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어머니와 이별 연습을 하다 10

林 山 2012. 12. 3. 10:33

오늘은 몇 달 전 백내장 수술을 했던 왼쪽 눈의 실밥을 빼러 안과에 가는 날이다. 실밥은 1차, 2차에 걸쳐서 했는데 오늘이 3차로 마지막이란다. 주치의가 실밥을 빼면서 불편한 점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크게 불편한 점은 없지만 눈부심 현상과 잔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 문제 때문에 다시 수술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하자 그렇단다. 정 문제가 되면 수정체를 바로잡는 수술을 할 수는 있다고 한다.

 

주치의가 의사들은 내일 수가 문제로 진료 거부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한의계는 이슈가 없느냐고 물었다. 한의계도 지금 밖으로는 한약을 이름만 바꾼 천연물신약 문제, 안으로는 내부의 적과 싸우느라 시끄럽다고 말해 주었다. 다음에 또 와야 되느냐 물으니 내년 1월에나 한 번 오란다.

 

안과 의원을 나와서 곧바로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보러 갔다. 어머니는 오늘도 포도당 링거를 맞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셨다. 심지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셨다.  

 

"어머니, 제가 누구에요?"

"....."

"저 모르세요?"

"....."

"팥죽은 드셨어요?"

"아니."

"왜요?"

"맛대가리가 없어서."

 

어머니의 눈은 촛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른쪽 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기라도 하듯 내저으셨다. 음성군 소이면 중동마을에서 오신 4번 침상 할머니가 오늘 아침부터 저러신다고 했다. 

 

어머니는 오른손으로 침상 난간을 붙잡고 자꾸만 일어나려고 하셨다. 마음은 일어나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만 몸이 말을 안 듣자 어머니는 잘 알아 듣지도 못하는 큰 소리로,

 

"나를 일으켜 다오."

"뭐 하시려고요?"

"집에 가서 너 국수 끓여 주려고." 

"갑자기 왠 국수에요?"

"일으켜 달라니까."

"저 국수 안 먹어도 돼요."

 

갑자기 국수를 끓여 주시겠다는 어머니.....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보리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양식이 귀했다. 정부에서는 양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로사업을 벌여서 품값 대신 밀가루를 주었다. 밀가루는 미국 원조식량이었다. 어머니도 거의 매일 취로사업에 나가셔서 하루종일 힘든 노동을 한 댓가로 밀가루를 받아 오셨다.

 

당시는 쌀이 몹시 귀했다. 그래서 쌀밥은 명절이나 제삿날이 아니면 구경도 못했다. 평상시에는 콩이나 보리, 감자, 고구마 등이 많이 섞인 잡곡밥을 먹어야만 했다. 밥은 하루에 한 끼 밖에 먹을 수 없었다. 밥을 두 끼 먹는 날은 호사하는 날이었다.

 

밀가루는 우리 가족의 귀중한 식량이었다. 어머니는 밀가루로 칼국수, 수제비, 개떡을 만들어 가족들의 끼니를 해결하셨다. 매일 밀가루 음식을 먹다 보니 질릴 대로 질려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칼국수와 수제비라면 이가 벅벅 갈렸다.  

 

당시는 라면이 나온 지도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가끔 라면을 사오셨다. 라면을 함께 넣어 끓여 주신 칼국수가 왜 그리도 맛있던지......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라국수를 다시 먹는다면 옛날의 그 맛이 아니리라.

 

어머니가 칼국수를 만드실 때면 나는 늘 곁에서 기다렸다. 홍두깨로 반죽을 밀고 또 밀어서 얇게 되면 몇 겹으로 접어서 부엌칼로 썰 때 나오는 '꽁다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몇 겹으로 접은 밀가루 반죽의 양 끝 '꽁다리'를 잘라 내게 주곤 하셨다. 그러면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아궁이의 불에 그것을 구워서 먹었다. 구운 '꽁다리'는 내게 훌륭한 과자였다.   

 

나중에 가정을 이루고 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 나는 한동안 칼국수와 수제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내 입맛이 다시 옛날로 돌아갔는지 칼국수와 수제비를 별식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입맛이 돌아오자 나는 국수집에서 파는 칼국수보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칼국수가 더 맛있었다. 그런 나를 위해 어머니는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만들어 주시곤 하셨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중에도 오로지 나에게 국수를 끓여 주시겠다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이토록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불을 걷어 다오."

"왜요?"

"너 국수 끓여 주려고."

"국수는 다음에 끓여 주세요."

"이불 좀 걷어 줘."

"일어나시려고요?"

"그래."

 

이불을 걷어 드렸더니...... 갑자기 어머니는 오른손으로 벽을 가리키면서 있지도 않은 문을 열어 달라셨다. 큰 소리로 욕 비슷한 말도 했던 것 같다. 손은 연신 허공을 향해 내저으시고, 눈은 촛점을 잃은 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셨다. 어머니는 오른손으로 천장을 가리키면서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셨다. 내가,

 

"천장에 누가 있어요?"

"니 아부지."

"아버지가 저기 계세요?"

"그래."  

 

이번에는 어머니가 자꾸만 손바닥을 바라보신다.

 

"손바닥에 뭐가 있어요?"

"바늘이 꽂혀 있다."

 

나는 어머니의 손바닥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바늘이 어디 있어요? 없잖아요."

"....."

 

이번에는 어머니가 오른손으로 벽을 가리키신다.

 

"벽에 뭐가 있어요?"

"강물이 흘러간다."

"잘 보세요. 강물이 아니잖아요."

"....."

 

어머니는 침상 왼쪽에 세워져 있는 철제 링거 거치대를 자꾸만 잡아당기려고 하시다가는 또 침상 난간을 잡으려고도 하셨다. 어머니는 환각과 과다행동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증상은 전형적인 섬망이었다. 

 

섬망 증세의 치료는 심리적 안정이 최우선이다. 어머니의 과다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위해를 끼칠 염려는 없었지만 포도당 링거 줄을 잡아당길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링거 거치대를 어머니의 손에 닿지 않을 만큼 떼어 놓았다.

 

나는 어머니를 재우기로 했다. 잠보다 더 좋은 안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어르고 달래고 하면서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드디어 어머니가 눈을 스르르 감으신다. 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드신 어머니를 내려다 보는데 눈물이 핑 돈다. 

 

나의 모습을 내내 지켜 보신 할머니들이 나를 대견하다고 칭찬을 하신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그동안 어머니와 정이 든 할머니들도 안타까왔던 모양이다. 

 

무거운 가슴을 안고 병실을 나섰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지.      

 

2012.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