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내 동무 박정선 군을 떠나 보내며

林 山 2012. 12. 1. 10:19

2012년 11월 29일. 나와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동무 박정선의 부음을 들었다. 이제 한창 활동할 나이인데..... 애석하기 짝이 없다. 

 

동무 박 군은 젊은 시절 삼천리 방방곡곡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역마살이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타향을 떠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20년 이상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내 나이 40이 넘어 교직을 그만두고 한의대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동무로부터 연락이 닿았다. 그는 전국을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갔는데 그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아예 정착을 했다는 것이다. 

 

20년도 훌쩍 지나서 처음으로 동무를 만났을 때 그는 제주시 관덕정 근처에 있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살고 있었다. 낮에는 옆방 친구와 함께 공사장에서 목수 일을 한다고 했다. 아침 일찍 동무가 일터로 나가면 나는 제주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거리 구경을 했다. 저녁에 동무가 일터에서 돌아오면 근처 선술집에서 그날 있었던 일이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안주로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 후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제주에 건너간 것 같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나는 동무와 함께 한라산을 오르거나 바다낚시를 가곤 했다. 뭍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경도 동무 덕분에 여러 곳 가보았다.

 

두 번째 제주에 갔을 때던가..... 동무는 목수 일을 그만두고 '박가네 수타면' 포장마차를 하고 있었다. 그가 중식 요리사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동무는 제주시 재래시장, 서귀포 5일장마다 장터를 옮겨 다니면서 수타면 포장마차를 열었다. 메뉴는 짜장면과 짬뽕 단 두 가지였다. 종업원도 없이 수타면을 만들고 나르고 치우는 일을 혼자서 다 했다.

 

어느 해던가..... 서귀포 5일장터에서 포장마차를 연 날 나는 홀서빙을 맡아서 그릇을 나르고 치우는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 점심 때가 지나고 손님이 뜸해졌을 즈음 박 군이 짜장면을 한 그릇 먹으라고 내왔다. 나는 그때 먹었던 짜장면 맛을 잊지 못한다. 그때까지 내가 맛본 짜장면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짜장면 맛을 본 나는 대처에 나가서 본격적으로 중화요리집을 해보라고 동무에게 권유했다. 그러나 동무는 내 제의를 한 마디로 일축했다. 중식당을 열게 되면 일년 내내 매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돈은 벌지 모르지만 그 대신 자유로운 삶을 잃게 되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다. 역마살을 가진 사람다운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 갔을 때는.....  동무는 '박가네 수타면'을 때려치고 감귤 농사를 짓고 있었다. 감귤밭이 자그마치 만오천 평이나 된다고 했다. 50을 훌쩍 넘기 나이에 남편을 사별한 여성을 만나 홀아비 신세도 면했다. 그는 그동안 살던 제주의 허름한 여인숙을 나와 아내가 살고 있던 서귀포 남원읍 하례리로 터전을 옮겼다. 그야말로 장가를 간 것이다.

 

나는 역마살이 있는 동무가 어떻게 정착을 할 생각을 했을까 의아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가 그렇게 오랜 세월 방랑을 한 것은 어디엔가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은 어디엔가 앉을 곳을 찾기 위해서인 것처럼......

 

어느 해 겨울 한라산에 폭설이 내렸다. 환상적인 설경을 보기 위해 동무와 함께 한라산 등반을 하기로 했다. 그 전날 한라산에서 등반훈련을 하던 대학 산악부원들이 사고로 여러 명 희생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성판악에서 발목 위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면서 거의 축지법을 쓰는 수준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동무는 나를 따라잡느라 애를 먹었다.

 

성판악-관음사 코스는 18.4km로 보통 8~9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오전 8시경 성판악을 출발해서 진달래밭대피소를 지나 백록담에 오른 다음 왕관릉-탐라계곡 용진각-삼각봉을 거쳐 관음사로 내려와서 시계를 보니 12시 밖에 안되었다. 성판악-관음사 코스를 단 4시간만에 주파한 것이다. 8~9시간 코스를 4시간만에 주파하다니 나 스스로도 놀랐다. 아무 생각없이 오롯이 걷는 데만 열중한 결과였다.  

 

제주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 있을 때 동무는 제주의 산악인들 사이에 내 이야기가 종종 회자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가 한라산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한라산의 전설이라니.....!         

 

그러던 어느 날..... 동무는 목과 등, 어깨에 생긴 심상치 않은 통증으로 제주에 있는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낫지를 않자 동무는 서울 아산병원으로 옮겼다. 2010년 11월 12일 아산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결과는 폐암 4기였다. 청천벽력이었다.  

 

동무의 폐에서는 3~5mm 크기의 비소세포암 2개가 발견되었다. 원발성 폐암이 좌우 경부 림프선으로 전이되고, 림프선을 통해서 척추 3곳에 전이된 상태였다. 림프선이 딱딱하게 부은 결절들이 목의 양쪽 부위에서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기침 등 호흡기 증상은 아직 거의 없었다. 뒷목과 어깨 양쪽 견정혈 부위에 둔통이 있고, 좌측 등 의희혈에 간헐적인 자통이 있었다. 

 

아산병원 주치의는 별 뾰족한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새로운 치료법 임상시험을 제의했다. 이에 동의한 동무는 2010년 11월 18일부터 새로 개발된 암 치료제를 시험하는 임상실험에 들어갔다. 항암제 주사와 방사선 치료 후 의료진은 암세포가 많이 감소했다는 말을 했지만..... 암세포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의미했다.

 

목과 어깨의 지속적이고 심한 통증으로 동무는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해야만 했다. 경추쪽의 전이암으로 인한 통증으로 추정되었다. 동무는 마약성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식도에 화상을 입어 음식을 넘길 때 목이 따갑다고 했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변비와 당뇨도 생겼다. 또 소변을 자주 보았다. 기력도 상당히 저하되어 잠을 잘 때 식은땀을 흘렸다.

 

동무는 아산병원의 항암요법의 효과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나한테 한방 치료를 부탁했다. 2011년 2월 10일부터 나는 박 군의 체력과 면역력을 보하면서 폐암과 전이암 세포들을 제압하는 공보겸시(攻補兼施) 처방을 쓰기로 했다. 다년간의 연구 끝에 창방한 신효항암단(神效抗癌丹)을 처방했다. 동무는 한약을 복용하면서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예전의 활기도 되찾았다. 삶의 질도 매우 좋아졌다고 했다.

 

나는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으니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꼭 해보라고 동무에게 충고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하느라고 그랬는지 동무에게서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던가! 그러다가 바로 오늘..... 동무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폐암 4기 진단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여명이 6개월 내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한약을 쓰기 시작한 날로부터 동무는 약 1년 9개월을 더 살았다. 물리적 시간이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그래도 나는 동무가 일 년을 천 년처럼 살았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 일 년 동안 자신의 삶을 진정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믿고 싶다. 

 

내 동무 박정선은 그가 남긴 혈육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어 빈소를 차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오전 10시경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변하여 제주도의 어느 숲속 나무 아래 묻혔다. 생전에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뤄 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동무는 그렇게 대지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다.

 

나는 동무가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 다음에 제주에 가거든 동무가 묻힌 나무를 찾아가 해후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재를 먹고 자란 나무에 쓴 소주 한 잔을 부어 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동무를 기억해주는 사람도 거의 없으리. 이에 동무에게 술 한 잔 올리며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돌이켜 봄으로써 그를 기리고자 한다.

 

삼가 동무의 명복을 빈다.

 

2012년 11월 30일

 

박정선의 동무 임종헌