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시 웅포에 가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입점리 고분과 웅포리 고분이다. 두 고분은 웅포면 소재지에서 약 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어느 한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 한다. 과거 한반도에서 삼한시대의 한 축이었던 마한의 역사와 문화, 삼국시대의 한 축을 이루었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 입점리 고분과 웅포리 고분이다. 특히 익산지역은 철기시대 마한 54국 중의 중심지였던 목지국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마한 이래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1986년 새터 마을에 사는 한 학생이 칡을 캐다가 금동제 모자의 발견으로 알려지게 된 입점리 고분은 해발 240m의 함라산에서 금강변을 따라 뻗어 내린 산 능선의 정상부에서부터 남동쪽 경사면, 즉 칠목재 구릉 중턱에 분포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바로 그 해 8기의 고분을 조사하였고, 2년 뒤에는 사적 제347호로 지정된 이 지역에 대한 정비를 위해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3기의 고분을 더 발견하여 합계 21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 3기는 새터마을 뒷산과 능선 넘어 군산시 나포면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지로 지정된 이 지역의 해발 90~120m 사이에 18기의 고분이 분포한다. 웅포리 고분은 입점리 고분에서 북동쪽으로 3km 떨어진 함라산 서쪽 지맥의 남쪽 사면 해발 47~85m 사이에 분포하고 있다. 1986년 60여기의 고분 흔적이 확인된 가운데 원광대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총 30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
*입점리 고분전시관
입점리 고분군의 유형은 수혈식석곽묘(구덩식돌곽무덤) 11기, 횡구식석곽묘(앞트기식돌곽무덤) 2기, 횡혈실석실분(굴식돌방무덤) 7기, 옹관묘(독무덤) 1기로 여러 가지 유형의 고분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고분 안에서는 금동제 귀걸이 장식과 다량의 옥, 그리고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98-1호분(318×144×높이130㎝)에서는 직구대부호(直口臺附壺), 직구소호(直口小壺), 단경소호(短頸小壺) 등의 토기류와 금동제 이식(飾履), 금제수식, 옥(玉) 300여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웅포리 고분군의 유형은 수혈식석곽묘 15기, 횡구식석곽묘 12기, 횡혈식석실분 2기, 기타 1기 등이다. 웅포리 고분군도 입점리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한 지역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고분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출토유물을 보면 금동제 귀걸이 2점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기류와 철제품으로 입점리 고분군의 주인공들보다는 한 단계 낮은, 서기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 이 지역에 거주했던 유력한 세력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입점리 고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재현해 놓은 모습
입점리 고분군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맨먼저 입점리 고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모형이 손님을 맞는다. 천 년도 넘는 시공간의 차이를 둔 인물과의 대면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붉은 도포차림에 관모를 쓴 모습에서 권위와 위엄이 엿보인다. 언뜻 보아도 신분이 상당히 높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점리와 웅포리 고분에서는 백제 지방묘제인 수혈식석곽분이 중앙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의 영향을 받아 횡구식석곽묘가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익산지역이 백제의 중앙세력권 안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입점리 고분은 백제사 뿐만 아니라 익산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혈식석곽분은 구조나 출토유물을 비교할 때 금강하구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토착세력의 분묘로 보이며, 전체적으로는 백제 중앙세력의 지방확산을 살필 수 있는 백제사 연구의 중요한 기초자료로 평가된다.
*입점리 고분 86-1호 횡혈식석실분의 실물크기 모형
입점리 고분에서 대표적인 무덤은 86-1호분과 98-1호분이다. 무덤들은 경사가 비교적 심한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어서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1호분만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구조를 상세히 알 수 있다. 1호분의 구조는 원형의 봉토 내에 위치하는 횡혈식석실분으로서 남북방향을 장축으로 삼고 있다. 널방(玄室)의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이며 널길(羨道)은 남벽의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마련되어 있다. 널방은 자연괴석을 이용하여 축조했는데, 벽면은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위에서 안으로 들여 쌓은 궁륭상이며 천장은 4장의 크고 넓은 돌(長大石)로 덮었다. 바닥은 자연암반층 위에 찰흙과 모래를 섞어서 덮은 뒤 그 위에 자연석을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배수로도 확인되었다.
*고분전시관에 재현해 놓은 횡혈식석실분의 입구와 벽화. 벽화는 강서대묘의 현무도.
입점리 86-1호분에서는 금동제 관대, 금동제 관모(金銅製冠帽), 금동제 신발(飾履), 은제 말띠드리개(杏葉), 철제 마구류, 청자 네귀달린 항아리, 백제토기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5세기 중엽 백제 중앙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 지역 최고의 세력으로 성장한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입점리 98-1호분은 수혈식석곽묘로 길이 3.2m, 폭1.4m로 돌곽이 다른 고분보다 훨씬 큰 것이 특징이다. 이 무덤에서도 금동제 귀걸이 2점, 목걸이와 팔찌로 사용된 옥 623점, 토기 3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옹관묘(독무덤)에 쓰였던 독
입점리 고분에서는 옹관묘는 단 1기만이 발견되었다. 옹관묘는 주검을 독(甕)이나 항아리(短頸壺)에 넣어서 땅을 파고 구덩이(土壙)를 만들거나 독을 넣을 만큼 적당히 파서 묻는 무덤을 말한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른 철기시대를 거쳐, 한국의 남부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오랜 전통을 가진 무덤 양식 가운데 하나다. 이른 시기에 널로 쓰인 토기는 대개 민무늬토기(無文土器)나 민무늬토기 계통의 적갈색 연질토기(軟質土器), 회색 삿무늬토기(繩蓆文土器)가 주로 사용되었다. 독의 크기로 보아 묻힌 사람(被葬者)은 이른 시기에는 어린아이나 두벌묻기(二次葬)의 방법으로 어른을 세골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제 관모의 복제품
출토유물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금동관의 관테(臺輪)와 솟은장식(立飾), 관모, 신발 등과 함께 봉황무늬(鳳凰紋)와 연꽃무늬(蓮花紋)를 점열무늬로 시문한 관장식(冠飾)편들, 금동제 드리개(金銅製垂下飾), 귀걸이, 유리구슬 등의 장신구를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철지은장(鐵地銀裝)의 재갈과 말띠드리개(扁圓魚尾形杏葉), 발걸이(鐵製輪), 금동제안장꾸미개(金銅製鞍金具) 등의 마구류, 화살통(箭筒)장식, 중국 남조(南朝)의 청자네귀단지(靑磁四耳壺)를 들 수 있다. 또한 납작바닥단지(平底壺)·목단지·굽다리단지·작은단지 등의 토기류와 철제꺾쇠 및 쇠못(鐵釘)·철지은장못(鐵地銀裝釘)·은제고리장식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금동제 관모와 금동제 신발은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또 하나 중요한 유물은 금동제 신발이다. 금동신발의 크기는 길이30.2cm, 폭 10.2cm, 높이9.3cm 이며 재질은 동합금제(銅合金製) 금속으로 이는 입점리 1호분의 주인공이 백제의 고위 귀족임을 입증하는 유물이다. 금동제 신발의 경우 입점리 6호분과 신촌리 9호분,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모두 1점씩 출토되었다. 입점리에서 출토된 신발의 형태는 일본 후나야마 출토품 보다 신촌리 9호분 출토품에 오히려 더 가깝다. 입점리 1호분 신발은 단순한 부장용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리구슬로 만든 장신구
유리구슬로 만든 장신구는 신분이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호분 외에 다른 무덤들은 파괴가 심하여 내부구조를 알기가 곤란하나 대체로 횡혈식석실분이나 횡구식석실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 내부에서는 입큰단지(廣口壺)·목단지·직구호·작은단지·굽다리접시(高杯)·뚜껑접시(蓋杯)·세발토기(三足土器)·독 등의 토기류와 쇠낫·쇠도끼·쇠손칼·철제꺾쇠·쇠못 등의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입점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검은색에 가까운 암회색 토기들이다. 그 중에서 다른 토기들은 대개 무늬가 없는데 비해 입큰항아리는 빗살무늬가 보인다. 항아리의 중간 불룩하게 나온 표면에 빗살로 그은 것 같은 평행선 무늬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무덤의 주인이 살아있을 때 사용하던 생활용품들을 함께 묻었던 것은 당시의 사람들은 사후의 세계를 믿었기 때문이다.
*청자사이호(靑瓷四耳壺)
항아리의 몸통 어깨선을 중심으로 네 귀가 달린 청자가 눈길을 끈다. 청자사이호는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깨진 조각을 주워 모아서 맞춰 놓았다. 중국에서 수입한 이 청자가 서해안 인접 지역인 입점리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백제가 이미 4-5세기에는 중앙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중국과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청자사이호는 무령왕릉, 공주 수촌리 유적, 서산 분구묘에서도 발굴된 바 있다.
*북방식 고인돌
입점리 고분군 전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봄볕이 따뜻하다. 전시관에서 조금 올라가면 고인돌 2기가 있다.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은 크게 북방식(탁자식), 남방식(바둑판식), 개석식((蓋石式)으로 나눈다. 북방식과 남방식은 시신을 안치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북방식은 시신을 땅위에 안치한다. 즉 땅 위에 넓적한 돌 판석(板石)을 세워 긴 직육면체의 무덤칸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뒤, 그 위를 널빤지 같은 상석(덮개돌)으로 덮는다. 고인돌이 완성되면 탁자와 비슷한 모양이 된다. 북방식 고인돌은 주로 북한의 평안도나 황해도 지역, 남한에서는 전북 고창 이북 지역에서만 나타나고 동해안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북방식이라고 부른다.
남방식은 시신을 땅 속에 안치한다. 즉 땅을 파고 그 곳에 돌로 방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넣는다. 그런 다음 그 위에 여러 개의 작은 받침돌을 놓고 다시 커다란 상석(덮개돌)을 얹어서 마무리한다. 고인돌이 세워지면 그 형태가 바둑판과 매우 비슷하다. 남방식 고인돌은 분포범위가 북방식과 일부 겹치는 곳도 있지만 주로 호남이나 영남지방에서만 볼 수 있고 중부 이북지방에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남방식이라고 한다.
고인돌이 있는 곳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입점리 고분군이 나타난다. 고분군은 양지바른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웅포의 금강변에 살다가 죽어서 이곳에 묻혔을 것이다. 물도 풍부하고 바다와도 통하며, 무엇보다도 넓고 기름진 평야를 가진 웅포야말로 당시의 농경사회에서는 가장 살기 좋은 곳이었으리라. 이 무덤의 주인들은 그 당시 최고 권력자들이었으니 그들이 누렸던 호사는 제왕도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덤들을 만드는데 동원되었을 평민이나 노예들에 대한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 묻혔을까?
2006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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