 종결된 갑오경장을 주도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무궁화가 19세기말에 한반도에 유입?

 

-무궁화는 최치원의「사불허북국거상표」(897)에 '槿花鄕'(근화향)이 등장하는 9세기 이전 또는 늦어도 '무궁'화라는 우리말 이름이 확인되는「동국이상국집」(1241) 저술 이전에 한반도에 정착되었다(앞선 바로잡기 참조) 

-갑오경장 시기에 무궁화가 도입되었다는 것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황당한 주장에 불과하다. 

 

 

《결론》 무지 또는 의도적 왜곡 ? 그리고『두 얼굴의 무궁화』의 논리

 

▶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무지인지 아니면 의도적 왜곡인지를 묻는 것조차 이제는 허망하다.

-우매한(?) 독자가 일본 논문까지 찾아서 읽어보지 않을 것이라는 천양무궁(天壤無窮)한 확신인가?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무궁화를 일본 군국주의의 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허황된 의욕인가?

-없는 일을 거짓의 근거로 마치 있었던 것으로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무궁화와 우리의 역사는 왜곡과 조작을 거듭하고 끊임없이 폄훼된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을 벌인다는 말인가!  

 

▶『두 얼굴의 무궁화』의 논리라면?

 

-『두 얼굴의 무궁화』가 인용한 일본방위성 논문 p.2, 旭日旗(욱일기)의 뜻 그리고 아래 일본 가문의 문양과 그림(繪畵)을 살펴보면 일본의 욱일기가 아침에 돋는 해를 형상화했다는 것은 분명하다(그러한 의미의 욱일기를 전쟁범죄에 이용했다는 것도 명확하다).

-그러면 우리의 욱일기가 상징하는 태양(해)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없애야 하는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백번 양보하여, 무수한 허위의 주장과 거짓된 문헌의 인용이 다 사실이라고 가정하여 일본이 그렇게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무궁화를 일본의 꽃 나아가 일본 군국주의의 꽃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무궁화는 우리에게 전래되어 옛 선조들이 심고 가꾸며 우리의 방식으로 이해하여 이어져 온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 욱일기의 기원이 되는 일본 문양과 옛 그림들​

 

<사진2> 치쿠젠(筑前)의 구사노 가문의 문양(十二日足紋)
<사진3> 일본의 회화: 『自来也。浮世絵』(歌川国貞, 1852)

<사진4> 일본의 회화:『福神魚入船』(作者不明, 19世紀江戸時代)
<사진5> 일본의 회화: 『浪花百景』の一つ『三大橋』国員, 1854~1860)
< 사진6> 일본의 회화:『福神江の嶋もうて』( 芳幾,  1869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