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밤 9시 55분 EBS 1TV에서는 제21회 EBS국제다큐영화제(EIDF2024) 출품작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Nam June Paik: The Moon Is the Oldest TV)'이 방영되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맨다 킴(Amanda Kim) 감독이 2023년에 제작했다. 러닝 타임은 110분이다.
백남준(白南準, 1932~2006)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 대로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예술가, 작곡가, 전위 예술가다.'라는 정도만 알고 있던 차에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반가왔다. 백남준에 대해 탐구하고 공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다큐 영화를 정독했다.
어맨다 킴은 US 출생으로 현재는 프랑스에 거주 중인 한국계 US 감독이다. 비교문학 학위로 브라운대학을 졸업한 후 음악, 패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일을 경험했다. 이후 바이스 미디어(VICE MEDIA)에 입사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파일럿 프로그램과 콘텐츠 포맷을 테스트하며 경력을 쌓았다.
EIDF 홈페이지 시놉시스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음악사와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1958년 존 케이지(John Cage)의 공연에 우연히 참석한 백남준은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신의 예술 작품을 만들 용기를 얻게 된다. 이후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과거를 거슬러 미래를 탐험한 백남준의 모든 시간을 기록하며 그가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간 아티스트임을 보여준다.'고 서술하고 있다.
존 케이지(1912~1992)는 US 작곡가이다. 우연성 음악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작된 피아노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음렬주의, 전자 음악을 작곡하였다. 대표작으로 '4분 33초', '상상 풍경(Imaginary Landscape) No.4' 등을 작곡했다. 1960년대에 형성된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집단의 플럭서스(Fluxus)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플럭서스 운동에는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 백남준,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존 케이지, 오노 요코(小野洋子, Yoko Ono), 구보타 시게코(久保田 成子),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Vytautas Landsbergis), 토마스 슈미트(Tomas Schmit),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 등이 참여했다.
프로그램 노트에서 문성경은 "이 영화는 백남준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이자, 미디어 예술의 혁명가가 된 한 디아스포라(diaspora)의 전기이다. 세계 전쟁을 거친 후 폐허가 된 도시들에서 문화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이 피어오르던 시대를 배경으로 어떤 개인이 전위예술가로 변신하는 과정과 디아스포라로서 ‘소통'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를 예술로 승화시킨 맥락을 연결한다. 식민지 시대에 그는 한국인이지만 일본어(권력의 언어)를 써야 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받았기에 이 모든 권력의 규율을 부수고 어긋나고 싶은 붕괴의 욕망이 예술로 표출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가 20개 언어를 말했지만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전언처럼, 그의 파괴된 언어 구사가 해방된 예술의 기저를 마련하고 형식의 다변화를 구사해 나아간 것이다. '새로움이 진실보다 더 중요하고, 아름다움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주류 사회의 사고방식과 통제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다. 위대한 사상가가 그렇듯 위대한 예술가는 세상에 주어진 것으로부터 눈을 뜨게 하는 도화선이 된다. AI가 세상의 모든 구원과 위협의 상징과도 같은 작금의 현실에 기술이 인간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새로운 예술 혁명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다."라고 평했다.
이 다큐 영화를 평할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백남준의 일생을 개괄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백남준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구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출신이다. 친일파인 아버지 백낙승(白樂承, 일본식 이름 白川樂承 시라카와 라쿠쇼)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후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소위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이때 한국이 낳은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했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으로 전공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郎),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野村良雄)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1956년 백남준은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대학교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Wolfgang Fortner)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쇤베르크 이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후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이 초기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스스로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 기타 등등을 보여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Originale)'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제프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목적이 없는 자유,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전위음악에 주력했고, 곧 유럽과 아시아 및 US 등 세계로 퍼져나갔다.
1961년 백남준은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이때 1950년대부터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에 의해 제안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人工頭腦學)' 개념 하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레이더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2년여 동안 홀로 TV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로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실험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 독일 부퍼탈(Wuppertal)의 파르나스 갤러리(Gallerie Parnass)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적인 TV를 통해 훗날 비디오 아트라고 불리게 되는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 전시는 백남준이 자신의 즉흥음악 또는 무음악의 발상에 기초한 실제 퍼포먼스, 그 흔적과 결과물처럼 유럽에서 자신이 진행해온 작업의 성과와 함께 TV를 비롯한 미디어로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시도하는 작업이 공존하고 있었다. '적분된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레코드 샤슐릭' 같은 20세기 전위음악에 젖줄을 대고 있는 실험적 음악의 시도와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 '걸음을 위한 선', '바람을 위한 선' 같은 우상파괴적 설치 작업 및 참여예술 형태의 퍼포먼스가 함께 펼쳐졌다. 백남준은 이러한 전시 내용을 '동시성', '참여', '임의접속' 등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정리하는 종합적인 큐레이팅 전시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의 연구자들 사이에 이 전시의 중요성이 재평가되면서 아카이빙 작업과 연구가 점차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로봇 K-456'을 제작했으며, 곧 세계 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시네마테크 필름메이커스에 관여했으며, 스스로 영상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US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Papa Paolo VI)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한동안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1963년 첫번째 전시를 비디오아트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뉴욕의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진전이 일어난다. 이후에도 미디어 아트가 US 뉴욕을 중심으로 서서히 득세해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활동을 전개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영상으로서의 비디오 아트를 새로운 미술적 방법인 설치 미술로 변환하여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그에 따라 'TV 붓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생명의 상징을 전자적으로 결합하여 테크놀로지로 물든 현대 사회의 새로운 합성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판을 얻었다. 특히 'TV 붓다'는 그의 초기 비디오 설치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US의 문화적 환경이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호의적으로 변화하면서 폭발적인 수준의 미디어 전시가 빈발했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그룹전 형태로 수많은 전시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74년 뉴욕 에버슨 미술관 개인전과 함께 '비데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이라는 예술과 기술을 교차시키는 하이브리드에 관한 저작을 내놓아 미디아 아트의 이해를 도왔으며,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US 사회에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했고, 이는 네트워크 방송을 끌어들여 예술 세계의 영역 확장을 꾀한 놀라운 시도였다. 나아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와 서울까지 연결된 이 국제적인 규모의 위성 아트에는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 오잉고 보잉고(Oingo Boingo),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이브 몽탕(Yves Montand) 등의 예술가와 대중문화의 스타가 다수 참여했으며, 전 세계 2천 5백만명(재방송 포함)이 시청하였다. 이로써 전세계적인 차원의 대중적 각인이 이루어졌고, 마치 대중스타처럼 성가를 높였다. 이후에도 '위성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이 이어져 위성 연결을 통한 전세계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새로운 부족사회를 낳는지 실감시켰다.
1984년 일본 도쿄 소게쓰(草月) 홀에서 백남준과 요제프 보이스가 공동으로 참여한 퍼포먼스 '코요테 콘서트 II'가 펼쳐졌으며, 이들이 각각 몽골의 늑대 울음소리와 초원의 달빛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을 통해 1961년 첫 만남부터 계속 이어온 공동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후 퍼포먼스 계획은 요제프 보이스의 죽음과 함께 미완성으로 끝났다.
1992년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전시는 독일 쿤스트 할레와 스위스 쮜리히에서 진행된 전시의 서울 투어 전시로서 당시 과천 막계동에 자리잡은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총 관람 인원 20만명이 찾은 첫번째 전시로 기록되었다. 이 전시의 주요한 작품은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이다. 1993년 백남준은 독일 작가 한스 하케(Hans Haacke)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국가전시관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문명의 동서남북'이라는 주제의 이 전시에서 그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전자적 소통을 시도하는 비디오 로봇 형태의 '칭기스칸의 복권', '마르코 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 '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내놓았다.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태동의 산파 역할을 하며,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는 국내외 총 관람객이 160만 명에 달하는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백남준이 직접 관여한 'INFO Art'전이 주목받았다. 또한 백남준은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전시관 부문에 한국관을 설치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에 진출하는 교두보가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같은 해 그의 예술적 정수가 담긴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 전시를 진행했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때 백남준은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을 전시한 바 있다.
2006년 1월 29일 백남준은 US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위키백과)
2024. 8. 22. 林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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