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I Only Had to Say, 2018)'는 8월 21일 새벽 1시 10분 EBS에서 방영된 제21회 EBS국제다큐영화제(EIDF2024) 출품작이다. 러닝 타임은 11분이다.
감독 조한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방송영상과를 졸업했다. 단편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로 데뷔했다. 올해 EIDF '단편화첩'에 출품한 '퀸의 뜨개질(2023)'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 단편영화 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다.
밤 늦은 시간에 방영된 탓에 이 영화를 보다가 끝내는 잠이 들고 말았다. 모녀 간의 대화가 그림을 통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내용을 따라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조한나의 영화 문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김승희 감독이 쓴 '내뱉어야 하는 한숨의 순간 -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라는 제목의 영화평으로 감상문을 대신한다.
내뱉어야 하는 한숨의 순간 -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 - 김승희(영화감독)
뱉어내야 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신음, 한숨, 울부짖음, 진심. 이것들을 꾸역꾸역 참으면 몸 안에서, 마음 안에서 썩어든다. 병이 든다. 알고는 있지만 살면서 이것들을 언제든지 뱉어내도 된다고 배운 적은 없다.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남사스럽다는 이유로. 그리하여 이것을 간접적으로 해소하는 방식들이 생겼는데 그중 대표적인 방법으로 예술을 꼽을 수 있겠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술을 통해 창작자는 자기 삶에 대한 울부짖음을 담아냈고, 그 소리를 들은 관객들은 그 마음이 내 마음이라며 함께 울어 내왔다.
조한나 감독은 자신을 위해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2018)를 제작했으며 뱃속 깊숙한 곳의 응어리를 짚고 넘어가야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한다. 영화는 감독과 어머니의 대화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비록 개인 대 개인의 사적 대화라 할지라도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 안에는 관객들이 충분히 공감할 만한 보편성이 엿보인다. 바로 부모 자식 간 상처의 대물림이다.
사방이 어둡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리며 감독의 방인 것처럼 보이는 작은 상자가 화면에 나타난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어머니 김연주와 딸 조한나 사이에 존재했던 지속적인 공감의 부재, 그것은 검은 화면 같은 막막함이었다. 딸은 비밀문자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답답한 마음에 대한 신음을 뱉어낸다. 검은 방에서 나오면 다시 검은 화면을 가득 채운 어머니의 얼굴이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다. 그 목소리는 흐느끼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다양한 감정을 실린 채 이어지는데, 어딘가 어울리지 않게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어머니의 얼굴은 눈을 부릅뜨고 화가 많이 나 보인다.
감독이 뱉어낸 응어리 같은 작품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아!’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감독의 육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작품 속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어머니의 음성이 거의 전부다. 반면 감독의 목소리는 문자와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작품 전체의 감정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어떠한 ‘에너지’로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영역대의 주파수와 같아 보인다. 마치 돌고래의 노래처럼. 감독의 아픔에 동질감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그 깊이를 느낄 수 있고 과거의 자신과 과거의 감독까지 만나고 올 수 있는 그런 에너지.
영화는 어머니 김연주를 형상화한 이미지로 가득 차있다. 이따금 감독이 화면에 나타날 때는 마치 유치원생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움츠린 모습으로 질문을 던진다. 반면에 어머니의 얼굴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분노한 표정. 그런 얼굴과 함께 들리는, 웃기도 울기도 하는 어머니의 음성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다. 그것은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의 모습이 아닌 과거에서부터 겹겹이 쌓여온 기억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어머니를 그려낸 것이 아닐까?
어머니는 딸이 어렸을 적, 그의 목소리를 빼앗았다. 성인이 된 딸은 이제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고자 어머니와 대면하고 있다. 딸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진다. “왜 자신을 낳았느냐”고. 어머니는 당황스럽다. 잘못을 알면서도 동시에 자기합리화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준 상처를 낱낱이 기억하는 똑똑한 딸이 자랑스러워 웃음도 나온다. 어머니의 답변에는 당혹스러움, 죄스러움, 미안함이 교차한다. 어머니의 과거도 잠시 언급된다. 어린 시절 집이 싫었고, 엄마가 된 뒤에는 딸에게 그런 환경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대물림되고 말았다. 그 복합적인 감정들은 뒤죽박죽 뒤엉킨 듯 소용돌이치는 어머니의 머리카락과 교차되어 보인다.
검은색 배경에 흰색 선만으로 표현되는 이미지는 마치 섞여 들어갈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모녀 사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가슴 속 응어리진 슬픔을 뱉어낸다면 이런 칠흑 같은 어둠의 덩어리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데도 이 작품을 가슴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을 통해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혁명과 자유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어둠 속에서 보이는 어떤 실버라이닝을 그려낸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엔딩에 다다르면 모녀 사이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라는 것을 더욱 견고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순히 관계 회복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영화가 아니다. 모녀의 대화는 마치 도돌이표처럼 처음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사실 작품에서 꼭 해피엔딩이나 모두가 마음이 편안한 마무리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상황의 순간을 캡처해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특히 이 작품과 같이 가족과 골이 깊은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나도 피해자지만 부모도 피해자라는 것을. 용서할 수 없이 미우면서도 윗세대로부터 그들 역시 같은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으면 피어오르는 그 어찌할 수 없는 감정 말고는 해결책은 생각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지켜보는 관객도, 그런 마음을 쏟아낸 감독도 이 상처의 대물림의 밑바닥에는 한국의 가부장적 담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엄마와 딸 사이. 다시 또 엄마가 된 딸과 딸 사이. 수세대에 걸친 상처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에는 많은 사회적 상황과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가 얼기설기 얽혀있다. 그리고 이것은 공감하는 관객들이 피부로 알고 눈물로 느끼는 경험들을 통해 체화된 담론들이다.
모녀의 대화 장면을 캡처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남사스럽다고,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패륜아가 되는 것 같아 뱉지 못하고, 꾸역꾸역 참아 결국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개개인의 삶을 병들게 만드는 그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감추어지고, 드러내지 못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은 드러내는 것 자체에 가치가 있다. 그걸 보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네’라며 울면서 찾아오는 이들이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 그 슬픔의 사슬을 끊을 수 있게 만들 테니까.
이 작품은 감독이 뱉어낸 깊고 쓰디쓴 한숨이며 신음이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진심이다. 한숨을 쉬면 복이 달아난다는 속설과는 달리 실제로는 몸이 이완되며 긴장이 해소된다고 한다. 몸이 극심한 통증으로 아플 때 신음하고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통증 경감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그 아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길, 다음 작품에서는 자유롭게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길, 그리고 모녀가 이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상처의 사슬을 끊고 자유라는 빛을 맞이하게 되길 바란다.
글쓴이 김승희 영화감독(애니메이션 '심심', '심경' 등 연출,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작업 참여)
출처: https://purzoom.com/article_detail.php?articleId=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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