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머니는 포도당 링거를 맞고 계셨다. 간병사의 말이 저녁을 안 드셨단다. 덴 입술과 혀가 쓰려서 식사를 하는데 불편하다고 호소하신다. 입술의 피딱지는 많이 말라 붙었다.
침을 놓으려고 발을 보니 분홍색 바탕에 토끼가 그려진 예쁜 양말을 신고 계신다. 오늘 갈아 신긴 모양이다. 환측의 중풍칠처혈과 염천혈에 침을 놓고, 건측 팔다리의 관절과 근육을 풀어 드렸다.
"어머니, 오늘은 이쁜 양말 신으셨네요."
"....."
"어머니, 여기서 일어나 나가시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에요?"
"집에 가서 밥 먹는 거다."
"그러시려면 열심히 재활운동을 해서 걸어나가셔야 해요."
어머니는 그리운 고향 집에 가서 입에 맞는 음식을 잡숫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오늘은 어머니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어머니의 말은 몇 번이나 되물어야 겨우 알아듣을 수 있다.
"집에 데려다 줘."
"왜요?"
"집에 승윤이, 승혜, 병욱이가 와 있어."
"언제요?"
"일주일 전에 왔다."
"누가 그래요?"
"그냥 안다."
"조카들은 지금 저 멀고도 먼 아르헨티나에 있어요."
"....."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조카들이 고향 집에 와 있다고 생각하시다니! 어머니는 섬망 초기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섬망은 중풍 환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특징적인 증상은 환각, 과다행동, 초조함, 떨림 등이다. 섬망은 특히 어머니처럼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활동이 정상 이하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 어머니는 다시,
"집에 데려다 줘."
"조카들이 고향 집에 없대도요."
조카들이 고향 집에 없다는 것을 아무리 납득시키려 해도 어머니는 믿으려 하지 않으셨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득을 하고 나서야 어머니는 잠잠해지셨다.
"어머니, 뭐 드시고 싶은 것은 없으세요?"
"팥죽이 먹고 싶다."
"새알이 들어 있는 게 좋아요, 안 들어 있는 게 좋아요?"
"안 들어 있는 거."
"내일 아버지 나오실 때 팥죽 사가지고 오시라고 할게요."
잊어버리기 전에 나는 전화로 아버지에게 내일 나오실 때 새알이 들어 있지 않은 팥죽을 사오시라고 일러 드렸다. 그러고보니 어머니가 쓰러지신 이후 온통 어머니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아버지를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가장 힘든 사람은 아버지이리라. 그래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잠들기를 기다려 병실을 나섰다. 밤이 제법 깊었다.
2012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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