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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2024] 영사실의 불빛(The Return of the Projectionist) - 시네마 파라디소

林 山 2024. 8. 21. 23:05

제21회 EBS국제다큐영화제(EIDF2024)가 8월 19일 개막되었다. EBS에서는 EIDF 2024 출품작들을 방영하고 있다. 싸구려 저질 영화만 주야장천(晝夜長川) 틀어대고 또 틀어대는 케이블 TV 채널들에 식상한 영화 팬들에게 EIDF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아주 소중한 영화제다.  

오르칸 아가자데

 

8월 20일 밤 11시 35분 EBS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오르칸 아가자데(Orkhan Aghazadeh)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영사실의 불빛(The Return of the Projectionist)'이 방영되었다. 'The Return of the Projectionist'는 '영사기사(映寫技士)의 귀환' 정도의 뜻이다.   

 

아가자데 감독은 1988년생이다. 그의 첫 단편 다큐멘터리 '레닌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Lenin, 2009)'는 라이프치히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장편 프로젝트 '프리즈너(The Prisoner)'는 아제르바이잔 최초로 칸영화제 시네퐁다시옹 레지던시에 선정되었다. 

'The Return of the Projectionist'의 한 장면

 

아제르바이잔은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생소한 나라다. 아제르바이잔의 동쪽은 카스피해, 북쪽은 러시아의 다게스탄 공화국, 서쪽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남쪽은 이란과 접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공화국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이후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다. 아르메니아 남서쪽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고립 영토이자 자치공화국인 나히체반 공화국이 있다. 터키의 지배를 받던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터키전쟁 결과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1922년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했다가 1991년에 독립하였다. 수도는 바쿠다. 현재 아제르바이잔은 세습 독재정권이 들어서 있다. 아제르바이잔 KGB 수장으로 쿠데타ㄹ르 일으켜 정권을 잡은 헤이다르 알리예프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대를 이어 대통령, 그의 부인 메흐리반 알리예바가 부통령이다.    

공중파 TV에서 아제르바이잔 영화를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케이블 채널에서도 아제르바이잔 영화를 본 기억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EIDF다. 그래서, EIDF는 문화적 다양성에 목마른 사람들의 오아시스가 되고 있다.    

인터넷도 느리고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는 아제르바이잔의 산악지대 시골 노인 사미드(Samid)는 사고로 아들을 잃고 마을 사람들의 전자 제품을 고쳐 주며 살아가는 전직 영사기사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비롯된 우울증과 싸우면서도 그는 사라져 버린 마을 극장을 복원하여 다시 영화를 상영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오락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사미드와 함께 영사기사였던 친구는 "나는 영화의 일부였고 지금도 그 열정으로 살고 있어."라고 고백한다. 사미드도 가끔 영사기를 켜고 그 자장가를 들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열정이 엄청나다. 

'The Return of the Projectionist'의 한 장면

 

이때 사미드 앞에 이제 막 영화 만들기에 푹 빠진 아야즈(Ayaz)가 나타난다. 아야즈는 사미드보다 무려 50살이나 어린 청년이다. 두 사람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향한 열정 하나로 뭉친다. 

문제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제작된 오래된 KN 영사기에 램프가 없어서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사기용 램프는 아제르바이잔에서 구할 수가 없다, 사미드는 아야즈의 도움을 받아 휴대폰이 터지는 높은 언덕까지 올라가서야 가까스로 리투아니아산 영사기용 램프를 주문하는 데 성공한다.    

램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미드는 검열관에게 극장 재개관 허락을 받아낸다. 사미드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대형 스크린도 준비한다. 극장 재개관 작업이 어렵사리 진행되는 가운데 아야즈는 사미드와 협력해서 스마트폰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The Return of the Projectionist'의 한 장면

 

하지만, 사미드와 아야즈의 여정 앞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난관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간다. 그러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는 끈끈한 우정이 싹트고, 서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감독은 서로 다른 세대인 사미드와 아야즈의 우정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적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KN 영사기로 영화를 상영하려는 사미드는 과거와 전통성, 스마트폰으로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아야즈는 현재와 현대성을 상징한다. 사미드는 아야즈로 하여금 스마트폰의 모션 캡처 기능을 사용하여 장면을 만들도록 도와주며, 소프트웨어가 애니메이션으로 바뀔 수 있도록 장면을 연출한다.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우정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감독은 사계절 내내 나타나는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도 놓치지 않는다. 계절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와이드 샷이 있다. 이는 분명 대형 스크린 상영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상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램프의 배달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이에 극장 재개관에 협조하던 마을 사람들도 사미드가 자신들을 속인다고 생각한다. 사미드는 우편 배달 날짜를 알아보기 위해 수도 바쿠까지 방문한다.   

마침내 기다리던 영사기용 램프가 배달되어 온다. 사미드는 마을 여성들에게 'The Return of the Projectionist(영사기사의 귀환)' 전단지를 나눠주며 상영회에 오라고 권유한다. 드디어 영화 상영이 시작되는 날 마을 사람들은 극장으로 모여든다. 하지만, 램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마을 사람들은 영사기사 지망생 아야즈를 질책한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끝나고..... 마을 극장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The Return of the Projectionist'의 한 장면

 

키스 드리센(Kees Driessen)은 "사미드가 젊은 조수가 자체 제작한 스마트폰 프로젝터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오래된 렌즈를 공급하고, 디지털 애니메이션에 넣을 효과음을 만들도록 돕는 것은 신구의 행복한 조화를 보여주는 순간들이다. 이것은 디지털 시대에도 고전적인 기술이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실제 세대 이동이며, 젊은 세대는 기꺼이 배우려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평했다. 

조지훈은 "영화가 우리 역사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하며, 영화가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시절의 아름다운 향수를 고스란히 담아낸다."고 평했다. 공감이 가는 평이다.  

 

'영사실의 불빛'은 여러모로 주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 감독의 허구를 바탕으로 한 1988년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을 떠올리게 한다. 캐릭터는 다르지만 사미드는 영사기사 알프레도(필립 누아레 분), 아야즈는 알프레도의 보조 토토(살바토레 카스치오, 마르코 레오나르디, 자크 페랭 분)와 어딘가 닿아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시네필리아(Cinephilia)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들에게 시네마(Cinema)는 곧  천국(Paradiso)이다. 

 

2024. 8. 21.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